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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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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태일통신 68]'흘러간 역사'? '블루 오션'!

전업 문인들 중 98%는 글을 써서 월100만 원을 벌지 못한다고 한다. 그 중 37%는 월수입 2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니, 수치만 놓고 보자면 정말 밥 빌어 죽도 쒀먹지 못할 직업군이 바로 작가인 것 같다.
  
  결혼 전, 장인께서는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곤, ' 평생 배고픈 직업이라는데…' 하셨다. 하지만 여태껏 식구들 배 곯린 적은 없으니 내가 대단한 요행수나 처세술을 부린 게 틀림없다. 내가 사는 요령은 간단했다. 애당초 글을 써서 먹고 산다, 는 생각을 버렸기에 그렇게 살 수 있었다.
  
  유신시절 계몽가 중에는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 라는 노랫말이 있는데, 글 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글 쓰자 라는 식으로 바꿔 부르며 지금껏 잘 버텨 왔던 셈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문학적 태도가 노동(자)문학의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방편인지 몰라도 장시간 취재와 글쓰기의 품이 많이 드는 소설가나 르뽀작가들에게는 적용하기 힘든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밥벌이와 글쓰기의 의지 사이에서 늘 고심이 깊다.
  
  문학하는 사람들을 지성인이라는 식으로 성격규정 하곤 한다. 지성은 앎과 행동의 일체화를 요구한다. 노동문학 한다는 것은 일하며 문학적 공동체와 사회운동에까지 참여해야 하는 1인 다역의 숙명을 안고 가는 거였다. 그 무게가 무거웠던지 남은 사람도 많지 않고 개별화되고 많던 소모임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많지 않는 노동문학 작가들이 할 만큼 역할을 하지만 집단적 힘은 미약하고 제도화되지도, 그렇다고 현장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지를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밥벌이도 안 되고, 거기다 상대적으로 단명(短命)의 숙명을 안고 있다,
  
  작가의 평균수명이 시인은 62세, 소설가가 66세로 여타 직업군 중에서 가장 짧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내상을 입고 산다는 것이리라. 솔직히 나는 대한민국 평균수명은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글을 써야 한다면, 이건 아니지 싶다. 글쓰기와 문학은 해 볼만 한 일이며 권장해야 할 일인데, 이렇게 가다가는 도시락 싸들고 만류할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글 쓰랴, 활동하랴 몸이 망가지기 십상이고 나이가 40, 50이 되면 너나없이 아프다는 얘기, 심지어 안타까운 부음을 전해받기도 하는데, 작년엔 박영근 시인이, 올해는 조영관 시인이, 김지우 소설가가… 그렇게 아프다 가셨다.
  
  나는 글쓰기든 사회운동이든 두꺼운 겉옷을 많이 벗고 가볍게 즐거이 오래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의무감 이상의 자긍심과 자애심이, 휴식과 자아충전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을 지킴으로 의지를 지키고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는 건 유물론적인 진리다. 나이가 40~50대가 되면 호르몬이 줄어들고 그것이 우울증 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의식 자체를 보수적인 경향으로 바꿔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구력의 근간은 체력이다. 몸을 챙기지 못하면서 의식의 건강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비유물론적인 것 같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빨리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있을 것 아닌가. 술 담배를 좀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종교인들의 수명이 80세로 가장 긴 것은 그들의 사고가 낙관적이고, 술을 적게 먹는다는 것, 그리고 규칙적인 활동을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장수가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만, 문학이, 글쓰기가 권장할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밥법이의 수단으로도 가능하고, 여느 사람 정도의 수명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즐거워야 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시 노동문학으로 돌아가 보자. 진정 노동문학은 이렇게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고 흘러간 역사가 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아니오, 라고 말하련다,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표현이 필요하고 예술적 감성이 존재하는 한, 노동문학의 희망찾기는 한없이 유효하다고, 이것이야말로 블루오션이라고. 사회과학 서적과 시집을 나눠 읽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꿨던 사람들, 그들에게 다시 우리들이 만든 책을 돌려주면 그들은 다시 책장을 펼치리라 믿는다. 우리들이 만든 게시판에 그들이 댓글을 달리라고 믿는다. 숨겨놓은 작품을 살며시 건네리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새로운 세대를 품어 안는 일, 지금 시작되고 있다. 그런 이들이 많아지면 문학은 밥벌이가 된다. 노동문학이 자본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람들이여. 지금보다 더 많이 책 읽어주고 글 써주는 것으로 조금씩만 도와 달라. 노동문학의 자존심을 살려주시라. 저들이 즐거운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즐거운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도록. 좀 더 나은 세계가 다가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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