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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예술, 그리고 이적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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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예술, 그리고 이적행위

[창비주간논평] 이시우 사건과 국가보안법

"이시우가 포르노를 촬영하여 구속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기에 나와 석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할 것입니까?" 나의 질문에 기자회견장에 나온 사람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진작가 이시우의 석방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혹시 사람들이 무늬만 진보이고 내면은 보수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창작의 자유는 성역을 가리지 않습니다. 포르노든 민통선이든 미군기지든 어떤 것이나 창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포르노를 촬영했다고 구속시키려는 마음과 민통선을 촬영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시키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창작의 자유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인 것입니다."
  
  창작의 자유는 이념을 초월한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기만 할 뿐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런 풍경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자기 세력이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에 어긋난 창작의 자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면, 그것이 무슨 진보냐고 나는 묻고 있었고 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보수주의자의 얼굴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진작부터 그것을 알았기에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다.
  
  분단체제와 냉전체제의 진영적(陣營的) 사고와 기획에만 머물러 있으면 진보는 추상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고 새로움과 구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개념으로만 존재하게 되리라는 위기를 그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우는 '평화'사진작가가 아니라 그냥 사진작가인 것이다.
  
  "살인은 불법이지만 그것을 촬영하여 뉴스위크에 실으면 퓰리처상을 받고, 섹스는 합법이지만 그것을 촬영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 어떤 게 더 유쾌한가?" "난 미국의 삼등시민이다. 나 같은 쓰레기가 보호받는다면 여러분 모두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에 포르노잡지 《허슬러》를 창간한 래리 플린트가 했던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삼등시민,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는 무엇보다도 위선을 싫어했다. 당연히 그의 시선으로 보면 《플레이보이》는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포르노 잡지에서 배우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
  
  사실 《플레이보이》는 국가주의의 허상 속에서 미국 중산층의 욕망을 위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반면에 《허슬러》는 국가주의와 투쟁하면서 미국 대중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랬기에 《플레이보이》 발행인 휴 헤프너는 법정에 서지 않았지만 래리 플린트는 법정에서 국가와 보수주의를 상대로 길고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래리 플린트만큼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여기고 있다면, 이시우가 한국의 '래리 플린트'일지라도 그의 편에 서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발언해야 한다. 이시우의 구속은 국가보안법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자유를 해친 명백한 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는 카메라 렌즈로 포착된 풍경을 '찍어서' 창작한다. '찍는 대상'은 여자와 남자의 성기 결합까지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풍경이다. 이적행위가 아닌 예술 표현이 목적이라면 군사시설도 창작의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똑같은 풍경을 찍었다고 하더라도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에 따라 세계와 사물은 언제나 다르게 규정되고 정의될 수 있다. 그리하여 똑같은 풍경을 찍어도 누구는 예술가가 되고 다른 누구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예술과 이적행위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예술가와 이적행위자가 한끗 차이인 사회
  
  분단체제의 본질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상, 국가보안법은 표현의 자유를 해치지 않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내면의 검열을 받으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분단체제를 표현하는 작품들을 예술가 스스로 외면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폄하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는 도덕교사도 철학자도 정치인도 아니다. 그들은 금기의 영역을 과감히 파괴하는 존재며 금기를 월경(越境)하는 모험가들이었다. 여기에 예술의 진정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시우도 다른 모든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는 월경의 모험가였다. 그는 강원도 고성에서 강화도까지 오직 두 발로 걸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집 《하늘에서 본 지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얀 아르뛰스-베르트랑이란 사진작가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어했다. 그의 소망은 정전협정상으로도 어렵지만 군사기밀보호법 때문에 더욱 불가능했다. 그러나 2005년 유엔사군정위 비서장 캐빈 매튼 대령은 얀을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의 기회를 주었다. 얀은 그 사진을 발표했고 아마도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똑같은 사진을 찍었는데 헬기를 타고 찍은 얀은 예술가로 대접받았고 오직 걸어다니면서 찍은 이시우는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흔들리는 이빨' 국가보안법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이고 중핵적인 가치이며 인권입니다. 그것은 마치 질그릇처럼 잘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냉전적 사고가 아닌 좀더 열린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이번 사건은 공안당국의 무리한 법해석이고 법적용이라고 여겨집니다. 더구나 이시우 피고인은 현재 긴 단식으로 건강에 무리가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수집할 수 있는 증거는 다 수집된 것으로 보이고 더이상 인멸할 증거도 없어 보입니다. 보석을 허용하셔서 정당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원순 변호사의 탄원서 중에서)
  
  이시우는 2007년 5월 28일 현재로 39일째 단식중이다. 예술가의 자존심으로 국가보안법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체제의 상징인 민통선과 비무장지대를 예술 표현의 대상으로 삼더니, 이제는 분단체제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과 외롭게 싸우고 있다. '흔들리는 이빨에 대한 공포'(이스라엘 작가 이츠하크 라오르)로 국가보안법의 마지막 생명을 붙잡고 있는 분단체제 옹호자들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평화와 예술을 지키려는 이시우에게 작가적 양심으로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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