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장소, 절차 모두 부적절한 남북정상회담에 반대한다." 8일 오전 남북정상회담 발표 직후 나온 한나라당의 첫 반응이다. 얼마 전까지 '한반도 평화비전'을 발표하며 새로운 대북정책을 추구하겠다던 약속을 무색케 했다. 오후가 되자 유력 대선주자들이 다소 유연한 입장을 내놓긴 했지만, 하루가 지난 9일 현재까지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그런 한나라당을 보며 아베를 연상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을 실제로 막을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반대만 한다면 아베처럼 외통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차라리 정상회담이란 판을 적극 활용해 '업적의 50%'를 가져갈 생각을 하는 게 오히려 현명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아베의 수렁에 빠지고 있는 한나라당을 정부나 여권이 마냥 즐겨서도 안 된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정상회담에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지만, 최소한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을 정상회담의 한 주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제의 정상회담'은 여권의 대선전략으로도 좋지 않다고도 했다.
'남북화해가 되면 남남갈등이 따라온다'는 지적에 대해 전문가들은 남남갈등은 논쟁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구조가 확정됨에 따라 한 쪽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상회담의 의제 문제에 있어서 전문가들은 △핵 문제는 원칙적인 입장만 받아내는 선에서 머물 수밖에 없고 △평화체제 문제에서는 남북이 주도해야 할 부분을 미리 정리해야 하며 △군사적 신뢰구축과 긴장완화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1991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재확인 해야 한다는 의견, 소위 '4대 근본문제'에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의견 등 핵과 평화 문제의 각론에 있어서는 다소 다른 전망을 내놨다.
다음은 8일 저녁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있었던 전문가좌담 전문이다. 이날 좌담에는 서동만 상지대 교수,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민족21 편집주간), 김근식 경남대 교수가 참여했고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北, 핵실험 이후 정상회담 추진 기조 유지
박인규 : 오늘 긴급좌담은 2차 남북정상회담의 배경과 의제, 주변국들의 시선, 국내 정치에의 영향을 짚어보고자 마련했다. 그동안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말들은 꾸준히 많았지만 전격적인 발표였다. 발표를 들었을 때의 첫 번째 소감이랄까는 어떤 것이었나?
서동만 : 솔직히 예상 밖이었다. 한 때는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정치권에서 많은 얘기들이 나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잦아들어 비관적인 분위기가 강했었고, 그러한 쪽으로 글도 쓴 바 있다. 남북 간에 물밑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복이 있었고 진통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이 완벽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구조가 아니라서 소문이 돌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전략적 차원에서 남북 모두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나름대로 추진해 왔다고는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합의가 있고나서 바로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발표부터 회담 개시일인 28일까지 불과 3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8월 말을 마지노선으로 해서 협상이 진행되다가 거의 막판에 타결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외적으로 6자회담의 일정, 국내 대선 일정 등을 고려할 때 9월로 넘어 갈 수는 없게 되어 있다.
김근식 : 정말 전격적이었다. 사실 최근에 8.15남북공동행사도 북측이 분산개최를 요구하는 등 남북관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정상회담이 발표됐다. 이를 보면 남측 노력의 성과라기보다는 북측의 갑작스런 입장 선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머릿속에 이번 어떤 전략적 배경이 있는지 궁금했다. 정상회담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잘 분석해야 한다.
우선 북측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와 국제정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미관계도 그렇고, 6자회담에서도 북측은 스스로 미국을 끌고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북관계 역시 전략적으로 진전시킴으로써 이참에 한반도 정세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북핵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체제에 대한 인정을 받아내고 남북관계로는 경제적 도움을 받아낸다는 양수겸장의 의도다. 북핵과 남북관계를 동시에 진전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핵을 통해 체제를 인정받겠다는 것은 핵포기라는 결단이 전제된 것이고, 남북관계를 통해 체제 위기를 돌파하는 것 역시 개혁개방에 대한 의지가 전제돼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김 위원장의 머릿속에는 상당히 큰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창현 : 사실 북측은 핵실험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기조가 이미 나왔었다. 정상회담 논의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한다는 것이 핵실험 이후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원점에서 재검토한다는 것은 시기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의미다. 그 방침에 따라 상당히 오랜 기간 준비해 왔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3월 과거 북중정상회담을 준비한 경험이 있는 김양건을 통일전선부장으로 배치했다. 5월에는 대남 고위 관계자들이 모여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장소 문제는 남측이 '어디든 가능하다'는 입장이었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고 시점이 큰 문제였다. 2.13합의가 방코델타아시아(BDA) 금융제재 문제로 상당 시간 정체되면서 몇 달 동안 난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측이 이런 기조를 정한 것은 그들이 중요시하는 4대 근본문제가 더 이상 장관급회담이나 군사회담을 통해서는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4대 근본문제란 혁명열사릉 등 참관지 제한 문제,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주한미군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북방한계선(NLL) 문제다. 이 문제들이 실무적 차원에서는 어려우니 최고 정상급회담을 통해 하나라도 돌파구를 마련해야겠다는 판단을 김 위원장이 했고, 그 시기로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결국 북측은 서해에서의 긴장 고조와 적극적인 정상회담이라는 두 가지 카드 가운데 정상회담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2차 정상회담에 대한 북측의 제안은 김정일 위원장이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병행해서 발전시킨다는 방침을 정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박인규 : 지난해부터 북측이 정상회담을 검토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 아닌가?
