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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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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1> 통영 동피랑 (1)

<연재를 시작하며>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백석 '통영2' 중에서)

동이 터 오자 밤새 통영을 포위하고 있던 안개 군단이 서서히 퇴각하기 시작한다. ⓒ이상희

변방의 소도시지만 통영 사람들의 통영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아름다운 항구다. 통영은 예향이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통영은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땅이기도 하다. 통영은 300여 년 간 삼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던 군사도시였다.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역사, 문화적 전통이 통영 사람들의 자부심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자부심이 표출된다.

"갯가라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춘다 안캅니까?"

아직도 통영과 충무를 별개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통영과 충무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 통영의 일부가 한때 충무였던 때가 있었다. 본래 하나였으나 1955년 통영군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은 충무시와 통영군 둘로 나뉘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충무란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시만 남았다. 통영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면적 239.17㎢, 인구 14만. 통영은 250여개(최근에는 바위섬들까지 포함해 500개라 하기도 한다)의 섬이 있는 섬나라이기도 하다.

▲ 새벽 미륵산 정상에 서면 통영 앞바다에 선경이 펼쳐진다. ⓒ이상희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통영은 미항이고 예향인 동시에 맛의 고장이다. 멋은 맛에서 왔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하다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된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통영은 풍요로운 땅이다. 그래서 통영의 음식은 각별히 맛있다.

통영의 바다는 사철 풍성하다. 서해바다는 겨울이면 텅 빈다. 대부분의 어류들이 추위를 피해 남쪽 바다로 떠나거나 동면에 들어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동해는 어종이 단순하다. 하지만 남해 바다는 겨울이야말로 제철이다. 동서남해 모든 바다의 어류들이 모여드는 까닭이다. 그 남해에서도 통영은 가장 많은 해산물들의 집산지다.


▲ 전국 멍게 생산량의 70%가 통영에서 나온다. ⓒ이상희

통영의 맛은 어느 한 지역의 맛이 아니라 삼도수군통제영의 관할이던 전라, 충청, 경상 삼도 해안지방의 맛이 어우러져 탄생된 보편적인 맛이다. 통영에서는 흔히 통영 음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맛있는 이유를 궁중 음식의 전래와 연관 시키려고 한다. 조정에서 파견된 통제영의 관리들이 궁중에서 맛본 음식의 요리법들을 통영으로 가져와서 그것이 전승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통영 음식의 맛은 그것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중앙의 고급관리들이 파견 된 곳은 통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사가 있던 도시들의 음식이 다들 통영처럼 맛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전주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은 인근에 김제만경 평야라는 큰 들녘과 풍요로운 갯벌이 있었기 때문이고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에서 가장 상업 활동이 활발했던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육로보다 수로 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 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다. 통영은 경상도라 할 수 없었다. 삼도수군 통제영의 관할이던 경상, 전라, 충청 해안 지방이 하나로 묶인 '특별자치구역'이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 문화가 발전했다.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 통영의 다찌 집은 해산물 요리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상희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에도 통영은 남해안 수산업의 중심지였다. 전라도에는 '여수 가서 돈 자랑 하지 마'란 말이 있듯이 경상도에는 '통영 가서 돈 자랑하지 마라' 속담이 있다. 보통 한 선주가 거느린 식솔이 100명이 넘을 정도로 수산업의 규모가 컸다. 수산업으로 그만큼 호황을 누렸고 물산이 풍부했다. 음식문화가 계속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있었던 것이다.

통영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통영이 맛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맛에 관한한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다. 경상도의 전주다. 여행은 추억이고 음식도 추억이다. 좋은 음식은 좋은 추억을 남기고 나쁜 음식은 나쁜 추억을 남긴다. 풍경이 좋아도 음식이 나쁘면 다시 가고 싶지 않지만 풍경이 별로여도 음식이 좋으면 자꾸 가고 싶어진다. 하물며 통영은 풍경이 좋은데다 음식까지 좋으니 이를 어찌할까!

통영 출신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소설 <토지>에서 "해류 관계인지 통영의 해산물은 천하일미를 자랑한다"고 예찬했듯이 통영의 해산물 음식은 특별하다. 이제부터 시작할 이야기들은 통영 해산물 음식의 뛰어난 맛에 대한 탐식기인 동시에 그 맛에서 시작된 통영의 멋, 통영의 문화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맛있는 통영, 멋있는 통영. 여행자라면 누구나 통영의 맛과 멋에 깊이 중독되고 말 것이다.


▲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동피랑 마을이 이제는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상희

<강제윤의 맛있는 통영>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통영 동피랑(1)

안철수 "동피랑 마을은 공동체 복원의 모범 사례"

동피랑 마을은 가파른 비탈에 들어선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 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은 다시 살아났다. 얼마 전(10월 26일) 동피랑에 안철수 대통령 후보가 다녀갔다. 경남 순방 길에 들른 통영에서 오로지 동피랑만을 방문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안 후보는 주민들과 간담회에서 동피랑을 "공동체 복원의 모범 사례"로 꼽으며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 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들에게는 앞이 아니라 옆과 뒤를 돌아보는 공동체 삶이 더 시급하다"며 "동피랑 마을가꾸기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 했다. 개발의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 했던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대선 후보들에게도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이미 동피랑은 이 나라 마을 공동체의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다.

