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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남갈등의 남남갈등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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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남갈등의 남남갈등을 넘어서

[논쟁] 뉴라이트와 분단체제론의 비판적 고찰

북한의 핵, 미사일, 금융제재 문제 등으로 북한문제가 국제적 쟁점이 되고 있고 국내적으로도 이들 문제와 전시작전통수권 문제 등으로 남남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고 있다. 이 같은 정세를 고려할 때 지난 9월 29일 있었던 한겨레 통일문화재단과 민화협의 "한반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토론회는 시의적절하고 의미가 컸다.

특히 '남남갈등'을 다룬 제 2부의 경우 원로학자이자 대표적인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백낙청 교수와 이인호 교수가 '진보'와 '보수'라는 다른 관점에서 무게 있는 목소리로 날카로운 분석과 지혜가 담긴 조언들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두 학자들은 남남갈등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남남갈등의 남남갈등"을 보여줬다. 이 토론회에서 필자는 토론자로 참석해 장문의 토론문을 발표하고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 뒤 백 교수가 이인호 교수, 박세일 교수 등 보수적 시각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비판하는 자신의 발표문을 수정하여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에 발표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백 교수는 발표문을 수정하면서 필자의 논평에 대한 반론을 추가했다. 이 같은 반론과 관련해 보다 심도있는 논쟁을 위해서는 지난 심포지움에 참석한 제한된 청중들에게만 발표됐던 나의 토론문도 공론화할 필요성이 있어 이를 <프레시안>에 기고의 형태로 공개한다. 이 발표문을 학술적 논문으로 발전시킨 것은 <진보평론> 2006년 겨울호에 발표될 것이다. <필자>


1. 뉴라이트 역사관의 빈곤

이인호 교수의 경우 역사학자답게 한국현대사에 대한 예리하면서도 깊은 성찰을 통해 남남갈등의 복합적 성격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또 남남갈등의 전면화된 직접적 원인을 노무현정부의 "개혁의지의 과잉과 개혁수행능력의 부족"에서 찾으면서 진보진영의 이중성과 문제점을 무섭게 지적해 주고 있다. 경청할 내용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는 이 교수의 주장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사실관계에서 너무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이 교수는 진보진영의 분단체제론이 대한민국과 그 역사를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국가", "하루 빨리 극복되어야 할 수치스러운 역사"로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분단체제론의 창시자인 백 교수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또 이 같은 진보적 시각이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유엔 감시 하에 한반도 전체에 선거가 실시되어 거족적인 자유주의 국가가 수립될 가능성이 무산된 것은 소련의 반대 때문이었으며 남한 중심으로 민족이 통일될 수 있었던 또 한 차례의 기회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현대사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다.

우선, 미군정의 여론분석이 보여주듯이 국민 다수가 사회주의체제를 선호하는 등 한반도의 당시 분위기가 혁명적 분위기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됐을 경우 과연 거족적인 자유주의국가가 세워졌을지 의심스럽다. 또 중국의 참전이 아니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는 주장은 미국이 참전 안 했으면 한반도는 통일이 됐을 것이라는 일부 극단적인 민족해방주의파(NL)론자들의 주장과 똑 닮은 통일지상주의적 주장이다. 사실 중국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할 경우 참전을 할 수 밖에 없으니 원래의 국경인 38선에서 멈추라고 수차례 미국에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감행해 석 달만에 끝날 전쟁이 3년으로 길어져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게 되자 잘못된 북진결정으로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때에, 잘못된 적과 싸우게 됐다"고 후회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미국 대학의 미국외교론 시간에 잘못된 정책결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가르치고 있다.

이 교수, 그리고 뉴라이트 세력이 이처럼 해방8년사에 대해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은 이 문제에서 밀릴 경우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백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적 정통성"과 "현재적 정당성"을, 내 용어로는 '발생학적 정통성'과 '현재적 정통성'을 혼동한 데서 생겨난 잘못된 위기의식이다.