김근식 : 그동안 북측은 정상회담에 대해 시기와 장소, 의제는 상관이 없지만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해왔다. 2.13합의 이전에는 북미간의 여러 문제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시기가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4대 근본문제가 정상회담 제안의 배경이라는 정 교수의 분석은 동감한다. 남측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북측이 적극적으로 정상회담에 나선 것은 4대 근본문제의 해결이 장성급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선 것으로 풀이된다.
현 시점에서의 정상회담은 다음 정부에게도 부담이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몇 개월 안 남았다는 것은 합의문에 도장을 찍어 놓으면 이행은 다음 정부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정권에서도 그걸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남측의 다음 정권이 어디로 가느냐에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북측으로서는 그 정권에게도 이번 합의내용의 부담을 지우는 정치적 담보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서동만 : 남북간에는 4대근본문제가 있지만, 북미간에도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얼마 전에는 북측이 북미 간에 평화협정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한 북미 양자접촉 과정에서 미국은 북측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했지만, 북측이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처음으로 자기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6자회담 틀 속에서 당사자 포럼을 개최한다는 것이 합의된 바 있고, 남-북-미-중의 4자회담이 될 것으로 예상된 바도 있다. 하지만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당사자가 누가 될 것인가, 남북인가, 북미인가, 남북미인가, 남북미중인가의 문제는 고도의 정치적 결정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이와 관련해 남측의 입장을 듣고 조율해야 하는데 실무협의에서 가능한 성격이 아니다. 더욱이 북미간의 적대관계 해소에서 평화협정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 북미 국교정상화와의 선후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직 뿌리 깊은 불신이 남아있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안과 의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북측으로서는 남측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고, 가능하면 지렛대로 활용할 생각도 있다고 보인다.
김정일 답방 위해 서울, 제주 살폈던 북측 인사들
박인규 :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이후 7년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2차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것이 좋다고 했던 면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서울이 아니라 평양해서 하기로 했다.
김근식 : 북측이 서울답방의 약속을 안 지킨 것은 맞다. 하지만 우선 그것은 6.15공동선언의 1항부터 5항 사이에 들어간 내용이 아니라 부칙과 같은 것이었다. 또 이것은 김 전 대통령과 한 약속이지 노무현 정부와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북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에 의해 서울 답방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에서도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펼 수 있다.
서동만 : 가능하면 서울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다시 평양에서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쉬운 점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은 남측의 남남갈등과 직접 관련이 있고 여기에 김정일 위원장이 절대적인 통치자라는 북측 체제의 성격이 결합되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신변에 약간의 위해 위협이라도 생기는 것은 북쪽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동안 북측 대표단이 남쪽을 방문해서 남북관계 행사를 열 때마다 북측 대표들은 늘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했을 경우 신변보장이 가능한지 체크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남측 보수단체들의 기습시위에 정부의 경호망이 여러 차례 구멍이 뚫렸고, 북측의 항의에 정부는 할 말이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 남측이 보장을 할 수 없는 상태이며, 남측도 여러 차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어디서든 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언젠가는 풀어야 할 문제이지만, 어느 한쪽에만 책임을 물을 사안은 아니다. 남북 양 체제의 차이, 여전히 남아있는 적대관계에 원인이 있다.
정창현 : 서울 답방은 김대중 정부 시절 북측이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고려했었다. 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의 신변안보 문제 및 장소 문제를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 김용순 비서가 남측을 방문했을 때 제주도를 찾아가고, 장관급회담을 제주도에서 열었던 것도 서울 대신 제주도를 타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남측의 남남갈등이 심화되고 여러 행사들에서 있었던 시위 등의 문제를 보면서 답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남측 역시 그런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장담을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평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박인규 : 한나라당에서는 장소도 시기도 부적절하다고 했다. 2000년에는 두 달 전에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불과 20일밖에 남지 않았다. 임기말이라는 것도 역시 걸린다.
김근식 : 준비 기간이 2000년에 비하면 짧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두 달 쯤 여유를 가진다고 했을 때 그러면 10월이 된다. 그때는 임기말이 아니라 임기끝이다. 또 대선 직전의 활화산 국면이다. 그 때를 택하기에는 남이나 북이나 공히 부담스럽다.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8월 안에 해야 여러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9월에 있을 6자회담, 6자 외무장관회담의 스케줄도 고려됐을 것이다.
