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증언의 힘과 예술의 힘이 만나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증언의 힘과 예술의 힘이 만나니…

[화제의 책] 다큐 만화 <노근리이야기>

1.

1950년 6월 25일 밤, 서울에 살던 정은용의 가족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에 전운을 감지한다. 이튿날, 거리는 벌써 피난민들로 가득하고 어느샌가 그들 가족도 피난민 행렬 속에서 고향인 충청남도 영동군 주곡리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고향도 곧 전란의 풍랑에 휩싸이게 되고, 고향 옆 도로로 북진하던 미군 전차와 탱크의 행렬이 거꾸로 방향을 바꾼 며칠 후, 주곡리에도 미군과 경찰로부터 소개명령을 받는다. 정은용의 가족과 고향 식구들은 마을사람들과 같이 근처 임계리 산속으로 피난을 떠난다.

전쟁 전에 경찰이었던 정은용은 가족들의 결정에 따라 홀로 다시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른다. 그 와중에 간간이 듣게 된 산속의 가족과 다른 피난민들에 대한 소식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한국을 돕기 위해 이 땅에 온 미군이 피난민들을 폭격으로 죽이고, 노근리 쌍굴로 몰아넣고 총격과 포격을 가했다니….'
▲ 충북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 ⓒ 박건웅

드디어 도착한 부산에서 아내와 해후. 그리고 아내의 입을 통해 그가 피난 내려오던 중에 노근리에서 벌어졌던 참상이 실체를 드러낸다.

'노근리 피난민 학살 사건'이란 한국전쟁 시작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까지 만 4일 간, 대한민국 충청북도 영동군 하가리와 노근리 일대에서 참전 미군에 의해 발생한 피난민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당시 미 제1기갑사단과 인근 미 제25보병사단에는,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전선을 통과하는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지금까지 AP통신 기자에게나 미 국방성 조사반에 미군이 노근리에서 미간인을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 참전 미군은 확인된 사람만 25명에 이른다. 1950년 노근리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민보>는 사망자만 약 400명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사건 발생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 정확한 피해규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실정이다.
▲ 책에 실린 노근리 사건 전체 상황도. ⓒ 박건웅

노근리 사건은 이 만화책의 원작자인 정은용의 피나는 노력과, 그 결과로 결성된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의 활동, 그리고 AP보도(2000년 퓰리처상 수상-탐사보도 부문) 등을 통해 비로소 하나하나 그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비무장 민간인 학살 사건의 가장 구체적인 사례로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아우슈비츠 유태인 학살만이 전쟁 중 학살의 유일한 예가 아니다. 20세기에 이런 사건이 무수히 반복되었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그런 일이 많았다. 현재에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에 의한 전쟁 중 민간인 학살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노근리 사건은 그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큰 의미를 갖는다.

2.

만화 <노근리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박건웅 지음, 정은용 원작, 새만화책 펴냄)은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이자 그 진상 알리기의 주역이었던 생존인물 정은용의 실화소설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6.25 전쟁의 시작과 전개, 피난, 가족의 이별과 생사의 엇갈림,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재회한 부인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아들딸의 비참한 죽음, 그리고 더불어 드러나게 되는 노근리 쌍굴다리에서의 미군 만행의 진상 등으로 전개된다. 이런 내용 전개는 원작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 박건웅 <노근리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 ⓒ 프레시안

전작 <꽃>에서도 그랬듯이 박건웅의 그림체는 선 중심의 통상적인 극화 만화체 그림이라기보다는 판화나 회화작품에 가깝다. 전작이 판화 그림체였다면 이 작품은 수묵 그림체를 주조로 하였다.

