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열린우리당이 여당으로서의 책임도 내팽개치고 새로운 당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열린우리당보다는 나은 당이어야 마땅하다. 올해 대선이든 내년 총선이든 국민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최소한의 '발전성'은 갖춰야 한다.
그런데 민주, 평화, 미래, 국민통합 등 온갖 좋은 미사여구를 다 끌어다 짜 맞춘 '조각보 신당'인 미래개혁대통합민주신당의 행로는 열린우리당보다 한발 퇴보했다는 게 정확한 평가일 것 같다.
범여권 대통합, 결과는 '늙은 우리당'
열린우리당의 유일하다시피 한 덕목은 '정치개혁'이었다. 창당을 주도한 이른바 '천신정' 그룹은 민주당 분당을 불사한 결과 '구악'에 맞서는 신진 정치그룹으로서의 이미지를 따냈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탄돌이'라는 수군거림 속에서도 초선들이 각 선거구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대거 당선돼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기대를 얻었다.
이에 비해 범여권의 새 정당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대통합신당 창준위의 정치권 몫으로 할당된 창준위원장직은 대통합추진모임 정대철 대표, 통합민주당을 탈당한 정균환 전 의원, 통합민주당 김한길 공동대표가 차지했다.
뇌물 수수죄로 실형을 살았던 사람, 탄핵을 주도해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은 사람, 올 한해에만 세 번째 당적 변경을 앞둔 사람이 신당의 얼굴이다. 이러한 면면 탓에 '신당은 늙은 열린우리당이냐'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탈당파 초선의원은 "신당에 맞지 않는 올드패션 옷을 입은 격"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합이 신당의 본질이다. 범여권 대통합론을 불러일으킨 지난해 5.31 지방선거 이후 지난 1년여의 기간 동안 범여권이 한 일이란 오로지 세력 간 이해관계를 짜 맞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범여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물밑 협상을 주도한 3인방을 창준위원장으로 옹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당의 노선과 정체성에 관한 토론은 미루고 미뤄져 '대선 이후'를 보장해줄 수 없는 후보들의 정책 토론에 맡겨졌다. 범여권 용어로는 '중도진영과 개혁진영의 노선 경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당은 과연 승리한 후보의 노선을 무리 없이 따를 수 있을까?
대선까지는 그렇다 쳐도 선거가 끝난 뒤에 찾아올 어수선함이란 노 대통령 당선 이후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그 때는 집권을 했으니 그 정도였지, 만약 신당이 집권에 실패한다면 당의 존속을 장담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나?
범여권은 그동안의 표류과정에서 까맣게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범여권 통합론은 노무현 정부 내내 각종 선거에서 심판받은 대로 열린우리당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두고 손학규 전 지사나 정동영 전 의장 등 이른바 '중도' 진영은 '지나친 개혁의 추구와 행태적 과격성이 국민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반면 천정배 의원과 머지않아 출마가 예상되는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 시민사회세력은 추진력과 구체적인 정책 부족으로 개혁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신당이 출범하고 나서 보니 어느 쪽의 실패론에 근거해서도 도무지 대안이 되지 않는 기묘한 당이 나타났다. 중도 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통합과정에 추가된 시민사회세력은 기존의 열린우리당 정치인들보다 이미지로는 분명 더욱 과격한(?) 집단이다. 신당에는 또한 '행태적 과격성'의 대명사로 꼽혀온 친노 의원들도 슬금슬금 발을 들이고 있지 않은가.
신당은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까지 포함되면서 노선의 스펙트럼이 열린우리당의 그것보다 더욱 넓어졌다. 당초 열린우리당이 내세운 개혁성이 실행되지 못했던 까닭은 소위 실용파 진영이 당의 실권을 장악한 측면이 컸다. 신당 역시 개혁파는 소수다. 좌회전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줄달음쳐갈 신당의 행로는 탄생과 더불어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탓에 당장 '아프간 한인 피랍사태'로 인해 해외 파병이 문제로 떠올랐어도 신당은 이렇다 할 얘기를 못하고 있다. 한미 FTA 문제나 이랜드 파업 사태에서 드러난 비정규직 문제 등이 점화될 경우 '조각보 신당'은 어떤 입장을 내놓을 것인가? 한미 FTA 문제에 대한 미봉에서 드러냈듯이 또다시 '이건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니여' 꼴인 '같기도 정치'를 반복할 것인가?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범여권은 개혁의 활기를 잃어버렸다. 대통합이라는 이름으로 폭을 넓히려다 비만해졌다. '반(反)한나라당' 외에 뚜렷한 모토도 세우지 못한 채 산만해지기만 했다.
이런 당이 한나라당이 집권함으로써 일어날 정치퇴행을 막기 위해 재집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개혁적 유권자들에 대한 명백한 협박이다. 출생신고를 하자마자 '올드보이들의 집합소'라는 비아냥을 받는 '늙은 신당'은 과연 한나라당보다 나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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