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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혁명 3세대'는 실리를 추구할까?

한반도브리핑 <53> 당·정·군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그들

최근 북한이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총정치국 등 인민군 핵심부서의 최고위급 간부들에 대한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군부인사를 통해 북한은 2003년 개최된 제11기 최고인민회의를 전후해 시작된 내각, 당, 군의 인사를 기본적으로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시대' 제2기를 이끌어갈 주요 인사들이 확정된 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에 공식 취임한 후에도 대중단체→내각→노동당→인민군 순으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한 바 있다.
▲ 지난 5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오중흡 7연대' 칭호를 수여 받은 조선인민군 제977군부대를 시찰하는 장면 ⓒ연합뉴스

군 핵심부서 대대적 인사

최근의 군 인사 내용을 보면 김영춘 총참모장(차수, 2세대)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후임 총참모장에 김격식 대장(3세대)이 임명됐다. 인민군 총정치국의 현철해(대장, 3세대)·박재경 부총국장(대장, 3세대)이 국방위원회 상임부국장과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각각 자리를 옮긴 것이 확인됐고, 김기선 대장(3세대)·정태근 중장(3세대)이 후임으로 임명됐다.

또 인민군 총참모부 이명수 작전국장(대장, 3세대)이 국방위원회 상임부국장으로 승진하고, 후임에는 1990년대 초반 작전국장을 역임한 김명국 제108기계화군단 사령관(대장,3세대)이 재임명됐다. 425기계화군단 군단장이었던 강동윤 상장(3세대)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보다 앞서 2004년 주상성 4군단장이 인민보안상에 임명됐고, 제12군단장을 비롯해 인민군 군단장들이 40~50대로, 사단·여단장들이 30~40대로 각각 대폭 교체됐다.

이번 군 인사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현철해 대장에 이어 이명수 대장 등 전임자들이 보강되면서 국방위원회가 북한의 최고 정책결정기구로 실질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모양새를 띄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국방위원회에 전임으로 배치된 간부들이 그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각종 시찰에 동행했던 측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앞으로 국방위원회가 군 출신 인사들뿐만 아니라 노동당이나 외무성, 각종 경제기구 등에서도 인원을 충원함으로써 명실상부 북한 최고의 정책결정기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물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당적 지도를 받는 형식은 유지될 것이다.

둘째는 북한사회의 주력으로 제3세대가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 새삼 확인됐다.

군부 인사의 경우 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모호하지만 1992년 군 인사 때 대장으로 승진한 인사들까지를 2세대라고 할 수 있고, 이때 상장과 중장으로 진급한 인사를 3세대 군부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2년 인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김정일 위원장이 1991년 최고사령관에 임명된 후 최고사령관 명의로 단행한 첫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때 대장 16명, 상장 28명, 중장 96명, 소장 524명 등 총 664명의 장령(장성)급에 대한 승진인사가 이루어졌다.

이 인사 때 2세대로 분류되는 조명록, 김영춘, 전재선, 김일철 차수 등이 대장으로 승진했고, 3세대의 선두주자들인 현철해, 주상성, 김명국, 김정각, 김격식, 강동윤, 김성규(8군단장), 남상락(전 고사포사령관), 여춘석(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이 상장으로 진급했다.

이중 현철해는 1995년 3년 만에 대장으로, 1997년 2월에는 김격식, 주장성, 김성규, 박재경 등 4명이 대장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박재경은 약간 특수한 경우로 1993년 다른 장성보다 1년 늦게 상장이 됐지만 1997년 인사 때 대장으로 진급해 김정일 위원장의 신임이 각별함을 과시했다.

