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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 동안 하마스를 키운 건 팔할이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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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해 동안 하마스를 키운 건 팔할이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로 점철된 하마스의 성장 과정

다음은 샌프란시스코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중동 전문가인 스테판 준이 미국 외교정책 비판 사이트인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에 최근 기고한 글의 주요 내용이다.

'하마스의 부상(Rise of Hamas)'이란 제목의 이 글은 지난 달 하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장악한 뒤 이스라엘로부터 고립을 당하고 있는 하마스가 어떻게 탄생했고 성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원문 바로가기)

준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소수의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의 단체였던 하마스가 지난해 총선을 통해 다수당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당초 미국과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마스가 태동하던 1980년대, 당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최대 실세였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견제하기 위해 이 이슬람단체를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하마스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평화구상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자 이들은 태도를 바꿔 하마스고립 작전으로 나선다.


이는 1979년 이슬람세력이 이란 정권을 장악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가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략하면서 미국의 중동 패권에 도전하자 후세인 축출에 나선 것과 매우 유사하다.

팔레스타인을 분열시키려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가자 장악 이후 봉쇄와 고립의 대상이 된 하마스는 과연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역사는 그런 성급한 전망을 허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하마스의 부상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장악한 가운데, 하마스 같은 급진적인 이슬람주의 조직이 어떻게 팔레스타인 정치 무대에서 그토록 중요한 세력이 됐고, 이스라엘과 미국은 어떻게 하마스의 부상을 가능케 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타와 좌파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견제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운동의 성장을 부추긴 것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은 1980년대 초 미국의 사주에 의해 하마스의 창시자들에게 넉넉한 자금을 대줬고, 하마스는 학교, 병원, 사회복지 단체, 그리고 이슬람을 지극히 보수적으로 해석해서 나온 다른 기관들을 건립하면서 점차 부상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면 이스라엘의 점령에 반대하는 좌파 민족주의 운동에 신경을 덜 쓸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스라엘 점령 당국은 PLO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언론 소유나 집회를 금지한 반면 급진적인 이슬람 단체가 집회를 하고 언론·출판물을 검열 없이 발행하는 것, 심지어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PLO의 평화적인 집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1981년 가자지구에서 PLO 계열의 병원을 공격하고 불태우는 것을 수수방관했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 하마스의 창설자인 고(故)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2004년 이스라엘 저격부대에 의해 살해됐다. ⓒ김재명

이슬람 저항운동이라는 뜻의 하마스는 1987년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에 의해 창설됐다. 야신은 그로부터 20년 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장악했을 때 감옥에서 풀려난 인물이다.

1988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에 반대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던 기독교도 평화주의자 무바라크 아와드를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했지만, 야신이 유대인을 증오하는 문학 작품을 유포시키고 군대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파괴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다니는 것은 허용하며 팔레스타인 이교도를 억압하는 데 어떤 우선순위가 있는지를 드러냈다.

미국의 정책도 다를 바 없었다. 미국은 1993년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영사관에서 하마스 지도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났지만, PLO 소속 인사들과의 만남은 금지시켰다. PLO가 1988년부터 테러리즘을 비난하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일방적으로 인정했지만, 그같은 정책은 계속됐다.

하마스의 지지도를 높인 요소들

창설 초기 하마스의 위상을 높였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이스라엘 정부가 1992년 말 4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이슬람교도를 추방했던 일이다. 추방자들의 대부분은 하마스 계열이었는데, 이스라엘의 그같은 행위는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의 그같은 조치를 비난하고 추방자들을 즉각 귀환시키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클린턴 미 행정부는 유엔의 결의안 집행을 방해하면서 이스라엘이 추방자 중 일부만 귀환토록 허락한다면 유엔의 요구는 충족된다는 부당한 주장을 했다. 그 결과 망명자들은 영웅이자 순교자가 됐고, 하마스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신뢰도는 급상승했으며, 정치적 영향력 역시 높아졌다.

그러나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오슬로협정을 맺었을 당시만 해도 팔레스타인 내 하마스의 지지율은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의 꿈이 점점 멀어져가고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식민지화 작업을 가속화해 유대인 정착민들이 대폭 늘면서 하마스에 대한 지지도는 더 올라갔다. 파타의 지도자들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세력들이 부정부패에 물들어가면서 하마스의 지도자들이 더 정직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다는 인식은 커져갔다.

