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은 지난 26일 세상을 뜬 프로레슬러 김일에 대한 애도의 물결 속에서 보낸 듯 하다. 그에 대한 기사들은 우리를 타임머신에 태워 '그 시절'로 데려다 주었다.
김일과 함께 역도산의 수제자 3인방이었다던 주걱턱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그리고 인간산맥 압둘라 부처는 언제나 장충체육관을 인산인해로 만들었다. 링 위에서 그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찢어버리던 에이껭 하루까는 우리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링아나운서가 선수 소개를 할 동안 열심히 칫솔질을 해대던 물어뜯기 반칙왕 프레디 블래시의 모습도 흑백이지만 선명하게 그려진다. 물론 장영철, 천규덕, 여건부는 우리편이자 든든한 주인공들이었다.
그런데 '박치기왕' 김일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눈물이 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웬 눈물!?'이라는 생각도 잠시, 어느덧 눈물이 준비(?)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잊을 수 없는 시절의 모습들
김일의 시대는 어른들은 '런닝구' 차림으로 동네를 활보하고, 우리는 '빤스바람'에 콧물을 휘날리며 골목을 달리던 때였다. 당시엔 상체가 더 금기시(?)되던 시절인지는 모르겠지만 빤스마저 생략한 아이들도 꽤 있었다. 눈깔사탕이 요즘 피자보다 더 귀했던 그 때, 김일은 너무 배가 고파 수돗물로 허기를 채운 우리를 웃으며 잠들게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만한 '집단적 기억'은 없을 것이다. 이마를 물어뜯겨 피범벅이 된 김일을 보며 온 국민은 분노하며 주먹을 쥔다. 그 순간 터지는 박치기. 이 때부터는 아나운서와 삼천만이 함께 하는 시간이 된다. "박치기... 박치기이~... 바악치기이이이~" 아나운서의 외침 사이사이가 우리의 함성으로 메워지는 사이 상대선수는 이미 널부러져 있고 김일은 이를 바라보며 맹수처럼 다가가 그 위를 말없이 덮친다. 깔린 선수는 맥이 다한 생선의 꼬리처럼 버둥거려 보지만 어림없다. 이젠 심판이 주도하는 온 국민의 카운트다운. "원, 투우, 쓰리이." 그리곤 화급하게 울려대던 땡땡땡, 이어지는 환호성. 김일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었다.
1929년 전라도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열여섯살부터 씨름판을 휩쓸었다. 그는 일본에서 역도산으로부터 필살기 박치기를 연마해 '일본놈'들과 '양놈'들을 메다꽂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을 연출했다. 일제 강점기에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엄복동은 자전거경주에서 일본인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며 민족의 기상을 떨쳤지만 사실 이들은 일본인을 두들겨 패가며 달렸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다.
패전 후 미군정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미국의 백인선수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는 역도산에 열광했다. 김일은 일본선수들을 때려 눕히고 머리로 받아 눕혔을 뿐 아니라 역시 미군정을 기억하는 우리 앞에서 미국선수들도 보내 버렸다. 그의 모습은 쾌감과 카타르시스의 분출구였을 뿐 아니라 암울했던 과거에 대한 자괴감과 콤플렉스를 단숨에 날려 버리는 민족적 배출구였다.
또한 그의 거대한 체구는 우리의 왜소함을 잊게 해 주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체구의 소유자였다. 180cm가 넘는 키에 120kg을 넘나드는 체중으로 외국선수를 메다 꽂고 그들을 도망 다니게 하는 모습에 우리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깃발을 치켜듦과 동시에 갖게 된 외모콤플렉스가 결국 스모선수들에 대한 동경과 경외감으로 연결됐듯 우람한 김일의 '사이즈'와 괴력은 주눅 들었던 우리의 어깨를 펴게 해주었다. '헤비급' 세계챔피언 김일은 미들급의 김기수나 밴텀급의 홍수환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는 박정희보다 유명했다. 아이들은 김일에 열광하며 친구집에 모이기만 하면 레슬링을 했다. 생일잔칫날 걸판지게 먹고 난 후 단골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바로 이불레슬링이었다. 그때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것도 예사였다. 아~ 그 시절 그 때의 행복함이란.
낭만시대의 종말
그를 60-70년대의 스타라 칭하는 이가 있는 듯 하다. 예의가 아니다. 요즘 서로 스타랍시고 나서는 바람에 스타도 그냥 스타, 일류스타, 특급스타로 분화하더니 이제는 초특급스타, 수퍼스타까지 등장했다. 이런 마당에 김일을 시중에 널려 있는 스타라 칭할 수는 없다. 영웅이라 하기에도 2% 부족하다.
그는 다르다. 그의 전성기는 실상은 한국 근대사의 암흑기였다. 한국 근대 100년사 최고의 스포츠영웅인 차범근의 전성기는 국가적 도약기로 이때는 국민들의 눈빛부터 달라졌고 신나서 일을 할 때였다. 그러나 김일의 시대는 암울하고 사방으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저 사는 게 막막했던 때였다.
40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의 몸을 보라. 요즘처럼 '몸만들기'에 나서 개인트레이너까지 고용해 돈을 처바른 '몸짱'형 몸이 아니다. 기절할 정도로 엄청난 훈련을 감내한 그의 몸은 거친 야성을 드러낸다. 도쿄 고라쿠엥 경기장에서 안토니오 이노키를 박치기로 링 밖으로 고꾸라뜨리고는 링 위를 홀로 어슬렁거리며 포효하는 모습은 야수의 모습이다. 어느 언론의 표현대로 그는 '왕'이고 '전설'이다.
