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현대차 1박 2일 포위의 날'에 참가한 이들은 그래서 연신 비 걱정을 했다. "오늘 진짜 비 온대요?"란 질문은 누구를 만나든 쏟아졌다. 해가 지면 저녁 바람이 불고 비가 올 거란 일기예보를 믿고 싶지 않은 마음. 이는 곧 "거 절연 옷 좀 입으라 하소"란 잔소리로 이어졌다.
최 씨와 천 씨는 지상에서 사람들이 올려보내 준 절연 옷을 입지 않는다고 했다. 감전 위험이 사라진 새를 틈타 경찰과 사측 용역이 자신들을 끌어내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이는 물론 기우가 아니다. 이들이 고공 농성을 시작한 지난 17일, 사측은 용역 4명을 동원해 농성장 침탈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사측 관리자 한 명이 "최병승을 떨어뜨려 죽여라"라는 말을 했다고 현대차 지부 김대식 조합원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적어도 '1박 2일 포위의 날'이 열린 이날 밤만큼은 침탈 위험이 없었다. 최 씨와 천 씨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1000여 명이 울산 현대차 공장으로 모여들었기 때문. "오랜만에 저 두 사람 문화생활 좀 하게 합시다"란 사회자의 말과 함께 송전탑 주변은 춤과 음악으로 채워졌다.
▲ 송전탑 위에서 집회 참가자들을 반기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 천의봉 씨 ⓒ프레시안(최형락) |
박현제 지부장 구속영장 기각, "대법 판결 안 따르는 현대차에 경고 사인 준 것"
오후 4시 40분께, 박현제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지회장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집회장소로 전해졌다. 법원이 이날 있었던 영장실질심사에서 박 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지회장이 풀려났습니다"라고 소리치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앞서 지난 24일 박 지회장은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잠복 중이던 사복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 관련 기사 보기)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 후보와의 면담을 10분 남겨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비정규직 노조는 물론 정규직 노조도 이번 체포에 강하게 항의했다. 다른 곳도 아닌, 공장 안에서 노조 간부를 경찰이 체포한 것을 노조는 '도발'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이번 체포가 경찰의 자체 판단이 아닌, 사측의 독촉에 따른 일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사태는 일파만파 커졌다.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에 따르면 문용문 지부장이 울산경찰청장에게 "경찰 자체 판단이냐"고 따져 묻자, 경찰청장은 "사측이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쳐 빨리 체포해가라고 독촉했다"고 실토했다.
이에 지부 울산공장 운영위원회는 25일 저녁 긴급회의를 소집, 울산공장 주간 조 잔업 거부를 결정했다. 비정규직 3지회(울산·전주·아산)는 26일 오전부터 일일 파업을 전개했다. 이들은 "김억조 현대차 부회장이 불과 약 열흘 전 국정감사에서 이른 시일 안에 교섭을 재개해 사내하청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말이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며 "현대차는 국회마저도 조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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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지회장은 풀려나자마자 최 씨와 천 씨가 있는 송전탑 주변으로 돌아왔다. 멀찍이서 걸어오는 그를 알아본 동료는 한걸음에 달려가 박 지회장을 더럭 끌어안았다. "행님!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동료의 말에 박 지회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이번 영장기각에 대해 박 지회장은 "많은 사람이 노력해준 결과"라며 "나 때문에 마음고생 하고 힘써 준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법원 판결은 대법원의 '사내하청은 불법'이란 판결을 따르지 않고 있는 현대차를 향한 따끔한 경고"라고 풀이했다.
"사측의 3000명 신규채용 안은 '꼼수'"
대법원은 재작년 7월과 올해 2월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이며, 이에 따라 2년 이상 재직한 사람은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현대차 소유의 시설 및 부품을 사용하며, 현대차의 작업 지시서에 따라 일을 한다는 점, 또 공장 작업이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자동 흐름 방식이라는 점이 근거가 됐다.
하지만 사측은 지난 8월, 2016년까지 사내하청 노동자 3000명을 '신규'로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 현대차에는 약 8000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있다. 결국 이들 중 일부만 회사가 '감별'해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나머지는 공장 재배치를 통해 합법적인 사내하청으로 남기겠다는 계획이다. 노조는 당연히 반발했다.
더욱이 사측이 제시한 3000이란 숫자가 현대차에서 2016년까지 정년퇴직할 사람의 수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점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공분을 샀다. 노조에 따르면 현대차에서 2016년까지 정년퇴직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2845명이다. 결국, 현대차는 노사협의에 따라 당연히 신규 채용해야 할 자리에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 사내 하청을 채워 넣으려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관련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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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속 태풍' … 정규직 노조와 정치권 노력 더 뒷받침돼야
이처럼 현대차는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국회를 조롱하며 재벌은 법 위에 있다는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더더욱 정규직 노조와 정치권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다.
일단 정규직 노조는 25일 밤 잔업 거부로 한 발을 뗐다. 26일 '현대차 1박 2일 포위의 날'엔 이례적으로 문용문 정규직 노조위원장이 무대에 올라 '원하청 공동투쟁'을 주제로 연설하기도 했다. 송성훈 현대차 아산 비정규직 지회장이 이날 "오랜만에 정세가 좋다"라고 평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송전탑 위에 있는 최 씨는 금속노조의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촉구했다. 최 씨는 이날 "2012년에는 수년에 걸친 현대차 사내하청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며 "비정규직들이 물론 앞장서겠지만,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뒤따라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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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날 집회 참석자 대다수는 정치권에는 별 기대를 드러내지 않았다. 무소속 안철수, 진보정의당 심상정,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 후보가 송전탑을 방문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공언했지만, 여전히 영 믿음이 안 간다는 눈치다.
김상학 현대로템 창원 지회장은 이날 "(대선후보들은) 선거철이라 온 거다. 별 뜻있겠나"라며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재벌중심 경제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도 "대선 후보들에겐 큰 기대 없다. 그 사람들이 실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국가 위에 있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25일 울산을 방문하고도 송전탑 농성장에는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지원이 절실한데도, 이런 노동자들의 마음을 민주당이 너무 못 따라가는 상황인 것.
오 씨는 현대차 사내하청 투쟁을 두고 그래서 '찻잔 속 태풍'이라고 표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두 명이 송전탑에 올라 위태롭게 시위하고, 현대차와 경찰은 자신들만의 셈법으로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 그러나 태풍은 울산에서만 휘몰아칠 뿐, 이를 넘어 바깥으로 전파되지는 못하고 있단 얘기다.
이에 노조는 25일 각 대선 후보들에게 '현대차 불법 파견에 대한 입장 요구 공개 질의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오는 31일 후보들의 답변을 수합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내달 17일에는 다시 한 번 '1박 2일 현대차 포위의 날'을 울산 공장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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