한마디로, 해방정국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역사적 과제인 친일파 청산, 농지개혁 등을 북한이 상대적으로 잘 수행했다는 점에서, 나아가 북한의 체제가 당시 한국민 다수가 원했던 체제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물론 남한도 북한식으로 갔으면 현재의 북한처럼 비참해졌을 수 있으나 이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발생학적 정통성이 현재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진보, 아니 한 발 더 나가서 좌파(친북 주사파는 아니지만)라고 생각하지만 남한과 북한의 현재를 비교하라면 무수히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남한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또 남북한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남한에서 살겠다고 할 것이다. 이는 소위 친북적인 주사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북한은 이 교수의 주장대로 '실패한 국가'(이하 '한겨레 자료집' 63쪽)이다. 소위 자주(그것도 형해화한)라는 것 빼놓고는 자유, 평등, 자유권, 생존권, 민주주의 어느 하나에서 실패하지 않은 것이 없다. 게다가 세습까지 하니 사실상 왕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무시해 버려도 좋을 정도로 극소수의 골수 친북주사파를 제외한다면 많은 진보적 학자와 운동가들이 남한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이를 통해 남한을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이지, 북한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주목할 것은 이 교수와 냉전세력이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극소수의 친북주사파와 사고방식이 똑같다는 점이다. 전자가 해방정국에서의 북한의 상대적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해방정국에서도 남한이 더 정통성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논리적 무리를 서슴지 않고 있다면 후자는 역으로 해방정국에서 북한이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이 정통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둘 다 발생학적 정통성과 현재적 정통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충격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자신감이 없고,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것은 백 교수의 주장처럼 "도둑처럼 통일이 찾아오면" 그것은 "보수-우파 세력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현실화될 것, 구체적으로 "결국 북한식 독재가 되지 민주주의 체제가 될 수 없는 것"(63쪽)이라는 이 교수의 주장이다. 북한이 실패한 국가라는 정확한 지적을 하면서 이 교수와 많은 냉전적 보수세력이 왜 불필요하게 이 같은 우려를 갖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이와 관련, 진보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만 변화가 오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고 호들갑을 떠는 냉전적 보수세력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신뢰가 너무 약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는 백 교수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또 이들이 진보진영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지만 냉전세력이야말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과소평가하는 자학사관자들이다).

세계의, 그리고 한반도내의 힘의 역관계를 고려할 때, 이 교수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통일은 좋든 싫든, 남한중심의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1980년 소련·동구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진영과 소위 사회주의진영간의 힘의 역관계가 급변하면서 이후 한반도에서 통일은 기본적으로 진보의 담론이 아니라 보수와 자본의 담론으로 변해 버렸다. 즉 최고의 통일세력은 한총련도 범민련도 아니고 현대이고 삼성이다. 나아가 진정한 흡수통일론자는 북한을 고립시켜 붕괴시키겠다는 냉전세력이 아니라(북한이 이에 의해 이른 시간내에 붕괴한다면 그 이후 사태를 책임질 자신이 있는가?) 오히려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편 김대중과 노무현정부이다. 그리고 이 교수와 냉전세력이 진정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북한의 예상하지 않은, '때 이른'(?) 붕괴와 이에 따라 '도둑같이 찾아오는 통일'이 아닐까?

한국사 문제에 대해 지엽적이라면 지엽적이고 핵심적이라면 핵심적인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 교수와 뉴라이트의 경우 한국현대사 분석에 있어 사후적 결과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는 문제가 많다. 해방정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국 북한은 실패했고 남한은 성공했지 않느냐, 따라서 남한도 북한식으로 갔으면 지금 북한처럼 됐을 텐데 해방정국에서 그렇게 가지 않아 현재처럼 됐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식으로 현재의 성공, 실패로부터 해방정국을 거꾸로 꿰어 맞춰 해석하는 것이다. 즉 주사파들과 정반대로 현재적 정통성으로부터 발생학적 정통성을 연역해 설명하는 것인데 이 역시 주사파만큼이나 잘못이다.

