위 그림은 필자가 즐겨 사용하는 감성분류체계(이미지 스케일) 위에 가상의 축구 유니폼 색상들을 배치한 것이다. 이 체계는 6가지 성격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으로 갈수록 동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하단으로 가면 정적이고 수동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좌측은 부드럽고 명랑한 성향을 뜻하고 우측으로 가면 가는 만큼 자기주장이 강하고 지배적인 성향을 뜻한다. 이 6가지 감성적 성향은 몇 단계의 논리적 변환을 거치면 6개의 심리적 욕구 혹은 6가지 성격 유형이 되기도 한다. 타원 안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은 6가지 감성적 성향의 두드러진 특징들이다.
축구 유니폼과 민족적 감성
재미있는 것은 이 체계에 배치된 유니폼 색상들이 현재 각국의 유니폼 색상과 매우 유사하며 더욱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성과도 잘 들어맞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단 중앙좌측의 유니폼 배색들은 열정적이며 낙천적인 남미와, 상단 우측은 뜨겁고 적극적인 유럽의 라틴 문화권 국가들의 유니폼 색깔과 흡사하다. 절제가 강하고 조직적인 일본의 유니폼과 유사한 배색을 우측 하단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억센 게르만, 앵글로 색슨 민족의 것은 그보다 조금 위쪽에서 볼 수 있다. 범위를 한 국가로 좁혀 보면 그 안에 이와 유사한 경향이 다시 반복된다. 예컨대 잉글랜드 국가대표 유니폼은 흰색이 주가 되지만 얼마 전에 내한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의 색은 밝은 적색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맨체스터팀의 상대적 성격이 그렇다는 것일 게다.
열정적인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유사한 배색 유니폼이 우측 하단에 있는 것이 특이하지만, 두 국가가 패션과 미술이 발달한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청색이 주가 되는 프랑스 유니폼은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에서 유래했지만 유독 청색이 주가 된 까닭을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 혹은 그들의 패션감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주리 군단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유니폼은 강성했던 사보이 왕가 시절의 청색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 국가나 집단의 선호 배색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에는 지배적 감성 말고도 풍토색(혹은 지역색), 종교나 지배 이데올로기, 경제적 수준, 역사적 경험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일조량이 많은 지중해 연안이나 남미와 같은 곳에서는 소위 赤視化(red sighted)가 일어나 눈동자의 색이 짙어지고 화려한 원색을 좋아하게 된다. 토양 등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색도 영향을 주는데 사막이 많은 중동지역 사람들은 카키색 환경에 싫증을 느낀다. 이런 것들이 풍토색을 결정하게 된다. 터키나 이라크 같은 이슬람권 국가의 유니폼에 흰색이 많은 것은 종교적 이유가 클 것이다. 성리학이나 선(禪) 불교의 영향이 컸던 조선시대 지배계층에서 흰색을 즐겨 사용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경제적 수준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소득이 높아지면 선호하는 색의 채도가 낮아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원색이 많아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적 경험도 중요한데 나치를 경험한 프랑스에서는 나치의 군복색을 연상시키는 짙은 청회색을 싫어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필자가 20대 때 프랑스로 수출할 제품의 색을 짙은 청회색으로 골랐다가 바이어의 퇴짜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앞서 이탈리아의 유니폼도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사례다.
각국의 감성적 성향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나?
이런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각국의 선호 배색 혹은 디자인이 나타나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각국의 감성적 성향이다. 감성적 성향을 중심으로 풍토, 종교 등의 요인들이 덧붙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 국가의 감성적 성향은 겉으로 드러나는 색채나 형태의 배후에서 작용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어떤 색이나 형태를 좋아한다는 식의 겉 인상만으로 감성적 성향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파란 색을 좋아한다고 하자. 옷을 고를 때에는 그 말이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나 가구를 고를 때에도 그럴까?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파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 주는 감성이다. 그래서 파란색이 드물고 질감이 중요한 자동차나 가구를 고르는 맥락에서는 동일한 감성을 주는 다른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색채가 아닌 배후에 있는 감성을 파악해야 제대로 그 문화를 이해할 수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 특징의 배후에 있는 감성적 성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래의 그림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두 여인의 얼굴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림대 조용진 교수가 통계적 절차를 거쳐 제작한 한국과 일본의 표준미인얼굴이다. 우리에 비해 일본 미인은 눈꼬리가 내려갔고 턱이 좁으며 입술색을 엷게 칠했다.
그 다음은 한국과 일본의 사찰에 있는 사천왕상의 모습이다. 한국의 사천왕상은 화려한 배색이 돋보이지만 조각의 깊이나 정교함은 약하다. 반면 일본의 것은 색이 없거나 있어도 우리에 비해 매우 적고 그 대신 조각의 깊이가 깊고 정교하다.
