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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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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의 재발견

<창비 주간논평> 한 시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문학사란 어느 면에서 대단히 임의적인 것이어서 수많은 '좋은 시인들' 혹은 '좋은 작가들'을 누락 혹은 사상(捨象)하면서 나아가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나는 그런 시인 중의 대표적인 하나가 김종삼(金宗三, 1921~84)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생전에 나온 민음사판 '오늘의 시인총서' 《북치는 소년》(1979)과 거기 붙은 "여백이 완벽보다 더 꽉 차 보이는 때가 있다"로 시작되는 황동규의 유명한 해설 <잔상(殘像)의 미학>으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문학사의 평가는 그의 시의 탁월성에 비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를 보자.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민간인> 전문

  
  시간의 힘을 이겨낸 살아 있는 시
  
  70, 80년대 들어와 수많은 '분단시'들이 탄생되었지만 나는 이만큼 의미와 행간의 긴장으로 꽉 찬 분단시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스무몇 해가 지나서도" 그 수심을 모른다고 시인은 고백했지만, 이 시는 자신의 체험을 그야말로 스무몇 해가 되도록 가슴에 간직했다가 각혈처럼 처연히 토해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용당포란 지명과 함께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의 입을 틀어막은 월남(越南) 가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체험케 해준다. 그리고 그 '수심(水深)'은 우리의 가슴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면 시간의 힘에 밀리지 않으면서 아직도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시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一0錢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一0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掌篇 2> 전문

  
  이 시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신경림의 <농무>와 비교해서 읽는다면 어떨까? 그 가락의 신명성과 작품이 뿜어내는 활력은 <농무>보다 현격히 떨어지지만 시적 조화와 균제미, 그리고 넓은 의미의 '민중성'에 있어서는 <장편 2>가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신경림의 <농무>는 시적 화자가 직접 굿판 속에 뛰어들어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서림이처럼 해해대"면서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를 비웃고 비판하는 능동성이 있다면 이 시는 모더니스트 김종삼답게 '묵언(默言)'으로써 어느 장면을 칼로 자르듯이 독자 앞에 제시하고 시인은 작품 뒤로 숨는 묘사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가 더 절실하고 살아 있는가는 그야말로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거니와, 신경림의 시가 주목과 찬탄의 대상이었던 것에 비해 이 시는 당대의 여러 정황에 의해 조금 더 소외되었다는 점만 밝히기로 하자(참고로 이 시의 발표연대는 <농무>보다 4년 늦은 1977년이다).
  
  그런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문학사란 당대의 정황과 시대적 요구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의외의 소외를 낳기 마련이다. 이는 비단 김종삼뿐만 아니라 김수영과 동시대의 박인환에게도 해당되는데, 그는 김수영의 비평에 의해 '포즈의 시인'으로 낙인 찍힌 바람에 그 소외의 정도가 김종삼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시대는 늘 변화하기 마련이고, 문학사 또한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닌 만큼 다른 것들의 수용을 통해서 자기를 변화시켜나간다.
  
  문학사의 그늘에 가려진 시세계의 재조명
  
  최근 잇달아 《김종삼전집》(나남출판 2005.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엮은이 권명옥의 해설 <적막과 환영>은 지나치게 기독교 복음주의적인 해석이 걸리지만 '순도 높은' 김종삼론이다)과 《박인환전집》(예옥 2006)이 간행되고 《박인환 깊이 읽기》(맹문재 편, 서정시학 2006)까지 나왔다. 이들의 작품이 "정말로 새로운" 것이라면 T.S. 엘리어트의 말처럼 "(문학사의) 질서는 새로운 예술작품이 그 속에 도입됨으로써 수정"(<전통과 개인의 재능>, 1917)될 것이다.
  