임기말의 합의인 만큼 뭔가 성과가 나온다면 다음 정부가 집행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임기가 얼마 안 남았으니 한반도 정세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지난 2000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 무산이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임기말이라고 해서 약속했던 방북을 하지 못했지만 그 사건이 결국 북미 간에 '잃어버린 10년'을 가져왔다.
북핵 해결을 비롯해 한반도 평화, 남북관계에서 현재의 한반도 정세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점의 정상회담은 상당한 의미가 있고, 결정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런 자리매김이 된다면 임기 말이라고 못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우려다.
정창현 : 발표가 촉박하게 된 것은 2.13합의가 예상치 못했던 BDA 문제로 지체되면서 8월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다가 급물살을 탄 측면이 있다.
시기와 임기말 논쟁을 불식시키려면 남북정상회담이 동북아 전체의 틀이 바뀌는 속에서 그 하나 축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동북아의 판세가 바뀌고 있는데 임기말이라고 해서 남북관계의 변화를 주저한다면 나중에 '도대체 그 때 노무현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논란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더라도 우리 정부로서는 해야 할 결정을 한 것이다.
서동만 : 여전히 남북관계에서 초당적 합의가 자리 잡지 못한 데 따른 국내냉전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 남북관계가 국내정치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에 시기가 언제든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한 남쪽 정치에서는 대선, 총선, 지방선거, 보궐선거 등 시기가 제각각이라 선거는 수시로 오게 되어 있고, 피해 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 집권당은 당연히 정치적 효과를 노리게 되어 있다. 초당적 협력을 얻기 위한 관행을 만들어가며 남북관계에서 여야가 신뢰를 쌓아가며 해결할 수밖에 없다. 야당에 대해서 충분한 자료 및 정보를 제공하고 이번 정상회담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성의를 다해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도 바깥에서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에서 의원외교의 일익을 담당하며 자기 역할을 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미 민화협에는 전향적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참가하고 있고 이러한 흐름을 확대시켜야 한다.
국정원의 현실적인 역할 인정해야
박인규 : 또 한 가지 논란이 되는 것이 이번 합의의 채널이 통일부가 아닌 국정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국정원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국정원이 나서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나?
서동만 : 통일부나 국정원이나 정부 기구이며 대북관계의 공식 채널이다. 통일부는 드러나 있는 공개부처이고 국정원은 물밑 업무를 담당하는 비공개 부처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냉전적 남북관계에서는 물밑의 비공개 조직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남북 화해·협력이 진전되면서 통일부의 위상과 비중이 높아져 왔고 그러한 추세에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에서 적대관계가 남아있는 한 국정원의 역할은 여전히 클 수밖에 없다. 국정원이 갖추고 있는 인적, 물적 인프라의 규모를 볼 때, 남북관계에서 국정원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북측 체제의 성격이나 대남부서와의 상호관계도 중요하다. 장관급회담이나 공개적인 남북회담, 행사는 당연히 통일부가 주도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북측의 통전부가 물밑에서 움직일 때 이에 대응할 부서는 국정원이 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간에 신뢰관계도 형성되어 있다. 신뢰구축이란 적대적 군사관계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국정원과 통일부의 관계는 경합관계도 있고 보완관계도 있다. 청와대를 포함해 외교안보체제 전반의 리더십과도 연관된다.
김근식 : 1차 때 정상회담 때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갔었다. 그런데 나중에 후유증이 상당했다. 그 때 얻은 교훈은 정상회담의 추진 과정에서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합의 과정을 보면 그런대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지난해 통과된 남북관계특별법에 따르면 특사 규정이 따로 있다. 그래서 김만복 국정원장이 그 절차에 맞게 특사 임명을 받고 갔고, 정상회담 개최 합의문을 만들어 서명까지 했다.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안보조정회의를 거치고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진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그 준비 과정에서 국정원 채널이나 인적자원이 동원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있다. 통일부는 실무적인 준비를 하는 곳이다. 2000년에도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다 하지 않았나. 북측의 경우에도 통일전선부가 우리로 치면 통일부와 국정원을 합친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문제될 것은 없다. 즉, 국정원이 접촉한 것은 '비공식 채널'이 아니라 공개되지는 않지만 '비공개 공식 채널'인 것이다.
정창현 : 그렇다. 역대 중요한 남북 합의는 사실 다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해 왔다. 그것은 무엇인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공개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실질적인 회담은 정부의 공식 기관 대 기관으로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에는 남북 모두 그럴 수밖에 없다. 북측도 통일전선부, 우리로 치자면 국정원 대북파트 역할을 하는 곳에서 합의 과정을 담당했다.
"핵은 6자회담 틀에서 논의해야"
박인규 : 이번 2차 정상회담을 놓고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회담이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하지만, 악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운데는 '대선을 위해 남측이 북측에 매달릴 것이고 결과적으로 잔뜩 퍼주고 올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처럼 극과 극의 인식이 나오는데 2박 3일 동안 남북이 과연 어떤 것을 논의하고 이룰 수 있을까?