이들보다 약간 후배그룹이 1992년 중장 및 소장으로 승진한 후 2003년 7월 상장이 된 변인선, 김형룡, 최형관, 리태원, 심상대, 지영춘 등이다. 정태근 신임 총정치국 부총국장도 이 때 중장으로 승진했다. 이들은 현재 군단장, 군단 또는 사령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중장으로 승진한 지영춘은 이후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거쳐 2003년 상장으로 승진한 후 현재 인민보안성 정치국장으로 재직하고 있고, 1992년 중장으로 승진한 김형룡은 제815기계화군단장을 거쳐 9군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정·군 세대교체 마무리 단계

군부의 세대교체는 노동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이 3세대로 충원되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특히 내각의 경우 신임 김영일 총리를 비롯해 내각의 상·부상급 대다수가 3세대다. 다만 노동당의 경우 이광호 당 교육과학부장 등 당 부장·부부장급에는 3세대가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정치국과 비서국은 제7차 노동당대회가 아직 열리지 못한 관계로 개편되지 않은 채 2세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한 관계자는 "노동당대회가 열릴 때까지 정치국 위원, 비서국 비서 등은 특별히 교체되거나 보강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 당국도 3세대가 사회의 주력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지난해 1월 1일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등 3개 신문이 공동으로 발표한 신년사설에서 북한은 "사회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혁명의 3~4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준비시켜 일심단결의 대가 굳건히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해 3-4세대 간부들의 부상을 시사했다.

김정일 정권 초기인 1997-98년에 이뤄진 인사의 특징이 '혁명 2세대'의 전면 배치와 일부 3세대의 부상이었다면 이번 인사는 3-4세대가 북한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세대교체 바람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혁명 2세대들이 등장한 후 35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1972년 4월 22일 당시 내각 수상 겸 조선노동당 총비서였던 김일성 주석은 생존해 있는 항일빨치산 출신 노간부들과 함께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있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를 방문했다. 김 주석이 환갑을 지난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이날 방문에는 김정일 당시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비롯해 '2세대'들도 동행했다. 칠골사적지에 도착한 김 주석은 1세대들과 기념촬영을 한 후 2세대를 불러 역시 사진을 찍었다.
▲ 1972년 4월 22일 김일성 주석과 혁명 1세대들이 찍은 사진. 가운데 김일성의 왼쪽은 김일 전 부수상,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 전병호(현 노동당 비서), 김익현(현 최고사령부 검열관), 오른쪽은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 뒤쪽에 조명록 현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보인다. 북한은 지난해 만경대혁명사적관에서 이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정창현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우리가 처음으로 개척하여 40년간 해 온 혁명사업을 이어나갈 교대자들"이라며 "우리 혁명의 교대자들은 아무리 세찬 폭풍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만경대혁명학원 1기 출신의 30-40대 젊은 간부들이 바로 북한 2세대의 핵심들이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젊은 간부들이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 이후 김정일 위원장을 보좌하며 북한을 이끌어 왔다. 그동안 허담 비서, 연형묵 전 총리, 김용순 비서, 오용방 인민무력성 부상 등이 세상을 떠났고, 생존 간부도 어느 덧 70세 전후가 됐다. 이들은 북한 노동당과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의 원로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후계자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다만 3-4세대가 사회의 주력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는 마련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월 19일 <로동신문>도 정론(政論) '혁명은 대를 이어'에서 "선군혁명의 최후 승리와 강성대국 건설의 운명이 혁명의 3세, 4세 바로 우리들의 어깨 우에 지워져 있다"라고 강조했다.

북의 세대는 크게 4단계로 구분한다. △1세대는 항일빨치산 세대 △2세대는 1950-60년대 전후 복구와 천리마운동을 주도하며 성장한 세대 △3세대는 1970-80년대 김 위원장이 주도한 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통해 성장한 세대 △4세대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제2의 천리마대진군운동'을 뒷받침했던 세대다. 통상 '30년=한 세대'라는 기준으로 세대가 나눠지기보다는 '사회주의 대중운동'의 변화에 따라 나누는 것이 북한의 세대변화를 잘 반영한다.