"몬당서 채리보이 토영항 갱치가 쥑이네."
"동피랑 몰랑이 영 멋지게 되부렀다."


동피랑에 사시는 할머니 말씀이다. 몰랑은 언덕의 통영어다. 몬당이라고도 한다. 통영은 아직도 전래의 통영 말들이 많이 남아 있는 언어의 보고다. 통영에는 어떤 사람이 통영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통영을 통영이라 부르면 그는 통영 사람이 아니다. '토영'이나 '퇴영'이라 해야 진짜 통영사람이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통영 말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따신 도단 지붕위의 앵구"다. 통영은 말도 맛있다.

▲ 어떤 이들은 통영이 아니라 동피랑 때문에 왔다가 통영을 보고가기도 한다. ⓒ이상희

통영에도 '토영 이야 길' 이라는 걷기 길이 있다. 이야 길의 이야는 이야기의 오기가 아니다. 이야는 누나를 뜻한다. 하지만 모든 손위 누이가 이야는 아니다. 누이가 여럿일 때 가장 큰 누이는 이야라 하지 않는다. 그냥 누님이다. 바로 손위 누이처럼 가까운 누나를 이야라 한다.

통영 하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청마의 행복이란 시가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가 통영 중앙우체국 창문 앞에서 그의 연인 청운 이영도에게 썼던 편지는 편지가 아니다. '펜주'다.

동피랑 벽화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통영말과 서울말을 비교해서 써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중에 재미있는 글들 몇 개를 옮겨본다.

"새끼 오이소! 동피랑 몬당꺼저 온다꼬 욕봤지예!
짜다리 멜볼끼 엄서도 모실 댕기드끼 어정거리다 가이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제주 말만큼이나 어렵다. 이걸 서울말로 풀어보면 이렇다.

"어서 오세요. 동피랑 언덕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별 볼거리가 없어도 마실 다니듯이 천천히 둘러보세요."

"우와 몬당서 채리보이 토영항 갱치가 쥑이네."
몬당이 언덕인줄 알았으니 이건 무슨 소린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와- 언덕에서 바라보니 통영항 경치가 정말 최고네."

"이야, 내는 요새 도이 없으나이 잠바 개춤도 빵꾸가 나고, 자꾸도 고장이고 만날 천날 추리닝 추봉에 난닝구 바람으로 나 댕긴다 아이가."
이야는 누나라 했겠다.
"누나 나는 요즘 돈이 없으니 점퍼주머니도 구멍이 나고, 지퍼도 고장이고 매일 런닝 바람으로 다니는 거야."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리노이 볼게 쌔빘네."
이걸 서울말로 옮기면 "그림을 온통 벽에 그려놓으니 볼 것이 많네"가 된다. 어떤가? 통영말 재밌지 않은가.


▲동피랑은 개발이 아닌 보존으로 오래된 골목과 낡은 집들의 가치를 재발견 했다. ⓒ이상희

사투리의 전승은 우리말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일

원래 지역의 토속어들은 다들 통영말이나 제주말처럼 재미있다. 그걸 사투리라고 쓰지 못하게 하고 서울이라는 특정 지방 말을 표준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이 나라의 언어 정책이 과연 옳은 것일까. 몇 개 더 보자

"속이 재리서 문디가 될라카다가도 저게, 뻥뚫린 강구안을 채리보모 분이 써언하이 가라앉고 오곰재이 오글거리고 살아도 내구석이 좋은기라."

이건 "속이 상해서 문드러지다가도 저기 뻥 뚫린 강구안을 보면 화가 시원하게 가라앉고 그러지. 그러니까 다리를 오므릴 정도의 작은 방이라도 내가 사는 이곳이 좋은 거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무십아라! 사진기 매고 오모 다가와 넘의 집 밴소깐꺼지 디리대고 그라노? 내사마 여름내도록 할딱 벗고 살다가 요새는 사진기 무섭아 껍딱도 몬벗고, 고마 덥어 죽는 줄 알았능기라."

이건 "무서워라. 사진기 메고 오면 다예요. 왜 남의 집 화장실까지 들여다보고 그래요? 나는 여름내 옷을 벗고 살다가 사진기 무서워서 옷도 못 벗고 그냥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떤가? 밋밋한 서울 지방 말보다 훨씬 맛깔스럽지 않은가. 오래된 여러 지방 말들을 없애 버리고 언어를 단순화 시키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행위다. 지방 말들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언어를 풍요롭게 살찌우는 토대가 아닐까.