정창현 : 경제적인 지원은 오히려 큰 이슈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 문제는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성격의 사안이 아니다. 그보다는 큰 틀의 평화체제나 정치군사문제가 논의되고 거기서 무엇인가가 합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머지는 장관급회담이나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등에서 다뤄지면 된다.
7년을 넘기면서 그 생명력이 떨어져가고 있는 6.15공동선언을 이어가는 방법을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 당국이든 민간이든 정권이 바뀌더라도 6.15선언의 생명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합의가 이뤄지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북핵 문제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6자회담 틀 내에서 이뤄지는 것인 만큼 6자회담에서 합의된 것보다 반 발 정도 앞서가기 위해 남북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일정한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여러 문제를 놓고 북측에서 남측에 논쟁은 하겠지만 대단히 편하게 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김근식 : 현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무엇인가를 더 북측에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차 정상회담 이후 남측 정부가 워낙 '당했기' 때문에 더 주고 싶어도 주기 어렵다. 오히려 최고 지도자급 회담에서 앞으로 남북관계의 일정한 방향과 분위기를 정리하고 각급 실무회담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이 논의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치군사안보 문제다. 이번 정상회담이 북핵 문제와 북미관계의 일정한 진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 위치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차 때는 그 부분이 빠져 있었다. 당시는 오히려 만남 그 자체가 의미였고 정치군사적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북관계의 한 축으로서의 정치군사 부분의 진전이 필수적이다. 북핵 문제나 북미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도 평화 문제는 다룰 수밖에 없다. 즉, 2차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아젠다는 평화다. 남북이 상호 불가침이나 무력 사용의 포기, 군사적 신뢰 구축, 긴장완화 등에 대해 일종의 선언문 형태로 합의가 이뤄지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데 있어서도 이번 정상회담의 의의는 상당할 것이다.
물론 남북관계의 동력이 소진된 상태라서 새로운 추동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아이템이 나올 수는 있다. 경협의 새로운 합의가 나오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3대 경협 중심으로 진행되는 기진맥진한 분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합의될 가능성도 있다.
서동만 : 한반도평화체제가 일정에 오른 만큼 정치군사적 문제가 핵심이 된다. 이미 북측은 남북군사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서해 해상경계선 획정 문제를 줄곧 주장해 왔다. 금강산, 개성 등 군사지역을 사실상 남북의 공동구역으로 내놓고도 이를 후퇴시키는 어떠한 위협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니 이제 남측도 상응한 조치를 취할 때가 됐다는 논리다. 다만 남측은 이 문제를 사실상 영토문제로 간주해 남북 간에 의제로 삼는데 대해 군 내부나 국민 일반에게 사전 정지작업을 하지 않았다. 일단 남북 간에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에 입각해 논의의 실마리라도 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경제협력도 평화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노무현 정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대선을 앞두고 대규모 대북지원을 수반하는 프로젝트는 실효성이 적다. 일찍이 고 정주영 회장이 거론한 바 있는 중공업 분야의 조선업 협력을 시범적으로 추진해 보자는 견해가 일부에서 조심스럽게 제안되고 있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북 모두 새롭게 거론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정상회담 합의문에서 그 의의로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강조한 만큼 통일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면 제1차 회담 당시 6.15공동선언 2항의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점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환기하는 수준에서 이를 둘러싼 오해와 혼란을 불식시키는 계기로 살려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호 체제 인정을 바탕으로 공존적, 점진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가 부가된다면 나름대로 성과가 될 수 있다.
정창현 : 북측에서 정상회담을 수용한 이유 중 하나가 정상회담에서 더 이상 비핵화나 동북아 평화 문제가 논의되지 않아도 논란이 되지 않을 상황이 됐기 때문인 측면이 있다. 비핵화는 이미 6자회담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관련 실무회담이 2차 정상회담과 비슷한 시기인 8월 말에 예정돼 있다. 따라서 비핵화나 동북아 평화에 대한 내용은 정상회담에서는 의례적이고 선언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남측에게야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지만 실질적인 논의에 들어가면 별로 논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북측은 오히려 연내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다시 표현하고 '그렇다면 남북관계는 그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북측은 앞서 언급한 4대 근본문제에 대해 두루뭉술한 수준에서라도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결국 예측을 해보자면, 6.15선언에서 합의됐던 내용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면서 평화문제가 더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1항의 '자주'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확인되고, 2항에서 언급됐던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연합제', '연방제'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고 어떻게 적절하게 풀어서 담아낼지 고민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통일의 과정 속에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어떻게 해나갈 것'이라는 수준의 내용을 넣고자 할 것이다.
3항은 인도적인 문제다. 우리가 제기하는 납북자 문제나 이산가족 상봉의 확대에 대해 북측은 '노력하겠다'는 측면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 문제가 나올 것이다. 받을 수 있느냐는 정부가 결정할 문제가 된다.
