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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실로 다가오는 '한반도 평화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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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실로 다가오는 '한반도 평화체제'

한반도 브리핑 <35> 초당적 협력 무엇보다 중요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꿈꾸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다만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 평화체제는 한반도의 꿈이었다. 냉전시대를 살아 오면서 그것은 너무 멀리 있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추상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제 평화체제가 현실의 영역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11월 18일 하노이에서 열렸던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 종전 선언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핵폐기를 전제로 미국이 북한에게 줄 수 있는 보상조치의 예를 든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라고 했다. 새로운 내용도 아니다.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54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제네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는 '제안공방'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1975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4자회담 개최를 제의한 이래,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1979년 7월 남북한과 미국의 3자 당국 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냉전시대 귀머거리 대화 국면에서 평화체제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혹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 1997년 9월 제네바에서 열린 4자회담 예비회담 장면. 한국과 중국, 미국 대표들이 김계관 북한 대표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능성의 영역으로 한걸음 다가선 것은 1996년 4월 클린턴 미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도 정상회담에서 4자회담을 제안하면서부터다. 1997년부터 공동설명회를 시작으로 3차례의 예비회담과 6번의 본회담을 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부터 1999년 8월까지 6번의 본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 완화를 논의하는 2개의 분과위원회 구성에 합의했으나, 실질적인 내용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앞세우면서 군사적 긴장완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현안논의를 거부했다. 북한이나 미국의 입장에서 4자회담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내용을 다루는 회담이라기보다 북미간의 대화통로로 활용되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4자회담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발언은 지속됐다. 2001년 6월 제임스 캘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동아태소위 청문회에서 "4자회담은 정전협정의 대체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협의체"라고 규정했다. 2003년 8월부터 시작된 6자회담에서도 미국은 6자회담을 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논의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5년 9.19공동성명 4항에서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협상을 가질 것"을 합의했다. 평화체제수립을 주장하는 북한의 요구를 미국이 검토 가능하다고 했고, 한국이 동의했다.

미국은 왜 평화체제 문제를 협의 가능한 안건으로 인정했을까? 4자회담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의 협력안보의 경험이 동북아에서도 시사점이 있다는 전략적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9.19공동성명의 채택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당면 문제라기보다는 '목표개념'이었다.

여전히 6자회담은 본격적인 이행합의서 논의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등을 선결조건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고비를 넘어서면 이행합의서 국면으로 넘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4자회담이 별도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1990년대 중후반 4자회담의 형식과 의제를 합의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곧바로 쟁점현안들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회담 장소는 베이징이 아니라 1990년대 4자회담 본 회담이 열렸던 제네바가 되거나, 아니면 4개국이 번갈아 개최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적된 편견 '남북 당사자주의'를 넘어서

9.19공동성명 4항의 합의사항은 과거의 논의와 어떻게 다른가?

평화체제에 대한 북측의 접근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은 여전히 평화체제를 북미간 평화공존관계의 법적·제도적 구축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주장하고 있다. 평화체제가 구축되어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2005년 7월 22일 담화를 통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게 되면 핵문제의 근원인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은 비핵화 실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9.19공동성명을 거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그것은 한국의 입장변화다. 그동안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남북한이 주체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지원·보장하는 '2+2' 방식이었다. 1990년대 4자회담을 거치면서도 남북 당사자주의는 변함없는 원칙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평화협정의 형식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실현가능성이며, 실질적인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또 있다. 북핵문제의 해결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한다는 점이다. 한반도비핵화선언이 위기에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평화체제 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9.19공동성명의 중심내용은 북한의 핵폐기에 대해 한반도 평화체제, 에너지 협력을 비롯한 경제협력, 그리고 북미·북일 관계정상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폐기를 위해서는 경제지원뿐만 아니라, 외교관계 정상화와 평화적 안보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그 동안 북한은 서면 안전보장을 비롯한 미국의 체제보장 방안들에는 구체성이 없다고 평가해 왔다. 북한은 핵무기를 적대정책에 대한 억지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억지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는 환경, 즉 평화체제의 비전을 보여주어야 핵보유의 명분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북한의 핵 폐기를 위해서 한반도 평화체제는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6자회담과 4자회담의 관계에 대해서는 선후의 문제라기보다 병행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미국만 바라보는 북한과, 여전히 양자적 접근 보다 다자적 접근틀을 중시하는 미국 사이에는 불신의 강이 있다. 미국의 중간선거 이후 부시 행정부의 북핵 해결의지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오해와 편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불신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신뢰의 다리가 필요하다. 4자회담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 한반도 평화체제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다면, 북한의 핵 폐기를 논의하는 6자회담도 그만큼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지향적 상상력 필요

그동안 평화체제 논의의 주류를 이루어 왔던 것은 협정 당사자문제였다. 이제 정부나 정치권, 지식인 사회 모두 오랫동안 유지해 온 '축적된 고정관념'인 남북 당사자주의나 '2+2'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삼성 한림대 교수가 정확하게 지적한대로 그것은 '오래된 편견'에 다름 아니다. 실현가능한 평화협정이란 이 교수의 표현처럼 "남북한 상호간의 의무와 북한의 미국에 대한 의무이행뿐 만 아니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북한에 대해 이행해야 할 의무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협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상 장면 ⓒ연합뉴스

물론 한반도 평화체제는 목표개념이면서 동시에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부시 대통령이 제기한 한국전쟁 종전 선언이 평화체제를 위한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신뢰구축 분야에서는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다. 북한이 평화체제 논의의 입구에서 주한미군의 철수 혹은 역할변화를 요구한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한미 양국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준과 비례해서 한미동맹의 성격을 평화 지향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로드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대량살상무기인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폐기에 맞추어 한반도에서 재래식 군비의 통제 방안도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정전체제를 관리하기 위한 중립국 감독위원회나 군사정전위원회의 기능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정전체제를 관리할 수 있는 '잠정적 관리체제'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국방정책의 비전도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핵폐기의 과정만큼이나 굴곡과 인내를 요구하는 멀고 먼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핵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최소한 이제는 어디로 갈 것인지는 결정해야 할 때이다.

6자회담에서나 남북관계에서 '경제력'(돈)으로 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 평화를 위한 가능성이 경제적 부담도 줄여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려되는 것은 모든 국가적 아젠다를 정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최근의 세태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비전은 어떤 정파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일관된 국가적 소망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초당적 협력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새해에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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