▲ 동피랑에서는 집에 앉아서도 이런 풍경이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상희

술이 없이도 취하고 매일 매일이 여행인 마을

나는 2011년 3월부터 지금까지 동피랑 마을에 머물고 있다. 벽화가 그려진 집 중의 한 곳이 내가 사는 집이다. 그렇다고 내 집은 아니다. 잠깐 빌려 사는 집이다. 통영시에서는 동피랑의 빈 집 몇 채를 고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에게 작업실로 빌려 주고 있다. 언젠가 꼭 한번쯤 통영에 살아봐야지 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꿈이 현실이 됐다. 더구나 통영 중에서도 가장 전망 좋은 동피랑 언덕에. 내가 언제든 떠나고 어디든 머물 수 있는 여행자로 살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런 행운이 주어졌겠는가. 행운이 찾아왔다한들 이렇게 불쑥 찾아와 살 수 있었겠는가.

이곳에서는 매일이 여행이고 매일 밤이 스카이라운지다. 낮이면 강구안 바다로 드나드는 배들을 보며 나도 어디론가 떠난다. 밤이면 통영의 밤바다와 야경에 흠뻑 취한다. 어찌 단 하루도 떠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찌 단 하루라도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여행을 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한다. 동피랑 마을은 그런 곳이다.

동피랑은 본래 산이었다. 48.5m의 야산에 불과하지만 동암산(東岩山)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다. 동피랑. 통영말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이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통영시 정량동과 태평동 일대의 비탈진 언덕 마을이다. 통영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중앙시장 윗마을이기도 하다. 동피랑 마을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중앙시장에서 동피랑으로 오르는 샛길도 두 군데나 있다.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길은 충무데파트 옆길과 나폴리 모텔 옆길 두 길 뿐이다. 하지만 자동차도 동피랑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한다. 동피랑 중턱에서부터는 누구든 걸어 올라야 한다. 자동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골목길이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이다. 방이 2개인 집도 많고 개중에는 하나뿐인 오두막도 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한다. 통영을 무대로 한 박경리의 소설<파시>에도 동피랑이 등장한다. 악당 서영래 밑에서 밀수 일을 하던 서울 댁의 동생 문성재가 봉화 여자 선애와 살림을 살던 집이 동피랑 언덕에 있었다.

▲ 통영 앞바다의 일몰, 저 새는 무엇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걸까. ⓒ이상희

시간 여행자의 통로 옛 골목

강구안 쪽 중앙시장에서 동피랑 오르는 길은 네 곳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에 나왔던 나폴리 모텔 옆길이 하나이고 충무데파트 옆길이 또 하나. 이 둘은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이 길은 별 재미가 없다. 진짜 동피랑 비탈길을 체험하려면 자동차는 강구안 공영주차장에 주차시켜 놓고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로 올라야한다. 강구안 쪽에서 오르는 샛길은 두개다. 하나는 중앙 활어시장 옆 길. 중앙 활어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주로 갈치, 고등어, 삼치 등의 선어만 파는 좌판이 있다. 그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몇 걸음만 가면 왼편으로 좁은 골목이 시작된다. 안정횟집, 등대횟집이 나란히 있다. 등대횟집에는 모형등대가 있으니 찾기가 어렵지 않다. 그 길을 따라서 쭉 오르면 된다. 거기서부터 벽화를 그린 집들이 등장한다.

또 한 길은 강구안쪽 건어물 골목, 이 길은 차도 다니는 길이라 제법 넓다. 건어물뿐만 아니라, 활어와 해산물을 도매로 파는 집들, 야채, 과일가게, 식당, 초장집등 다양한 점포들이 있는 상가 골목이다. 골목 입구에서 50m쯤 가면 참기름 짜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방앗간이 나온다. 수월참기름집이다. 하지만 간판이 작아 알아보기 어렵다. 그 옆은 토영수산. 토영수산과 수월참기름집 사이 샛길 계단을 오르면 동피랑에 이르게 된다. 중앙 전통 시장 간판 건너편 계단 골목이라면 좀 찾기 쉽겠다. 그 외 정량동쪽이나 태평동 쪽 골목길도 있지만 미로처럼 얽힌 골목이라 외지인들이 찾기는 어렵다. 그래도 벽화를 보고 내려갈 때는 조금 찾기 쉽다. 그쪽 골목을 더듬어 내려가면 시간이 멈춰진 듯 한 옛날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진짜 골목이 살아있다. 거기에는 간판도 없이 술과 담배, 과자 몇 봉지 쌓아놓고 파는 진짜 점방도 있다. 이 점방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 타임머신이 없어도 이미 시간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 강제윤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섬학교>와 <통영학교> 교장. 도서출판 호미 기획위원.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 등단. 문화일보 선정 평화인물 100인.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250여개의 섬을 걸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다. <통영학교>는 2012년 12월 22일 개교 예정이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섬을 걷다><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우수문학도서)><보길도에서 온 편지><올레 사랑을 만나다>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이상희

사진가. 향토 음식 연구가. 통영에 살면서 20여 년간 통영과 통영의 섬들을 사진으로 기록해 오고 있다. 2012년 5월 통영 거북선호텔 아트홀 개관 초대전 '별 하나 떨어져 섬이 되다'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오랫동안 통영의 섬들을 카메라에 담아온 온 이상희의 아름다운 사진들은 개발의 바람으로 원형이 사라져 가는 섬들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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