경협 문제는 일방적인 우리의 지원이 아니라 유무상통(주고받기)의 방식으로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덧붙여 우리가 평화체제를 워낙 강하게 얘기하고 있는 만큼 평화선언에 준하는 조항이 하나 정도 덧붙여질 것이다.
김근식 : 실제로 북측이 북미군사회담을 제안한 상태고, 평화체제 전환에 있어서도 북미가 해야 할 얘기가 있다. 또 6자회담 틀 안에서 4자 평화포럼이 열리면 거기서 논의해야할 얘기도 있다. 물론 남북이 평화체제로 가는 데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남북이 해야 할 일은, 앞서 말했듯이 평화협정이라는 틀 속에서 남북 정상이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남북의 적극적인 역할과 노력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게 핵심 포인트가 될 것이다.
비핵화에 대해서는 내부 여론 때문에 남측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측에서는 2005년 정동영 당시 장관을 만났을 때 그랬듯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유훈으로서의 비핵화에 대한 의지 확인, 그리고 2.13합의에 따른 연내 핵 불능화에 대한 확인 정도로 노련하게 정리를 하고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세계인들의 귀가 쏠려 있는 상황에서 육성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서동만 : 북측이 내부적으로는 선군정치와 핵무기 보유를 연결시킨 바 있고, 이 논리를 남측 통일운동에도 주장했기 때문에 핵무기 폐기 의지에는 상당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 보수세력 일각에도 북측 핵무기 용인론(무시론에 가까운)이 있고 이를 근거로 거꾸로 북미관계 개선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핵무기를 매개로 한 북미의 적대적 공존관계 지속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측 내부의 진보평화세력에게는 치명적이며, 대북 화해·협력정책의 근거를 허물 우려가 있다. 북측이 남측에게 약속하는 형식으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다시 공식 천명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남북관계 차원에서도 신뢰를 얻는 데 상당한 의미가 있다.
군비통제 논의까지는 어려울 듯
박인규 :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는 많이 나오는데, '핵심은 미국이다', '남측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는 말도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화와 관련해 남북이 구체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합의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김근식 : 평화체제 논의에서 미국은 평화협정, 유엔사, 주한미군이 걸려 있지만, 남북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주체이고,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당사자다. 그런 측면에서 남북정상회담은 군사적 신뢰구축에서 군비 축소에 이르기까지 평화체제에 관한 다양한 역할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양 정상이 만나서 역사적으로 처음 남북 정상이 전쟁반대, 불가침, 군비경쟁 지양 등을 포괄적으로 협의하면 그걸로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남북의 역할이 제고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창현 : 남쪽에서 요즘 나오고 있는 평화체제 논의는 공허하다. 남북간에 서로 상대가 있는 입장에서 북측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우리식의 평화체제 논의라고 보여진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평화선언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을 포함한 전쟁의 당사자들, 평화협정 당사자들로 거명되는 나라의 정상들이 모여서 전쟁을 종결하는 방향으로 가지만, 남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간다는 정도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을까 한다. 군비통제, 군축은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세부적인 대화에서 그 문제가 거론되긴 해도, 북측에서 그런 구체적인 논의는 유예할 가능성이 많다.
또 군비통제나 군축 같은 문제들은 실제로 남쪽이 할 준비가 안 돼있다. 예를 들어 남북이 1개 사단씩을 휴전선 부근에서 빼자고 하면, 북측은 사단에 명령만 하면 한 달 안에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어렵다. 군축이나 전방배치 부대의 후방 이동 문제에 대해 생각은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북측에서 그런 요구를 해오면 토지 수용해서 사단을 움직이는 일이 어렵다.
서동만 : 한반도 평화체제가 일정에 오른 만큼 당연히 핵심쟁점이 된다. 이는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도래함을 뜻한다. 우선 남측이 북미 간의 평화협정 논의를 어느 선에서 용인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남측의 입장은 남북평화협정을 주축으로 여기에 미국, 중국이 결합하는 2+2 구도를 주장해 왔다.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부는 남-북-미 3자구도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향후 전시작전지휘권 환수에 따라 남측이 미국에 대해 군사문제에서 어느 정도 독자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변수이다.
박인규 : 6자회담 진전 과정에서 정상회담이 가능하게 됐는데, 역으로 정상회담이 6자회담에 기여할 수 있다면 어떤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까.
