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권인숙 교수가 쓴 《대한민국은 군대다》를 읽었다.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 군사화의 양상과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인데, 몇가지 점에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바가 있었다. 우선 우리의 생활양식과 습벽 속에 깃든 군사주의가 분단체제에서 유래하는 것이기에, 권교수의 분석이 분단체제와 일상생활의 내적 연관을 밝히는 뜻깊은 저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군사주의가 남녀간의 불평등이나 가부장제 문화의 중요한 재생산고리라는 점을 떠올리자 여성학자가 이런 분석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 남성 학자들이 이런 작업을 해내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도화된 군사화가 마음의 습벽에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칠 집단이야 역시 군복무를 한 남성들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런 점보다 더 내게 생각거리를 던져준 것은 80년대 학생운동을 다룬 장이었다. 권교수는 80년대 학생운동이 보여주었던 격렬한 전투성에 대해 새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기존의 설명들은 조금씩 논리를 달리하긴 하지만 대체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학생운동의 전투성을 정당화하는 데 반해 권교수는 그런 설명들의 헛점을 짚으면서 80년대 학생운동 세대에는 누가 적인지를 지목해주면 그 적에 대항해서 공격적인 전투성을 표현할 성향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 논지를 따라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반공글짓기를 통해서 북한을 맹렬히 공격했던, 그래서 상을 타기도 했던 초등학생이 80년대 대학생활을 거치며 열성적인 운동권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린시절 받았던 교육내용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시위대 앞줄에 각목을 들고 섰을 때 그는 반공글짓기를 통해서 표현되었던 자신의 공격성, 그러니까 비록 동원되고 부양된 것이라 해도 종래 자기 안에 침전되어 성향으로 자리잡아간 공격성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가 나의 관심을 끈 이유는, 학생운동 세대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실은 그들이 타도하려는 대상이 만들어낸 문화적 패턴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단지 학생운동의 전투성에 한정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오히려 그 문제는 그 세대의 생활양식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것이며,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여러 문제들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체제의 모체는 87년 민주항쟁이고, 그런 뜻에서 우리 사회체제를 87년체제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그 체제를 수립하는 데 주도적이었던 세력은 386세대라고 불리는 학생운동 세대이다. 이 세대는 해방후 한국사회에서 대중적인 동시에 대규모의 사회운동을 실천하고 학습한 최초의 세대이며, 민주적 가치에 대한 추구와 신념이 뚜렷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 중 일부는 노무현정부 시기에 국가권력의 중심부에 도달했으며, 사회영역에서도 빠른 속도로 중심세력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의 중심세력이던 그들이 사회 중심부로 진입했지만 우리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고 앞으로도 큰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되지도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의 하나는 현재 사회의 중심부에 진입하고 있는 이 세대의 생활양식과 문화 속에 제대로 성찰되지 않았고 그래서 청산되지 못한 문화적 보수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민주화된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의 초기 사회화과정을 지배한 것은 박정희체제였으며, 그런만큼 권인숙 교수가 지적한 군사주의를 비롯한 박정희체제의 부정적 유산과 그것이 부양한 욕망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만일 그런 부정적 유산, 예컨대 가부장적 문화와 관행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그것은 자기 욕망과 마음의 습속을 깊이 성찰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수립하는 데 힘썼던 민주적 제도가 불러온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민주적 규범에 근거한 요구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불편한 것을 수용하는 태도만 해도 그 이전 세대에 비하면 꽤 진보한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런 요구와 압박이 없는 영역에서는 기존의 문화적 습속이 여과 없이 그들의 생활 속에 자리잡았다. 우리 사회 성원의 머리 한구석을 짓누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주택문제다. 그런데 모두들 어느 지역 무슨 단지 몇평형 아파트를 살지, 그것이 얼마의 재산가치를 가졌는지, 언제 은행융자를 받을지에 대해서만 고심했을 뿐, 어떤 집에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지난 십여 년간 공적 논의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들 집의 구조와 내부에 대한 문화적 표준을 정해준 것은 아파트 공급업자들이 제공한 모델하우스였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존재의 다양함을 표현할 기회를 잃었고 그럼으로 해서 그저 이웃과의 사소한 차이에 부심하고 집값 변화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정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세대가 자기 집도 못 바꾼 형국인데 당연히 이런 상황은 불만족을 낳는다. 그래서 일부는 전원주택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곧 여유층의 재테크로 변질되고 주택업자의 사업아이템이 될 뿐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제 손으로 황토집을 짓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은연중에 낭만적 아웃싸이더로 취급된다. '멋지다, 하지만 글쎄 나는 좀…' 이것이 그들에 대한 다수의 반응이다.
이런 양상에는 80년대적 투쟁이 극복하지 못한 자기 한계가 패턴처럼 어른거린다. 그때 민주화투쟁에 투신하는 것은 희생을 모델로 했다. 그래서 희생에 매혹되거나 (그것은 때로 분신을 부를 만큼 치명적이기도 했다) 아니면 희생에서 비켜선 것에 대한 회오와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이 빈번했다. 운동이 광범위했지만, 공적 대의와 사적 삶 사이의 합리적 연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준과 농도의 희생의 분포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패턴에서 독재타도 같은 강한 규범적 요청이 빠져나가면 전위와 대중의 분리가 쉽게 일어나고 사회적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쉽사리 문화적 아웃싸이더로 떨어지게 된다. 공적 대의와 사적 행복을 매개하는 집합적 생활양식이 엿보이지 않는 한, 대안의 추구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적 삶과 공적 삶을 매개하는 생활양식, 현실에 적응하는 것과 그 현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일하는 생활모델의 창출을 위한 끈기있는 노력은 태부족이다. 이에 비해 양자의 분리에 멍하니 자기를 내맡기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지만 그 둘을 매듭지어 묶는 것이 가능할 때에 비로소 아침 신문 사회면을 보며 치솟는 부동산값에 분개하고, 문화면에서 읽는 황토집이나 통나무집 짓는 이의 삶을 몽롱한 향수감정으로 소비하는 분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글러먹었다고 하면서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일이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욕하면서 조기유학 보낸 아이를 위해 송금하는 일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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