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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건강악화설, 후계 문제, 그리고 핵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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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건강악화설, 후계 문제, 그리고 핵협상

한반도브리핑 <55> 북한의 후계 구도와 한반도 정세

최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악화설이 관심이다. 그러나 우리 정보 당국의 공식적인 판단은 여러 언론들의 추측성 보도와는 다르다. 공개 활동이 예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공개 활동을 30일 이상 중단한 사례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17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심장병과 당뇨 등 지병이 있고 노령화로 인한 체력 저하 가능성은 있지만,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 증세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불투명한 북한의 후계구도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상태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체제의 특성 때문이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에 권력이 집중된 수령제 국가다. 가족 사회주의적 특성이나, 지도자의 개인숭배 측면에서 쿠바의 카스트로 체제와도 다르다. 당연히 최고지도자의 변화는 지도부 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운영의 기본틀이 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최근 건강이상설이 도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7일 평안북도 룡천군 신암협동농장을 방문해 농장 관계자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더욱 중요한 것은 여전히 북한의 후계구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부상했던 과정과 비교해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정치의 결정적 변화시기였던 1967년 4기 15차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이른바 박금철 등 갑산계를 숙청할 때 이미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공식적인 후계자로 결정된 1970년대 중반 시점에서도 30대였다.

그러나 현재 3대 세습의 구체적인 징후는 불투명하다. 장자이기는 하나 여전히 북한 내에서 공식화되기 어려운 김정남은 어렸을 때부터 해외를 떠돌고 있다. 사망한 고영희의 아들들인 정철, 정운 역시 20대이며, 당내 활동이나 국정운영과정에서 주목할만한 활동이 포착되지 않고 있다. 즉 3대 세습의 기반은 아직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엘리트 중에서 후계자가 나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나 북한 정치체제의 특성상 확률이 낮다. 북한의 후계자 선정은 중국의 지도부 교체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수령의 지위에 걸맞는 권위와 권력을 승계 받을 만큼의 엘리트는 북한 정치체제의 특성상 존재하기 어렵다.

군부 중심의 집단지도체제 가능성이 현실적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그 역시 지켜봐야 할 일이다. 집단지도체제는 북한의 수령제 체제와 현실적으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다만 3대 수령에 의한 후계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군부는 가장 핵심적인 권력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방위원회의 실무 기능이 확대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의 북한 정치는 군을 앞세우는 선군정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국방위원회는 당의 제도적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북한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부상한 바 있다. 핵문제를 비롯한 대외문제나 남북관계에서의 군사적 신뢰구축 문제 등 핵심 국정현안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국방위원회의 실무기능 강화는 선군정치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동시에 북한 후계 구도 형성의 핵심기반 형성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후계문제에서 시간은 북한편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최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안은 무엇일까? 6자회담? 대미관계? 아니면 경제회복? 오히려 후계문제가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세월은 흐르고, 건강은 점차 나빠지고 있는데 후계 구도는 불투명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쿠바처럼 당대회를 개최해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했을 것이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1997년 10월 열린 5차 당대회에서 그의 동생인 라울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했다.
▲ 2001년 5월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된 김정남의 당시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북한은 1980년 6차 대회이후 27년이 지난 현재까지 7차 당대회를 개최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사회주의권이 붕괴했고, 핵문제가 부상했으며,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최악의 경제위기인 '고난의 행군'을 거쳤다. 후계구도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면 북한은 후계구도를 형성할 수 있는 시점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후계문제는 북미관계나, 남북관계 등 전통적으로 통용되던 협상에서의 '시간 문제'를 역전시키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그동안 협상과정에서 시간은 언제나 북한 편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은 4년 혹은 5년마다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북한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다음 정권과 상대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해 왔다. 당연히 시간이 제한된 상대편이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북한은 그러한 초조감을 협상에서 유리하게 활용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이제 시간은 제약 요소가 되고 있다. 점차 초조해 질 수밖에 없고 서둘러야 한다. 핵을 지렛대로 미국과 관계 개선이 이뤄져야 북한을 둘러싼 불안정한 환경이 개선될 수 있다. 체제안정은 후계구도의 필수 요소다. 다시 말해 협상이 지지부진하거나 교착의 장기화는 북한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핵실험 사례에서도 드러났듯 1990년대 초와 비교해 보았을 때, 벼랑끝 전술의 선택주기가 짧아지고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남북관계 진전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비해야

북핵 2.13합의에 따른 초기이행조치의 진전을 오랫동안 가로막았던 BDA 문제가 조만간 풀릴 모양이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BDA 문제가 풀리면, 그동안 잠시 정체되었던 한반도의 정세는 다시 활기를 띨 것이다. 쌀 지원 재개로 남북관계는 다시 진전될 수 있고, 북미관계 역시 다시 가까워 질 것이다. 영변 핵시설 폐쇄조치가 완료되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한국의 입장에서도 예측하기 어렵고 불투명한 김정일 이후 체제를 기다려서는 안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협상을 김정일 체제에서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 초기이행조치에서 불능화 단계로 넘어가는 앞으로의 2~3달은 핵협상의 패턴으로 보면 진전국면이다.

불능화 단계로 넘어가면, 고농축우라늄(HEU) 의혹이나 불능화의 방법을 둘러싸고 다시 입장차가 발생할 수 있고, 교착국면이 올 수 있다.

북한 역시 더 이상 시간의 혜택을 볼 수 없다면 보다 전향적으로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임기내에 클린턴 행정부와 비교해서 한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불능화 정도는 완료해야 더 났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부시 행정부 이후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형성된 기회를 살려야 한다.

미국도 북한도 시간의 중요성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한국에게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이제 인도적 지원을 북핵 상황에 연계하는 소극적 전략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한반도 정세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악화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북한의 불투명한 미래가 한반도 정세에 미칠 파장을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결론은 가능한 한 빨리 남북관계가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적 신뢰구축의 진전,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증대, 그리고 정치적 신뢰의 문턱을 넘어서야 북한의 불투명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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