이러한 김일의 전설은 남을 테지만 그의 사망은 우리의 애환이 담긴 낭만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듯하다. 16세에 결혼한 농사꾼이 일본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는, 그리고 여수항의 선원들이 역도산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귀띔에 귀신에 홀린 듯 일본행 밀항선에 오른 사연은 사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게다가 그때가 1956년이니까 그의 나이 스물여덟.
누구나 아픈 마음과 저린 가슴을 안고 다니던 시절, 많은 이들은 성공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미 오래 전에 끌려 온 조선인들과 함께 이들은 서러움으로 끼니를 때우며 출세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과 유럽의 아프리카계 이주민 같은 소수집단이 겪듯 일본의 한인들에게도 출세의 길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나마 가능했던 것이 바로 연예인, 운동선수, 야쿠자의 길. 남의 땅에서는 결국 광대나 검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불법체류자로 잡혀 옥살이를 하던 중 수차례 역도산에게 구원의 편지를 보냈다. 주소를 몰라 그냥 東京 力道山(동경 역도산)이라 썼다 한다. 결국 역도산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역도산 체육관에 입문한다. 그러나 역도산은 김일을 보디가드로 쓰면서도 가장 많이 때렸을 만큼 김일에게 가혹했다.
함경도 출신이었던 역도산은 남보다 앞서려면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며 김일에게 평양박치기를 수련할 것을 명한다. 그러고는 단련을 이유로 재떨이와 골프채로 이마를 때려 기절시킬 만큼 가혹하게 훈련시킨다. 결국 김일은 세계헤비급챔피언(1963년)이 되어 밀항 10년만인 1965년 귀국한다. 오딧세이에 버금가는 서사극이 아닐까.
그의 사망은 20세기 한국사회 낭만문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60년대와 70년대 초를 넘어서면서 한국사회는 병영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바로 시월유신. 또한 급격한 중공업 중심의 산업화는 도시화를 수반하면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명동시대, 종로시대가 강남시대로 바뀌게 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시대'에 접어든다. 1975년엔 사보이호텔에서 조양은이 신상사파를 회칼로 습격하면서 이전의 협객을 자처하던 낭만주먹들의 종말을 고하게 된 것 또한 상징적이다.
쓸쓸하게 이별을 준비한 거인
그의 생은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다. 고흥 섬마을 농사꾼이었던 그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 아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가 좌익으로 몰려 고생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전력은 그의 아들의 육사 입학을 막았고 사병으로 징집된 그 아들은 1978년 군에서 사고로 삶을 먼저 마감하게 된다.
그의 말년은 정말 불행했다. 1987년 아내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고 일본과 한국에서의 사업이 연이어 실패하면서 본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한다. 박정희가 마련해줬던 김일체육관도 소유권이 넘어가 문화체육관으로 이름이 바뀌더니 이제는 헐려버렸다. 결국 일본의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후쿠오카에서 외롭게 투병하던 그의 소식을 들은 을지병원의 박준영 이사장과 삼중 스님의 권유로 그는 다시 귀국하게 된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김일은 일본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할 뻔 한 것이다.
그는 가기 전 준비를 많이 한 듯 하다. 지난 2월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스승 역도산의 묘소를 찾았고 또 '레슬링은 쇼' 파문 이후 41년간 등을 돌렸던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을 김해까지 찾아가 그의 병상에서 화해했다. 장영철은 지난 8월 작고했다. 무엇보다 그는 몰락을 거듭해 이제 선수가 스무 명도 안 되는 프로레슬링을 위해 부지런히 다녔다. 유랑극단 수준도 안 되는 후배들을 위해 자신이 얼굴 내밀 수 있는 곳은 지팡이를 딛고, 또 얼마 전부턴 휠체어를 타고 열심히 찾아다닌 것이다.
94년엔 자신의 생가 앞에 초등학교 3학년 때 일본군 방한복 재료로 순사에게 빼앗긴 진돗개를 추모하는 동상을 만들고 '다시는 이 땅에 풀 한포기 개 한 마리라도 외세에 희생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추모시를 지어 새기기도 했다. 스승에게 인사하고, 친구와 화해하고, 빼앗긴 애견의 넋을 달래고서 일흔일곱 노인은 떠나간 것이다.
그가 가져간 것들
역도산도, 최영의도, 손기정도 사라진 이 시대, 김일도 가버렸다. 우리는 황성옛터와 타향살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제 앞으로 전설과도 같은, 외로운 영웅을 만날 수 있을까.
최첨단 하이테크가 난무하고 가짜 명품이 숭상 받는 이 시대, 스타가 되어 강남에 퓨전 레스토랑 차리는 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2000년대 이 시대는 우리에게 추억을 허락할 것인가. 가슴 저리면서도 소중했던 과거를 훔쳐 볼 낭만의 기회나 있을까.
하긴, 이제 동대문운동장도 헐리고 그 자리에 '최첨단' '패션디자인' '컴플렉스'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린다. 호젓한 곳은 찾을 수 없는데 '삘딩'이고 자동차고 한강다리고 도시는 온통 나이트클럽 조명으로 번쩍인다.
그가 가고 나니 전설도, 추억도, 낭만도 보이질 않는다. 그 영감, 욕심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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