다른 하나는 분단체제론을 비판하면서 "국가가 아니라 민족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개의 문제점이 있다. 우선 현대사연구는 민족적 관점의 과잉이 아니라 부족이 문제다. 이는 소위 민족을 강조하는 NL로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한(대한민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때 그 때 남북한 간의 관계 등 전반도적 시각이 필요한데 우리의 역사인식은 분리된 남한현대사, 북한현대사에 머물고 있고 이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총체적 관점(이를 분단체제론이라면 분단체제론이라고 불러도 좋다)이 아직 너무 부족하다.

다음으로 이 교수의 주장을 뒤집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시각에서 현대사를 봐야한다는 이야기인데 논점은 이해가 되지만 문제가 많다. 이는 일본의 파시즘이나 유신체제와 같은 극우적인 국가주의적 시각으로 흐를 우려가 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이 '1민족, 2국가, 2국민'이라는 점과 관련해 민족적 시각과는 별개로 대한민국이라는 실체에 기반한 (대한민국) 국민적 시각, 시민적 시각, 민중적 시각이 필요한 것이지 국가적 시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북한의 인권에 대한 진보진영의 침묵이라는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다. 경청할 필요가 있고 진보진영의 자기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얼마 전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자기반성을 한 바 있지만 이에 기초해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북한인권 이야기만 나오면 쓴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주로 북한의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세력들이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군사독재정권의 인권 침해에 대한 민주화운동과 진보진영의 비판에 대해 귀를 닫고 오히려 독재정권을 미화하기에 앞장섰던 조선일보 등 극우 냉전세력들이기 때문이다. 즉 인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들, 특히 우리 자신의 인권도 무시하던 사람들이 엉뚱하게 남(북한)의 인권을 걱정하고 나서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과거 북한을 찬양하다가 돌아선 전향한 주체사상파도 있지만 이들 역시 애당초 대학교육까지 받은 지식인들이 전근대적인 수령관에 왕정처럼 세습까지 하는 북한을 신봉했던 당사자라는 점에서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중성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단연 냉전세력이지 진보세력이 아니다. 물론 진보세력도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냉전세력의 이중성과는 다르며 나름의 논리와 고민이 있다.

서구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세우면서 왜 소련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천적 좌파 지식인이었던 사르트르가 한 대답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지침이 될 만한 답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다.

사르트르는 우리들의 실천의 원칙은 '지금, 여기(now and here)'이어야 하는바, 자신의 삶의 현장이 바로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이의 문제들을 비판하는 것이며, 소련의 비판은 자신이 아니어도 넘쳐나는데다가 자신까지 소련을 비판하는 경우 그것이 "따라서 현재의 자본주의가 그래도 나은 것"이라는 식으로 현실을 정당화하고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데 악용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를 우리 문제에 적용할 경우 우리의 삶의 현장이 바로 남한이기 때문에 진보진영은 남한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비판하는 것이고 북한 비판은 이미 넘쳐나는데다가 진보진영까지 북한을 비판할 경우 그것이 우리의 현실을 정당화하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외면하는 데 악용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 인권문제에 침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샤르트르를 넘어설 때가 됐고 북한인권에 대해 진보진영도 침묵을 깨야 하며 실제로 그 같은 노력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 손호철 서강대 교수.ⓒ프레시안

2. 분단체제론의 전진인가, 후퇴인가?

백낙청 교수는 상당히 오랫동안 '분단체제론'을 주장해 왔다. 이 이론은 개인적으로 이미 비판한 바 있듯이 지나치게 남북한 지배세력의 공생성을 강조한다는 문제점을 포함해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들간의 적대성만을 보아 온 우리들의 인식에 반하여 적대성 뒤에 내재한 상호의존성과 공생성을 부각시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 공은 부인할 수 없다. 나아가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복합국가로서의 통일한국상'이라든가, '과정으로서의 통일' 이라는 인식 등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중요한 학문적 기여이다. 그리고 백 교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백 교수가 최근 한 저서에서 비판했듯이, 개인적으로 한국사회 분석에 있어서 분단이라는 변수를 너무 등한시해 왔다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이번 글에서도 백 교수는 중도적 변혁주의를 설득력있게 주창하고 있다. 우선 역사적 정통성과 현재적 정당성을 구별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중도노선(현재적 정당성에서 역사적 정통성도 연역해 도출하려는 냉전세력과 역사적 정통성을 현재적 정당성에까지 적용하려는 소수 주사파를 비판하고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약하지만 현재적 정당성은 있다는 중도노선)을 제시하는 바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또 '선 선진화, 후 통일'도 '선 통일 후 선진화'도 아닌 '선진화와 통일의 병행'론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도 많다.