(오슬로 협정에 의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과의 최종 평화협상이 무산된 이후) 2001년 초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모든 협상을 중단했고, 다음 해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기반시설의 대부분을 파괴하면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스라엘의 폐쇄와 봉쇄는 팔레스타인 경제를 피폐시켰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무력화시켜으며, 반면 하마스가 운영하는 사회복지 서비스는 팔레스타인의 보통 사람들에게 더욱 긴요한 것이 됐다.

파타가 무력 투쟁을 포기하고 미국 주도의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하기로 한 1993년의 결정이 팔레스타인의 고통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면서 하마스의 인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를 반영하며 더욱 높아갔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의회의 민주당 지도부에 의해 옹호된 이스라엘의 저격부대는 셰이크 야신을 비롯한 수많은 하마스 지도자들을 사살했지만 그들은 그로 인해 순교자가 됐으며 하마스에 대한 지지도를 더 상승시켰다.

하마스 정부의 탄생

2004년 아라파트 사망 후 부시 행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파타 지도자들은 하마스를 선거에 끌어들임으로써 하마스의 급진적인 세력들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너무나 부정적이었다. 팔레스타인 총선이 있기 한 달 전인 2005년 12월 미국 하원은 아라파트의 후계자 마무드 압바스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했다. 그 결의안에는 "이스라엘 국가의 파괴라는 하마스의 목표를 포기시키지도 않고 하마스를 총선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압바스의 의도"를 비판했다. 낸시 펠로시 현 상원의장 등 민주당 지도부도 찬성한 이 결의안에는 하마스 같은 조직들은 "이스라엘이 유대국가로 존재할 권리를 인정할 때까지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이 유대국가로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노동당이나 노동자세계당 등 미국의 정치조직이 미국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어 그같은 결의안은 모순된 것이었다.

미국 상원도 끼어들었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를 원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크리스토퍼 도드, 바락 오바마 등 73명의 상원의원은 "자체적인 무력을 가진 정당을 허용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없다"며 하마스의 총선 참여에 문제를 제기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 가자 장악 이후 총리직에서 축출된 하마스 출신 이스마일 하니야가 지난달 29일 가자지구에 있는 사원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이 역시도 모순이다. 미 상원은 그 서한을 발표하기 몇 주 전 실시된 이라크 의회 선거를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었는데, 이라크 선거에서는 자체적인 무력을 가진 정당이 선거에 참여했고 신정부를 구성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최대 우방국인 영국도 자체적인 무장조직을 가진 신페인당이 당을 만들고 총선에 참여하는 것을 수십년간 허용해 왔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총선은 파타가 참여한 채로 2006년 1월 치러졌고 국제사회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많은 정치 세력들이 경합하고, 파타의 부패와 분열에 많은 유권자가 진저리를 내는 가운데 하마스는 비록 44%의 지지를 받았지만 다수당을 차지했고 총리 임명과 신정부 구성 권한을 확고하게 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최초 헌법에 총리직을 둔다는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아라파트를 견제하고자 했던 미국의 주장에 따라 2003년 3월 총리직 신설 조항이 헌법에 포함됐다. 그 결과 압바스가 총선 후 비록 수반직을 유지하긴 했지만 하마스의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가 탄생해 압바스와 권력을 나누게 된 것은 아이러니이다.

선거로 구성된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

자유로운 선거를 주장했던 미국은 선거 직후부터 하마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 파타가 참여하는 대신 하마스의 강경파 지도자들이 배제될 수 있는 통합정부를 구성하자는 하마스의 초기 제안을 압바스가 거절한 것은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캐나다, 유럽 등 국제사회에 대해 압바스 통제하의 일부 정부 조직에만 구호품을 주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그같은 제재는 괴멸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기록적인 실업률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하마스 무장단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타의 한 관리는 "무장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월급을 받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일부 경찰들도 은밀하게 하마스 민병대 활동을 했다.

부시 행정부와 미 의회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제재를 풀기 위해 필요하다고 제시한 요구들은 하마스 정부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거나, 과거 모든 협정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요구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의해 거절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고 따라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잘못된 투표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해 내놓은 핑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내에서 자살폭탄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은 지켜지고 있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계지역에서의 충돌과 이스라엘에 대한 로켓 공격은 계속됐다. 이스라엘은 부시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민간인에 대한 공습을 계속해 수백명의 희생자를 냈다. 미 의회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자위를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옹호했다.

지난해 여름 미 하원에서는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민간인 희생자를 막으려는 이스라엘의 지속된 노력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410대 8로 통과됐다.

하마스가 소수의 급진적인 조직에서 선거를 통해 다수당을 차지하고 지금은 가자지구를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같은 환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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