김근식 : 햇볕정책이 북측의 대남 경계심을 약화시켰고, 그래서 결국 1차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그 후 한반도의 전반적인 정세변화 속에서 2000년 말 메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조명록 북한 차수의 상호 교차방문이 이뤄졌다. 그처럼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상호 연동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에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근본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을 통한 남북관계의 질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다면, 그것이 남북관계의 또 다른 질적인 도약을 가져올 것이고, 한반도에 있어 또 하나의 역동적인 정세를 주도하는 국면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당연히 6자회담이나 북미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서동만 : 6자회담도 주축은 북미관계가 된다. 다만 9.19공동성명을 이끌어낼 당시 북미관계는 악화되어 있었고 중국의 역할 이외에도 한국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6자회담 내에서 남북 역할의 비중은 그만큼 커지게 될 것이다. 북측의 핵무기 폐기와 관련해서 제네바기본합의가 효력을 잃은 만큼 북측에게 그 근거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 북측의 핵시설 불능화에 따른 에너지제공 등에서 당사국 간에 비용부담 문제가 대두될 것이고, 남측이 많은 부분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북미관계란 축 이외에 남북관계의 축이 가동되어야 한다. 제1차 북핵위기 때처럼 협상은 북미가 하고 부담은 남한이 하는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정창현 : 6자회담이 진전되는 것은 미국의 대북정책이 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6자회담 내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도 있었다.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그랬다. 그래서 남북간에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다른 4개국이 6자회담에 임하는 자세를 제고하고 보다 촉진자적인 역할을 하도록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박인규 : 주변국의 반응은 어떤가? 중국은 지지한다고 나왔고, 크리스토퍼 힐 미 차관보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같은 미국 언론들은 대선용이라거나, 얼마나 성과 있을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다소 유보적이었다.
김근식 : 제일 당혹스러울 건 일본이다. 회담을 반대할 수는 없는데 한반도 정세에서 소외되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가 있을 것이다. 미국은, 부시 대통령이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북측과 안 좋은 관계로 가고 있다면 상당히 불쾌했을 텐데, 이미 미국도 북에 대해서는 양자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가 있고, 북미관계 정상화와 종전선언도 가능하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러한 미국의 입장과 정책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간다고 하면 크게 반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박인규 : 중국은 어떤가?
정창현 : 중국도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평화 문제는 남북 당사자가 풀어야할 사항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일부 학자들이 대선문제 거론할 텐데 그건 개인적인 차원이다. 또 앞으로 중국의 대북투자, 합작투자 문제가 오히려 보다 적극화할 가능성이 열린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김근식 : 2000년에는 정상회담 합의 뒤에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큰 사건 전에 의견교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절차가 없었다. 중국은 2000년에 비해 논의의 바깥에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남북이 평화문제를 논의하는데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북미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상당한 초조함이 있다. 지난 3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뉴욕에 가서 힐 차관보와 얘기할 때,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면 북측이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부분에서, 중국도 베이징을 거치지 않고 평양이 바로 워싱턴과 연결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그렇게 보면 남북정상회담까지 해서 남북이 그런 방향으로 간다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과거에 비해 다소 약화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박인규 : 정상회담을 한 뒤 9월 APEC에 부시 대통령이 온다. 성급한 얘기지만, 남북정상회담이 잘 됐을 때 모멘텀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김근식 : 정상회담의 핵심 아젠다가 평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 논의는 북미간 비핵화 논의와 연계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구상하는 종전선언과 한국이 동의하는 종전 이후 평화협정이라는 2단계 프로세스에 가속도를 내는 데에 정상회담이 작용하는 부분이 분명 있게 될 것이다. 또 남북이 모여 실질적인 당사자들이 평화를 위해 핵심적이고 원칙적인 합의를 해내면 나중에 중국과 미국이 참여하는 평화체제 관련 협상도 가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크다.
종전선언이 가시권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종전선언은 부시 대통령이 던져둔 거고, 과연 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의구심이 지금까지 있다. 그러나 남북이 만나 평화와 평화체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확인한다면 종전선언이라는 실질적인 이벤트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남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의중을 타진할 건 분명한데, 북측도 종전선언 자체의 구상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서동만 :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어떤 나라든 원칙적으로는 지지할 것이다. 다만 남북이 근원적으로 해체하기를 바라는 한반도 냉전체제란 1차 남북정상회담 이래 남북 화해·협력은 진전되어 왔다는 점에서 북미, 북일 적대관계에 있다. 2000년 정상회담의 임팩트로 그 해 10월 북미공동코뮈니케로 북미관계 정상화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에 따른 평양선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여기에는 1차 정상회담이 전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졌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그 증거가 된다. 뿐만 아니라 DJ의 대미, 대일 외교력이나 한미, 한일의 비교적 우호적인 외교관계가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가 성과로 작용하는 것이 관건이며, 다음으로 대미, 대일 관계에서 노무현 정부의 외교력도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자동적으로 북미, 북일관계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북미관계는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이 이미 전환해 있고 진행 중인 만큼, 남북관계가 이를 더욱 추동할 여지가 크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좋은 아이디어일 수 있지만, 이를 이끌어낼 외교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의 고립상태에 있는 일본이 대북관계 개선에 나서는 데는 무언가 계기가 필요하다. 고이즈미 총리의 두 차례 방북도 효과가 떨어졌다는 점에서 2차 남북정상회담은 일본이 다시 움직이는 데 자극제가 될 것이다. 이마저도 아베 총리는 대북 강경정책을 상품으로 총리직에 오른지라 스스로의 정치적 정체성과 상반되는 대북관계 개선에 어떻게 나설지 참의원 선거 참패에 못지않은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고 보인다. 악화된 한일관계 회복을 일본이 대북관계 개선에 나설 계기로 삼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는 대일관계에서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다.