우선 한국현대사의 인식에 있어서 지나친 분단결정론 등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이주노동자, 장애인, 동성애, 양심적 병역거부 등 소위 '제3세대 인권' 내지 '포스트주의적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진 것이 "6.15시대를 맞아 분단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해서 라는 주장(52쪽)은 지나치게 분단의 결정력을 과장한, 아전인수식 설명이다. 오히려 군사독재 하에서 반독재민주화라는 너무도 엄중한 과제 때문에 억눌려 있던 포스트주의적 의제들이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터져 나왔다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사실 백 교수가 지적한 운동 중 이주노동자(2000년 들어 양적으로 성장한)와 관련된 것을 빼놓고 다른 운동들은 모두 6.15 이전인 1990년대에 대폭 성장한 운동들이다. 또 6.15의 역사적 의미는 엄청나게 큰 것이고 또 사회현상 간에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6.15 공동선언이 후퇴할 경우 "가부장주의와 군사문화, 성장지상주의의 온갖 폐해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예를 들어, 가부장주의의 원인을 분단체제에서 찾는 분단환원론적 주장에 여성운동가들이 동의할지 의문이다.

또 1) 1997년 경제위기를 분단체제의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분단 하에서도 선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해 무작정 선진화를 추구한 결과로 보는 한편, 2) 6.15선언을 "경제위기가 독재체제로의 회귀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완전투항이 아니라, 위기를 계기로 남북대결 상태에서의 선진화와 독일식 통일이라는 헛된 꿈을 청산하고 남북화해, 협력 및 점진적 통합과정에서 선진화를 행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낸 것"(50쪽)이라고 보는 것도 문제가 많다.

우선 1997년 경제위기가 김영삼정권의 무모한 선진화 전략이 기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단체제 하에서 선진화의 불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는 아니다.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분단체제의 (부분적) 와해와 관련이 많다. 즉 분단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냉전체제가 와해되면서 더 이상 한국을 봐줄 필요성이 사라지자 미국이 한국경제를 손을 본 것이다.