1960년대 이후 김일성 주석 중심의 유일사상체제가 수립되면서 북한의 간부 세대교체는 일괄적으로 대체하는 급진적 방식을 추구하기보다는 앞 세대가 후계세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점진적 형태로 이뤄졌다. '노·장·청'을 배합하는 인사방식이다.

김정일 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2세대는 1세대가 해방 직후에 설립한 평양학원, 김일성종합대학, 만경대혁명학원을 통해 체계적으로 교육받았고,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에 유학 경험이 있는 세대다.

사고의 유연성·실무경험을 겸비한 젊은층 등장

그렇다면 북한 사회의 주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혁명 3-4세대'의 정치적 성향은 어떨까?

북한 3세대의 특징은 1970-80년대 경제가 비교적 좋은 상황에서 국가로부터 무상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주의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엘리트층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현재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부부장, 과장급, 각 도당위원회의 비서급, 내각의 상(장관)·국장급, 주요 공장·기업소의 지배인·부지배인, 인민군의 상장·중장급에 두루 포진해 있다.

필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만난 이들 세대는 '국가의 혜택'을 받은 만큼 충성도가 높고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체계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시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다. 또 3세대는 1980년대에 들어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개혁·개방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외국 유학경험이 2세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따라서 '주체성'과 '충성심'은 앞선 세대보다 오히려 더 강하지만 '혁명성'과 대외 접촉도, 급변하는 국제정세 흐름에 대한 이해도에서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특징은 1990년대와 최근 대학을 졸업한 4세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고난의 행군세대' 혹은 '피눈물의 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피눈물의 세대'란 한 마디로 "처절한 전쟁에 비유되는 1990년대의 혹독한 굶주림과 경제난을 이겨낸 세대"란 뜻으로 2004년 7월 5일 <로동신문>에 실린 정론 '피눈물의 맹세 영원히 잊지 말자'에서 처음 사용됐다. 그만큼 체제 고수를 위해 고생을 한 세대지만 실력을 쌓기에는 국제적·내부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다만 4세대들 중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외국어대학을 나와 과학기술과 정보화 시대에 맞는 실력과 어학 능력을 갖춘 층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정보화시대에 맞는 '실력', 실제적인 성과를 내는 '실적'과 '실리' 등 '3실주의'가 인사에 주요하게 반영되면서 '신사고'와 '실리주' 마인드를 갖춘 젊은 세대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

통일부는 "2003년 최고인민회의 제11기 제1차 회의 때 내각의 경제관리 권한을 강화하면서 실무 중심의 테크노크라트가 중용되고 있다"며 "노동당 및 내각에서 40-50대, 전문성·사고의 유연성·실무경험을 겸비한 젊은 인물들이 주요 직위에 등용되고 있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1990년대 이후 경제난을 겪으면서 북한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이념보다 돈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등 체제 이완 현상이 만연해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북한 당국도 내부적으로 3세대와 4세대들의 '혁명성'에 대해 여러 차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199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혁명 3세대, 4세대들은 시련을 겪어 보지 못했다"며 "그들에게 코카콜라를 먹일 것이 아니라 백두산 들쭉 단물을 먹여야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994년 12월에도 김 위원장은 노동당의 주요 간부와 만난 자리에서 "오늘 우리의 세대들은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다"며 "이런 우리의 새 세대에게 계급 교양을 잘하지 않으면 전(前) 세대들이 피 흘려 세운 사회주의 제도를 지켜낼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난 3세대, 4세대 중 앞으로 북한을 움직일 파워엘리트로 성장할 층에서 이념보다 돈을 앞세우는 이완 현상을 발견하기란 아직은 쉽지 않았다.

북한의 3세대, 4세대들은 2002년 7월 사회주의 경제관리개선 조치 이후 내부 사회주의 경제운영의 개선, 대외무역의 활성화 등에서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전면적인 개혁·개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다만 북한이 강조하고 있는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한반도의 긴장구조가 완화될 경우 북의 새 세대들이 과거보다 개방적 태도로 나올 '변화의 싹'은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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