박인규 : 한때 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이 나왔다. 그게 성사될 모멘텀까지 있다고 보나.
정창현 : 4자 정상회담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은 '아 4자회담 이란 것도 될 수 있겠구나'하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래서 종전선언이란 게 머릿속에 떠돌아 다녔는데, 이제는 구체적으로 어디서 모여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나라들이 하는가에 대한 문제들이 구체화하고, 그것의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는 단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파괴력은 상당히 클 것이다.
아베냐 부시냐, 한나라당의 고민
박인규 : 남북화해가 되면 남남갈등이 생긴다. 이번에도 대선이 앞에 있어서 당장 한나라당 주자들이 반대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응을 어떻게 보나.
서동만 : 한나라당 내 다수세력은 대북정책 전환이 대선 승리에 불가결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고, 그래서 새로운 대북정책을 내놓은 것인데, 강경 보수세력이 딴지를 걸며 주춤한 상태에 있다. 당내 경선에서는 역시 대의원이나 당원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체로 보수성향인 이들 지지를 얻기 위해서 이명박, 박근혜 후보 모두 적극적 태도 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당내 경선이 끝나 대선 후보가 확정되면 일반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전향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정책이 전환하면서 생긴 변화가 크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반대에도 한계가 있고 고민도 크다.
김근식 : 한나라당이 올 초 정상회담 논란 있을 때 우려를 표하고 반대했다가, 2.13합의가 나오고 한반도 정세가 변환되는 분위기가 있자 남북정상회담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입장을 바꿨다. 최근에는 소위 '한반도 평화비전'에서 정상회담을 찬성했다. 따라서 정상회담이 합의됐으면 한나라당은 정상회담의 필요성과 원칙을 전적으로 협력하면서, 그러나 야당 입장에서는 비핵화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합의하거나 상호주의적인 입장을 관철하라는 식으로 주문하는 형식이 돼야 한다.
대선국면에 대한 지나친 위기의식 때문에 반대만 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한나라당이 정상회담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정상회담은 정상이 그냥 하는 거다. 그 판이 벌어져서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궁극적으로 6자회담이나 북미관계에도 선순환을 가져온다면 한반도 정세가 크게 변할텐데, 그냥 두고 있다가 고립될 수 있다.
정창현 : 한나라당은 일본 아베 정권의 선택을 잘 봐야 한다. 아베 정권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을 충실히 따르다가 부시 행정부가 한순간에 바뀌어 버려서 상당히 어려운 입장이 됐다.
남남갈등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설득해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구 국제문제와 관련한 남남갈등은 북미가 화해를 하고, 당사자들이 모여서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으로 가는 속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즉, 남남갈등의 국제화를 통해서, 달리 말해, 국제문제의 합의를 통해서 해소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렇게 가고 있다.
김근식 : 남남갈등 해소는 한반도를 둘러싼 구조, 동북아 정체의 구조가 확정되는데 따라서 한 쪽으로 정리가 된다. 예컨대, 냉전시대 한반도의 구조는 대결구조였고, 북-중 대 한-미-일의 대결 구조가 겹쳐있었다. 그때 북측은 타도와 제거,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고 남남갈등도 없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개선이 오면서 동북아와 한반도 둘러싼 구조가 흐트러졌다. 그러나 포스트 냉전구조가 완전히 해소돼지 않았기 때문에 남남갈등이 남아있던 것이다. 과거의 냉전 의식과 새롭게 등장한 의식 사이에 경쟁이 있는 거다. 그 경쟁은 아무리 논쟁을 해도 풀릴 수 없다. 쉽게 말해 세상이 바뀌면, 구조가 바뀌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나 현실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 그 방향에서 이번 정상회담이 한 쪽의 흐름이 정착되는데 기여하고 그 흐름을 추동할 수 있는 국면이라고 한다면 남남갈등도 머지않아 해소될 것이다.
정창현 : 2000년 남북관계의 큰 진전을 타고 북미관계가 좋아졌다. 2002년에는 임동원 특사가 평양에 가서 남북관계가 정상화됐고, 그것이 북일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다시 미국이 제동을 걸어서 2차 북핵위기로 넘어갔고 2005년 정동영 특사가 평양에 가서 남북관계가 풀리고 9.19공동성명으로 갔다. 2000년 이후에는 이런 과정이 계속됐다. 이번에도 사실은 그 네 번째 프로세스에 들어간 것이다. 이번에는 특히 미국의 입장이 부드러워져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객관적인 조건은 좋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평화적인 분위기를 구조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다.