김대중정부와 6.15선언의 성격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위기극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필요악론을 넘어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 "현재는 식민지시대가 아니므로 외국자본은 많이 들여올수록 좋다"고 주장을 하고 IMF와 세계로부터 'IMF 우등생'이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평을 받는가 하면 외환이 모자라면 모를까 남아돌던 집권 후반부에도 기간산업인 한전을 사유화시켜 해외매각을 강행하려 했을 정도면(한전노조와 민중운동 반대로 실패했지만), 그 결과 외환위기 전 3%에 불과했던 외국인의 상장기업 소유비율이 세계최고수준인 40%로 높아졌으면,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6.15선언과 햇볕정책 역시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즉 이는 페리보고서의 신자유주의적인 흡수통일전략에 기초한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흡수통일에 반대하는 국가연합과 낮은 연방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상 내용적으로는 경제교류를 통한 중장기적인 흡수통일을 의도하고 있다. 설사 그런 의도를 의식적으로 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경제교류는 그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일부 소위 PD진영 내에서도 좌파의 경우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물론 6.15선언과 햇볕정책은 이 같은 신자유주의적 계기 이외에도 탈냉전의 긍정적 계기도 같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동시에 6.15선언에서 탈냉전의 계기만을 보는 것,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백 교수처럼 6.15선언을 반(反)신자유주의는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를 견제하며 독자적인 활동공간을 마련하는 범한반도적인 프로젝트"(54쪽)로 보는 것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또 6.15선언의 역사적 의미와 노무현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의 전향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의 최악의 사회적 양극화가 생겨난 점, 그 결과 지지기반이 돼야 할 서민들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국가보안법 폐지고 북한 퍼주기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점, 그 결과 박정희 향수와 '박근혜 불패신화' 등 새로운 파시즘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남북화해, 협력 및 점진적 통합과정에서 선진화를 행한 새로운 돌파구"라는 평가는 지나친 낙관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백 교수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위에서 비판한 6.15선언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관계 분석도 그러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제는 대부분 해체된 87년 체제(그리고 6.15시대의 2000년 체제)를 이야기하면서 1997년 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한국현대사는, 고추상성에서 보자면, 우선 '48년 체제(분단체제)'가 있다.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에 일정한 변형을 준 것이 백 교수가 이야기하는 '2000년 체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하위수준의 '사회체제'를 본다면, 단순한 극우반공체제인 '48년 체제'가 있고 그것이 1961년 박정희의 개발독재체제(61년 체제)로 바뀌었다. 이 '61년 체제'중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독재부분을 해체한 것이 '87년 체제'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쪽인 국가주도형 정치경제체제를 해체해 신자유주의로 대체한 것이 '97년 체제'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87년 체제'가 아니라 '97년 체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세계체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시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주장(7쪽)이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의 세계화전략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하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신자유주의를 견제하는 독자적인 활동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지 회의적이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에 의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지나치게 둔감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백 교수는 6.15 등 최근의 남북관계의 변화를 분단체제론을 업데이트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문제가 많다. 분단체제론의 핵심주장은 분단체제의 주모순인 분단모순이 남북한간의 모순이 아니라 남북한민중 대 분단체제(즉 분단유지를 원하는 남북한 기득권층)간의 모순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6.15 선언 등에 의해 이 같은 분단체제가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흔들리는 분단체제").

일견 맞는 주장처럼 들리지만 문제가 많은 주장이다. 남한의 경우 냉전세력이 실각하고 김대중정부 등 평화통일세력이 집권하면서 분단체제에 변화가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큰 변화가 없고 북한의 지배세력이 분단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데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힘의 관계가 더 수세에 몰리면서 더욱 현상유지를 바라게 됐다. 따라서 분단체제론의 논리를 따르면, 분단모순은 '남북한 민중과 (분단 타파를 바라는) 남한정부 대 북한 정부와 실각한 남한의 냉전세력'간의 모순으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옳은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북한 정부와 북한민중을 구별하고 후자를 위해 전자를 비판해야 한다는 뉴라이트와 북한민주화운동의 의견과 유사해진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최근 남북한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민간교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오래 전 백 교수는 분단체제론이 진전되지 않는 한계가 "분단체제 극복의 과제를 떠맡은 남북한 민중....의 공통된 실천의 장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적 제약"에 있다고 자인한 바 있는데, 최근 민간교류의 증대로 남북한 민중의 공통된 실천의 장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백 교수 자신이 6.15 공동선언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과연 백 교수가 분단모순의 한 축이라고 본 남북한 민중의 공통된 실천의 장인가 회의가 든다. 즉 북한의 경우 진정한 민간부문이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고,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 (분단유지세력인) 북한의 지배층과 (분단 타파세력인) 남한민중간의 교류인지, 아니면 남북한 민중간의 교류인지 한번 쯤 반문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백 교수도 지적한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도둑같이 찾아올 통일" 문제다. 소련·동구 몰락에 따라 소위 대사건에 의해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전통적인 혁명론이 끝나고 점진적 변화에 의해 어느 날 깨어보니 혁명이 이루어져 사회주의 사회가 돼 있다는 포스트주의적 사회주의론이 유행한 바 있다. 백 교수의 주장도 유사한 주장으로 상당부분 공감한다. 즉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이미 시작됐고 통일이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남북 민중간의 교류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북 경제교류라는 남한자본에 의한 북한의 신자유주의적 흡수통일이라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시작됐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독일식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리의 의지와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개연성은 별개의 문제다.