2006년도에 한국과 일본에서 각기 제법 팔렸던 휴대폰 디자인들이다. 한국의 휴대폰이 검정색이나 무거운 금속성 질감이 주조였다면 일본은 파스텔 톤이나 밝은 금속성이 대세였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사천왕상, 휴대폰 디자인의 한일 간 차이는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의 배후를 꿰뚫는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맥락은 없으며 있어도 매우 가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쉽게 변하지 않는 고유의 감성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맥락을 파악해야 각국의 사정에 맞는 디자인을 능동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해당 국가의 몇 가지 디자인 특징을 수동적으로 쫒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국은 활동가·카리스마형, 일본은 참모형·소녀적 취향
약간의 통계적 절차를 거치면 앞서 축구 유니폼에 사용했던 감성분류 체계에 이들을 배치할 수 있다. 한국의 표준 미인얼굴은 우측 상단에 위치한다. 사천왕상도 크게 다르지 않은 위치다. 휴대폰은 비슷한 위치에서 우측 중단까지 퍼져 있다. 반면 일본의 미인은 좌측 하단, 사천왕상은 우측 하단, 휴대폰은 하단 좌우에 퍼져 있다. 각기 따로 움직이는 것 같던 얼굴, 휴대폰, 사천왕상의 특징들이 동일한 감성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은 활동가형과 카리스마형 감성을, 일본은 참모형과 소녀적 취향이 섞인 감성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주정적인 문화와 주지적인 문화의 대비를 볼 수도 있다. 이런 데이터를 보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배우들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인기가 큰 연예인 일수록 체계의 하단(일본 미인의 얼굴위치) 가까이에 위치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이에 대한 데이터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공개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서구의 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각국의 감성적 성향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해 각국에 특화된 디자인을 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사용한 감성분류체계는 1995년 뉴질랜드 기업이 개발한 것을 국내 사정에 맞게 필자가 조금 수정한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수 십 년 전부터 이런 체계를 개발해 사용해 왔다.
국내에서도 몇 가지 개발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쉽게 보급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패션디자인계에서 사용하는 편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 결재를 위해 형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서구의 기업들이 이런 도구를 이용해 해당 국가에 특화된 디자인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사례가 미국 마텔사(社)의 바비인형이다.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머리를 뒤로 넘겨 활동적이고 화려한 인상인 미국의 바비 인형에 비해 일본의 바비 인형은 눈 꼬리가 내려가고 머리가 앞이마를 덮는 등 순하고 얌전한 인상이다. 반면 한국에서 팔리는 바비 인형은 미국에서 판매되는 인형과 크게 다르지 않게 화려하다. 이는 한국에 특화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시장의 크기가 작아 미국에서 판매되는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와 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은 감각이다?
선진 기업들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디자인 관리방법들을 보다가 우리 디자인계를 돌아보면 걱정이 앞선다. 아직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이 예술이라고 믿고 있다. "디자인은 감각이다"라는 식의 모호한 경구가 잘 먹혀들어간다. 비교적 예술주의적 관점이 강했던 유럽에서도 편집디자인과 같은 일부 전통적 그래픽 디자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과학적 접근으로 돌아선 지가 오래됐건만, 우리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10년 전쯤 컬러 이미지스케일로 유명한 일본의 시게노부 고바야시 선생이 국내 모 대기업에 자신이 개발한 이미지 스케일(감성분류체계)의 사용법을 몇 개월에 걸쳐 교육시키고 간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반적으로 써오던 방법들이었지만 우리 디자이너들에게는 생소했는지 그 이후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는 디자이너만의 잘못은 아니다. 이런 도구를 사용해 체계적으로 디자인하자면 그만큼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예컨대 사전 조사를 할 만큼의 충분한 여유 시간을 디자이너에게 줘야 하고 감성관련 데이터가 축적될 수 있도록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인부서를 세련되게 이용한다는 것에는 바로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 디자인업무가 시스템화 되고 디자인 결과물이 안정적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 결과물이 나오는 시간과 질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디자인의 성과측정도 용이해진다. 디자인이 소비자에게 주는 감성적 효과의 목표치와 결과치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디자이너의 발상과정은 수평적 발상과정과 수직적 발상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이것저것 다양하게 모색을 해보는 수평적 발상과정을 통해 적절하다 싶은 발상을 찾으면 이 발상을 수직적으로 깊게 파고들어 정교화한다. 이 때 수평적 발상과정을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앞에서 소개한 감성관리 도구다.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이 도구를 통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디자인의 발전에 긴요한 감성관리 도구(이미지 스케일, 감성분류체계 등 여러 가지로 부를 수 있다)들은 인간의 행동과 감성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의 토대 위에서 개발된다. 그 이론들은 언어학에서 나온 것에서부터 융의 성격이론, 진화론, 감성에 관한 신경생리학적 이론까지 매우 다양하다. 과학이 문화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접점에 디자인이 있다. 디자인이 예술이 아닌 이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