대통령 발언 준비 철저해야
박인규 : 끝으로 이번 회담이 잘 되고 남남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비록 20일 밖에 안 남았지만 정부에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나.
서동만 : 위에서 언급했듯이 초당적 협력을 얻기 위해 한나라당에 공을 들이면 효과가 나타날 시기가 오게 되어 있다. 한나라당이 비협조적이거나 반대를 해도 성의를 다해 설명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일반 국민들에게도 좋은 모습으로 비치고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시간이 매우 촉박해 있는 만큼 욕심을 내기보다는 핵심적 사안에 집중하여 준비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비서실장이 준비위원장이 된 것은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지만, 외교안보전문가는 아닌 만큼, 외교안보체제의 내부 리더십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임기가 몇 개월 남지 않았지만, 정상회담 이후 후속조치나 대국민관계, 대외관계 등 일은 더욱 산적하게 될 것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체제가 흐트러지면 모처럼 귀중한 성과를 내고도 정상회담 이후 수습하기 어렵게 상황이 꼬일 수가 있다.
내부에서 다양한 견해가 엇갈리거나 때로는 의견대립이 있을 때 최종적인 판단을 누가 내리는가 하는 점을 준비과정에서나 회담 현장에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역할이 지대할수록 지나친 자신감과 즉흥 발언은 금물이며, 전문적인 식견과 경험을 존중하며 토씨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철저한 사전준비 하에 회담에 임해야 한다.
김근식 : 투명성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절차를 그때그때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은 항상 뒷거래, 밀실 의혹이 있기 때문에 투명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 점에서 일단 성사과정에서는 많은 노력을 했다고 평가된다.
두 번째는 초당적 협력을 얻어내는 거다. 2000년에 정부가 한나라당에 정상회담 대표단에 같이 가자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번에도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이 특정 정치세력의 성과물이거나, 특정 정치세력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초당적으로 여야 혹은 보수진보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과 입장을 만드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 특히 야당에 공을 들여야 한다. 국회에서 정기적으로 보고한다거나 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반대하는 야당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초당적인 협력을 얻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2000년 정상회담이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호스트인 김정일 위원장의 호방함과, 초대를 받고 간 김대중 대통령의 소심함이 절묘하게 조화됐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는 김 전 대통령의 세심함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정말로 필요하다. 물론 사전 조율을 통해서 의견교환을 하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제발, 이번 회담만큼은 다른 때처럼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실수하면 돌이킬 수 있지만, 남북정상회담은 그렇지 않다. 준비된 말과, 사전에 합의된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정창현 : 의제와 관련해 얘기하자면, 남쪽에서는 평화체제, 평화선언 같은 문제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2000년에도 그랬다. 그러나 당시 사례에서 보듯 합의를 이끌어내는 북측의 방식은 대단히 노련하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먼저 던져서 양보하는 형태로 합의를 이끌어낸다. 따라서 북에서 제안할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남과 북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목록 선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또 협상은 결국 주고받는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양보하는 게 가장 논란을 적게 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안인지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김근식 : 북측이 이번 기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편입해서 정상국가로 갈 수 있게 하는 좋은,그러나 드문 기회다. 온 세계 언론이 들여다보는 상황에서 그런 걸 확신시켜 주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인민문화궁전에 가서 공연만 볼 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협동농장 같은 데를 가는 등, 장소 선택에서 김 위원장의 개혁과 변화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만드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박인규 : 국내 정치에 어떤 영향은 어떨 것 같나.
김근식 : 2000년에도 정상회담으로 여당이 재미를 못 봤다. 지금도 정상회담 했다고 해서 한나라당 지지자가 지지를 철회하고 범여권 지지도가 늘어나는 상황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상회담의 성사가 범여권에게 유리할지 모르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정상회담이 대선판도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거나, 여야간의 전이현상을 가져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국민들이 상당히 차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창현 : 범여권 결집에는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현재 대선판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프로세스가 9월에 6자 외무장관 회담이 열리고, 북미간 특사가 오가고, 10월 말이나 11월에 4자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구도가 된다면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서동만 : 동감이다. 흐트러진 여권결집에는 상당한 촉진제가 될 것이다. 분열위기에 빠졌던 DJ 정부 이래의 평화블록을 재결집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할 것이다. 다만 한반도정세 전반이 풀리고 있고 국민 일반에 위기의식이 거의 없어지는 상태에서 2000년 선거와 같은 효과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사회적 양극화 같은 경제적 이슈가 지배적인 선거국면을 정상회담만 가지고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1차 정상회담 당시 붐을 일으켰던 남북특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깨닫고 있어 남북경협이 국내경제를 호전시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박인규 : 예전에는 정상회담을 하면 이익을 보는 세력과 피해를 보는 세력이 분명히 갈라졌지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말했듯 한나라당이 협조하면 성과의 50%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바쁘신데 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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