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구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1일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아픈 말을 남겼다. "국민들과의 약속을 이유로 국회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탈당파와 잔류파를 불문하고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민생개혁세상을 열기 위해", "평화와 민주주의, 민생개혁의 정치를 살리기 위해" 등의 언사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
말은 화려하지만 도무지 피부에 와서 닿지 않는다. 이들이 내지르는 '대의명분'과 대선을 앞두고 선거용 정당을 만들기 위해 이합집산 하는 '행태'가 당최 조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오히려 최근 상황은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만 더욱 키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국민들과의 약속'이라는 말은 그저 핑계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목소리는 높고 책임지는 이는 없고
사실 우리당 의원들은 당 바깥의 어느 누구보다 당의 실패를 통렬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지만 그 실패에 대해 책임지려는 이들은 없었다. 유일하게 국회의원 배지 반납이라는 '반성의 징표'를 내놓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정덕구 전 의원 한 사람뿐이다.
그의 의원직 사퇴는 탈당파와 잔류파를 불문하고 최근 제시되고 있는 여러 가지 '신종 책임지는 방법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28일 탈당한 천정배 의원은 "민생개혁세력의 전진에 필요한 일들을 책임 있게 하는 것이 큰 정치인들의 임무"라고 에둘러 갔다. 당 중심의 '질서 있는 통합신당 추진'을 주장하는 김근태 당 의장도 "국민의 기대와 신망을 받고 있는 이들은 국민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모두 일견 일리가 있다. 그러나 설득력이 떨어지니 문제다. 이들이 향후 어떻게 실천과 행동으로 책임을 질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현재까지는 조금의 '자기희생'도 없다.
자기들끼리는 탈당을 '허허벌판에 홀로 나서는 것'이라며 일종의 모험과 희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지금의 형국은 그야말로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탈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잔류파에게서 '타이타닉을 끝까지 지킨 선장과 연주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짜 정당'에는 생명력이 없다
이런 식이라면 설사 새로운 통합신당을 만들어낸다고 한들 그 당에 생명력이 생길지 의문이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내던진 '밀알'이 없는데 새싹이 날 수 있을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만드는 새로운 당을 국민들이 과연 신뢰할까?
열린우리당의 진로 논쟁에는 상호 비방과 선거 공학만 난무할 뿐 최소한의 비장미도 감동도 없다. 이러한 '무책임'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한나라당에 대해 은연중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우월감'에 비춰 봐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왜 신당을 만들어야 하느냐', '왜 재집권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대개 "'전쟁 불사' 운운하는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라는 허무한 모범답안이 돌아올 뿐이다.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10년에 걸친 자칭 개혁세력 집권기에 낙제점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들은 '수구보수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라는 대국민 협박성 이유만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서 한나라당과의 차이를 상실한 열린우리당이 할 말도 아닌 듯싶다.
최소한의 예의를
그러다 보니 열린우리당의 붕괴가 '블랙코미디'로 치닫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 중 압권은 이것이다.
역대 대선에서의 황당한 공약들로 유명한 민주공화당의 허경영 총재는 최근 "열린우리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해 대선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의 전당대회 전날인 오는 13일 "열린우리당 당사 앞에서 지지자 50만 명과 함께 출마선언을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 허 총재의 말이 곧이곧대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자중지란이 당 바깥에선 얼마나 조롱거리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한때는 50% 넘는 지지를 받던 집권여당이 아니었던가. 우습거나 허망하지는 않게 퇴장하는 것도 최소한의 도리다.
새 당을 만든다면, 그에 앞서 지금까지의 실패를 어떤 식으로건 책임져야 이런 조롱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