그런데 주의해 보면 그림의 스타일을 챕터의 내용에 따라 달리 배분하여 이야기의 전개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정서적 울림을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매우 돋보이는 대목이다. 수묵 드로잉의 풍부한 표정을 만화적 서사로 연결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무려 200페이지에 달하는, 쌍굴다리에서의 첫날 학살을 그린 챕터가 특히 압권이다. 터지고 비틀어지고 번지는 수묵 그림들의 분방한 필체들이 그 흐름 속에 간간히 '아무개 당시 몇 살' 식으로 표기된 피해자들의 증언과 더불어 이 사건의 충격적 진실을 담담하게, 그러나 어처구니없을 만큼 극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증언의 힘과 예술의 힘이 손을 맞잡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새삼 실감케 된다.

박건웅은 매력적이고 강력한 종합적 시각서사 형식인 만화의 진정한 미션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전작 <꽃>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다시 한 번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예술적 저력을 두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해야겠다. 하나는 창작물로서의 내공과 새로움에 관한 문제이다. 거대사를 미시사 속으로 녹여내고 그 미시사를 창작물로 주관화시켜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 최종적 성패를 가르는 것은 역시 창작물로서의 설득력과 깊이일 것이다.

박건웅이 한국전쟁과 노근리 학살사건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도전한 그 기백은 우선 그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살 만하다. 또 표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중간의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직도 작품의 많은 부분이 평면성과 상투적 표현의 틀을 못 벗어난 아쉬움이 있다. 시나리오 작업도 좀 단조롭고 평면적이다. 그림도 회화성이 높긴 하나 나이브하고 도식적인 표현으로 때우고 지나간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한국전쟁이라는 대형 서사가 한 그래픽 아티스트의 힘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것이라는 사실에 원천적으로 기인하는 문제일 것이다. 게다가 대체로 무난한 구상적 표현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더욱 단조로움과 나이브함으로 감지된다.
▲ 박건웅 씨는 한지에 붓과 연필로만 그림을 그렸다. ⓒ박건웅

예를 들어 이보다 좀 더 앞서 나온 정경아의 <위안부리포트1>에 비교할 때 이 점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둘 다 다큐멘터리 만화라 할 수 있는데, 박건웅의 작업이 대체로 원작의 스토리 구조를 그대로 따른 채 회화적, 일러스트적 어법을 다변화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정경아의 작업은 주제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재해석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구조와 만화적 그림체의 실험에 있어서 매우 독창적이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형식 장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박건웅의 작업이 보여준 긴 호흡의 구상적 서사와 서정성은 기본적으로 노근리 사건의 서술에 무난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미술평론가 성완경 인하대 교수. ⓒ 프레시안

또 한 가지는 인쇄의 질에 관한 것이다. 나는 박건웅의 작업이 출판되기 전에 복사물의 상태로 그 작업 결과물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현재 출간된 책은 전반적으로 잉크가 너무 진하고 '떡이 되어' 복사본보다도 상태가 안 좋은 것을 보고 놀랐다. 그 후, 바로 며칠 전인데, 부천 만화박물관에서 열린 <만화, 나의 언어>전에서 그 원작 그림을 직접 대면했는데, 또 한번 그 그림의 크기와 '회화적 야심'에 놀랐다.

원작 그림의 섬세한 층위가 책에서 많이 죽어 아쉬움이 크다. 만화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쇄된 책의 형식으로 존재하면서 그 독자성을 부여받는 것이라면, 이런 점에 대한 작가와 출판사 양측의 보다 깊은 이해와 주의력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문제이다. 적어도 유럽에서 번역본을 출간할 때에는 이 점에 대한 특별한 주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아쉬운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노근리이야기1>은 한국의 다큐 만화의 역사를 새롭게 쓴 중요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원작자 정은용의 생애를 건 노력과, 만화가 박건웅의 이 창작물로 노근리 학살사건의 생존자들의 진상규명 노력은 이제 또 한 단계 새로운 성취를 기록하게 되었다. / 성완경 인하대 교수, 미술평론가
박재동 화백 "끝내 울음이 올라왔다"

"처음 박건웅으로부터 책을 받았을 때 그 두터운 부피감과 그림의 이쁨으로 충분히 뻑적지근한 물건이라고 느꼈는데, 책을 펴니 역시 이제는 다듬어져 모양이 갖춰진 그림, 서정적이면서 잔잔한 연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호흡…. 역시 건웅이다. 건웅이가 큰일을 했다.