  1964년에 간행된 신구문화사판 《한국전후문제시집》(편집위원 백철·유치환·조지훈·이어령)에는 박인환, 고은을 비롯해서 33인의 '전후파' 시인들의 자천(自薦) 대표시들과 김춘수, 박태진, 이어령의 비평 <문제작의 주변> 그리고 수록시인들의 시작노트격인 <작가들은 말한다> 등이 실려 있는데, 이는 출간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요즘 식의 표현으로 하자면 '잘나가는 시인들'의 의욕적인 기획 앤솔로지였다.
  
  그러나 43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라졌거나 희미해진 이름들이 너무 많다. 좀 박하게 얘기하면 고은, 구상, 김수영, 김춘수, 박재삼, 이형기 정도가 '현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거나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앤솔로지에 김종삼의 작품이 실려 있다. 70년대의 젊은 비평가 염무웅에 의해 "이게 도대체 시냐?"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는 <돌각담> <원두막> 등 모더니즘 계열의 시 15편과 "어쨌든 나는 자연을 복사해버리는 낡은 사진사들의 틈바구니"에는 끼지 않겠다는 모더니스트다운 발언과 함께 당대 시단의 '소란'을 벗어나 릴케가 말한 바 있는 "언어의 도끼가 아직도 들어가보지 못한 깊은 수림(樹林) 속에서" "새로운 시의 언어"를 찾겠다는 다짐을 담은 시작노트 <의미의 백서>가 그것이다.
  
  여백의 시학으로 찾아낸 새로운 시의 언어
  
  그러나 시인의 '절정'이 있다면 이 시기의 김종삼은 아니다. 1964년 당시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그의 시는 "멀리 아물거리는 아지랑이"(<의미의 백서>)처럼 미혹스럽고 난해하기 짝이 없으며 아직은 '언어의 도끼'가 사물을 향해 제대로 먹혀들어가기 직전의 것들이다. 그가 극적으로 재발견된 것은 《북치는 소년》에 와서이며, 이는 한 눈밝은 후배시인 황동규에 의해서이다. 황동규는 예의 <잔상의 미학>을 통해 "내용 없는 아름다움"(<북치는 소년>의 첫연) 뒤에 숨은 그의 진면목인 '여백의 시학', 즉 시가 시를 말하게 하고 시인은 깊은 침묵 속에 빠질 줄 아는 한 뛰어난 미학주의 시인 김종삼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김종삼의 시에서 "제스처를 삼가는 한 예술가의 (내면적) 진실"과 대면한다. 그리하여 '민중시'가 목소리를 높여가는 당대의 시단에서 "자유연상에 의한 이미지 조합"으로 "스크린처럼 비어 있는 잔상이 비치는 부재"의 형식을 통해 자기 시를 드러내는 "가장 완전도가 높은 순수시인" 김종삼을 한국 현대시사에 재소환한다. 모든 시들이 암울한 시대의 정치적 폭발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당대의 시적 현실에서 김종삼은 기묘하게도 '절제의 시인'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아 다음과 같은 완성도가 높은 시를 생산한다. 시인은 시 뒤로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아니 천상(天上)의 음악처럼 우리 곁에 문득 휴지(休止)하면서.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墨畵> 전문

  
  하나의 마침표와 세개의 쉼표로 자신의 존재를 겨우 내비치고 있는 이 순수시인의 시는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북치는 소년>의 마지막 연)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리고 그 구조는 그의 남다른 예술적 소양과 절제로 인하여 일체의 틈입을 불허하면서 자족(自足)하고 견고하다.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사랑한 진정한 시인
  
  소주와 설렁탕과 서양고전음악 듣기를 유독 좋아했다는 이 시인의 최후는 그러나 가난하고 외로웠다. 천주교 길음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영결식에선 그 많은 문인들 중 시인 한 분과 그를 따랐던 문학청년 한 사람만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겨우 이 지상에서 드러나지 않게 살다 간 "욕심 없는" 예술가였다. 다음은 그의 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의 전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사랑할 줄 알았던 그를 기억하자. 그리고 진정한 시인의 반열에 그의 이름을 올리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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