도둑같이 찾아올 통일도, 기능주의적 통합(integration)론에 의한 부문별의, 작은 통합들의 누적에 의해서,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 우리 통일이 됐네"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의 예기치 않게 붕괴함으로써 도둑같이 찾아올 가능성이 더 큰 게 아닌가 싶다. 즉 독일식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백 교수가 오래 전 인정한 바 있듯이("바람직하지 않지만 거의 불가피한 장래")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함으로써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일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가장 개연성이 높은, 그리고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가 아닐까?

나는 우리 사회가, 특히 진보진영이 이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백 교수의 희망과 달리 선진화와 통일의 병행이 아니라 북한 붕괴에 따라 '선통일, 후선진화'내지 '선통일, 후 중진화'(북한의 붕괴에 따라 통일을 할 경우 통일국가의 전체 경제수준이,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준이 대폭 후퇴할 수밖에 없음을 고려하면 더 현실적인 목표는 '선진화'가 아니라 '중진화'[경제발전수준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인권 등에서도 뒤떨어진 북한의 현실을 고려할 때 민주주의 등에서도 선진화가 아니라 중진화가 현실성 있는 목표가 될 것이다]가 아닐까?)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를 대비해야 한다.

3. 남남갈등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제 남남갈등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남남갈등은 1945년 이후 시작됐으며 한국현대사는 남남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증폭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뿌리 깊은 반공주의, 그리고 1980년 이후 생겨난 한국사회의 이념적 분화, 그리고 이와 결합되어 있는 지역주의 등 구조적 요인에 크게 기인한다. 그러나 김대중정부 집권 이후, 특히 2000년 남북 정상회담 후 남남갈등이 심화된 것은 여러 정세적 요인, 사건사적 요인에도 의존하고 있다.

우선 2000년 총선을 겨냥해 정상회담을 발표한 김대중정부의 정략적 추진과 업적주의, 한나라당과 냉전적 언론의 정략적인 시비, 신자유주의 정책(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북한에 퍼주냐는 비판을 야기한), 일부 운동권의 감상주의 내지 소영웅주의적 처신, 북한 지도부의 체제유지주의(서해도발 등), 부시행정부의 강경노선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했다. 또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부가 다시 승리하자 냉전적 보수세력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조직화하고 정치화한 것도 한 요인이다.

게다가 노무현정부는 불필요한 전투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냈다. 즉 별 내용도 없으면서, 아니 한미FTA 추진, 한나라당과의 연정추진 등이 보여주듯이 내용적으로는 아주 보수적이면서 형식과 스타일만 급진적인 스타일의 급진주의 때문에 남남갈등을 증폭시켰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해소하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구조적 요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노무현식의 불필요한 전투적 리더십 등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요인들을 고쳐나가는 것이다. 특히 정치권, 지식인, 언론 등의 절제와 선동적인 언행의 자제가 필요하다.

간단한 두 가지만 첨가하고자 한다. 앞에서 봤듯이(6.15선언에 반대한 좌파 등) 우리의 남남갈등은 단순히 진보 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같은 과잉단순화를 벗어나 보다 섬세하고 입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또 다른 문제는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이다. 우리 헌법은 국가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제의 핵심은 자유민주주의가 단순한 반공주의가 아니라 사상, 결사, 집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의 소위 민주화의 제 3의 물결을 총정리했고 보수적이며 세계적으로 민주화의 교과서로 사용되는 민주화연구조차도 특정한 이념이나 정당을 금지하는 체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잘해야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고 쓰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역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름 아래 자유민주주의를 압살해 온 '자유민주주의의 압살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결국 코미디로 끝나고 말았지만 2004년 정기국회에서 있었던 노무현정부의 국가보안법 폐지 노력 등에 대해 냉전세력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결사반대하고 나섰지만 국가보안법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해 온 악법이다. 따라서 이를 철폐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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