미술계의 신학철 선배가 한 '한국전쟁에 대한 글을 읽고 밤새도록 울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난 그러지를 못했는데. 그래서 그 형은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거야…. 이렇게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가고 이야기가 고개를 넘어 가니, 아, 그런 생각조차 없어져 버렸다.

단숨에 다 읽고 책을 덮으니 말조차 막혀 버렸다. 그저 먹먹할 뿐…. 그저 먹먹할 뿐. 그러다 밤이 늦어 몸을 씻으니 그제서야 뱃속에서 끄억 끄억 끄억 울음이 올라온다. 신열처럼 밤이 지나갔다. 지금도 내 마음 자락은 노근리의 들을, 기찻길을, 굴 속을 헤매고 있다."


박재동 화백은 <노근리이야기>에 대한 짤막한 평을 해달라는 요청에 "말로 하기 힘들다"며 이렇게 간단한 글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이런 후배가 있어 믿음직하고 든든하다"고 말했다.
▲ <노근리이야기> 중 피난민 행렬을 그린 한 컷. ⓒ 박건웅

작가 박건웅 "증언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둬야 한다"

<노근리이야기>가 발간된 직후인 지난달 28일 작가 박건웅 씨를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박 씨는 만나자마자 <노근리이야기>를 그리면서 느꼈던 여러 생각들을 하나하나 꺼내놨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 건 중요하다. 노근리는 미국이 전쟁에서 얼마든지 양민을 학살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었다. 지금 이라크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살상되는 것은 노근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근리이야기>는 박 씨의 첫 작품이 아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2004년 처음으로 낸 장편극화 <꽃>(전4권)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이었다. 1부의 원작자인 정은용 노근리대책위원장 등 피해자들이 노근리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미국과 싸운 과정을 담은 2부 작업이 끝나면 <돌연변이>라는 이름의 SF만화를 그릴 작정이라고 했다.

<돌연변이>도 장르는 SF지만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역사만화다. 이처럼 박 씨는 역사와 사회 문제에 천착한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만화는 오락, 유희, 즐거움을 줘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사회적·정치적 측면에서 만화의 의미를 찾는다"며 "만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고, 연상작용을 통해 늘 역사를 접하게 해주는 독특한 매체"라고 힘주어 말했다.
▲ 작업 중인 박건웅 씨. ⓒ 프레시안

제주도 4.3사건을 주제로 한 만화를 구상하던 2003년 겨울, 노근리대책위 부위원장인 정구도 씨로부터 노근리를 주제로 만화를 그려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은 박 씨는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한지에 먹물로 만화를 그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고된 것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에 지칠 때도 있었다.
▲ <노근리이야기> 작가 박건웅 씨. ⓒ 프레시안

그런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정은용 위원장 같은 '증언세대'와 대중을 지금 연결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었다. "역사는 기억과의 싸움이라는데 증언세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회과학책, 영화, 만화 할 것 없이 다양한 장르로 기억을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다.

박 씨는 사회성 짙은 만화를 그리려는 사람들을 키워주지 못하는 한국 만화계의 척박한 토양을 아쉬워했다. 만화의 독자층이 청소년 위주로 구성되어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낼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만화를 즐겨 읽는 유럽의 풍토를 얘기했다.

"이란 혁명을 그린 마르잔 사트라피의 만화 <페르세폴리스>, 유태인 학살을 다룬 아트 슈필겔만의 <쥐> 같은 명작들은 시대적인 요구와 함께 만화예술을 중시하는 유럽의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만화 세대가 성인이 되고 요구가 높아지면서 다양하고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고 확장될 수 있게 됐다"며 희망을 얘기했다.

<노근리이야기>는 머지않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출판된다. 박 씨는 전시회와 작가사인회를 위해 12월 중순 프랑스로 갈 예정이다. / 황준호 기자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