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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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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사랑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14> 오류 속에서도 살아남길

아다니아 쉬블리, 당신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봅니다. 짧은 영어로 'deep conversation'을 갈망하던 술자리에서 당신 나라의 시인 키파 판니와 바쉬르 살라쉬를 만났습니다. 통닭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치킨집에서 '토탈치킨'을 외치던 김정환 시인과 거리를 헤매며 아침 해가 밝아올 때까지 술잔을 비웠던 그들에 이어 당신은 나의 세 번째 팔레스타인 친구입니다.

링거를 꽂은 L의 손등이 빼빠로 문질러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살이 붙어 있었습니다. 잠바 만들면서 카우스를 하도 많이 돌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소매 끝부분을 박을 때 손을 뒤집어 계속 밀어가며 360도 돌려야 한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왔습니다. 그는 불법체류자입니다. 단속이 시작된 겨울,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모아둔 돈도 없고, 임금까지 체불되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답니다. 1년 전부터 가끔 배가 아팠지만 잡혀갈까 봐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답니다. 하루에 한 끼로 때우고 밤에만 살짝 나와 돌아다녔습니다. 라면과 빵이 있었지만 배 아파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추워도 보일러를 땔 수 없는 자취방에서 갖은 옷을 다 껴입고 잠만 잤습니다. 배고프니 잠들어도 금방 깨었습니다. '이제 나 어떻게 살아야 해?' 생각하면 할수록 배가 아팠습니다. 통증을 참을 수 없었을 때에야 동네병원에 간 그는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때 큰 병원에 간 그는 십이지장 출혈로 죽음이 머리맡까지 찾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L처럼 저의 이십 대는 공장과 거리와 누추한 자취방 모두 위장과 불법이었습니다. 부엌이 달린 아주 자그마한 자취방에서 살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 방엔 이상하게 비가 오면 발자국 소리가 왔다가 가고 어느 날인가는 자다 깨었는데, 몽둥이라기엔 너무 굵은 나무토막이 유리창 사이에 걸쳐 있었습니다. 또 어느 땐가는 부엌에 앉아 무심히 밖을 보다 나를 보는 눈과 마주쳤습니다. 나는 불법이기에, 나는 내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세상의 나와 내 속의 내가 일치하지 않기에, 경찰서에 신고할 수도 없습니다. 법의 보호를 요청하는 순간 나는 불법자가 되어 갇히기 때문에 나만이 나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낮 동안의 피곤한 노동만이 나의 보호처였습니다. 밤의 두려움을 잊고 깊이 잠들 수 있으니까요.

'불법'이 생의 조건일 때, 우리는 매순간 벼랑을 경험합니다. 세계가 '불법' 딱지를 붙일 때 우리는 힘 앞에서 우리의 진실을 밝힐 무기가 없습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나이지만 나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벼랑만이 우리를 진실로 이 세계의 눈물과 사랑에 동참하게 합니다.

아다니아 쉬블리, 나날이 벼랑 끝이었던 어느 날, 저는 제 처지와 감정 상태와 대조적인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화려하고 뇌쇄적이고 사랑이라기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 나는 벼랑을 통해 신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죽음을 걸고 국경을 넘는 노동자들의 넘치는 세계, 문을 두드려도 대답하지 못하고, 전화가 와도 전화를 받을 수 없으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진실로 존재할, 반드시 존재해야 할, 위대한 사랑을 위해 이 시를 바칩니다.

꽃밭이다 찬란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이 빚어낸 바닥에서 꽃이 된
남자의 황금빛 가슴 속에 묻혀 시간을 잊은
여자의 몸에서도 황금 잎사귀가 돋고
찰나의 시간에도 덩굴은 자라는데
여자의 발끝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와 여자의 눈은 감겨 있고
벼랑 위의 키스는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벼랑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
벼랑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
사랑은 필사적이고 벼랑은 완강하다
살아가는 일이 벼랑이라면 모든
사랑은 벼랑 끝에서만 핀다 지금
안전한 자여 안전한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저 심연을 보아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벼랑 끝에서 벼랑을 잊은 채 우리는
이 순간 영원이다 말하는
저 백척간두의,

-<벼랑 위의 사랑>

아다니아 쉬블리, 당신처럼 저도 어렸을 적에 '이그티그마야' 놀이를 했습니다. 밤중에만 숨바꼭질 놀이를 했을 리 없을 텐데, 지금 제 기억은 캄캄한 밤중 속에 멈춰 있습니다. 점점 멀어져가는 술래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소리를 들으며 곡물창고에 숨었지요. 곡물창고는 어둡고 천장은 높았으며 곡물가마니들이 그득하였습니다. 곡물가마니들을 딛고 저는 가장 높은 가마니 위에 숨었지요. 처음엔 술래가 찾아낼까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몸을 엎드리고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떠들썩한 바깥의 소리를 듣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봅니다. 깨어났을 땐 한밤중이었지요. 처음엔 무서웠고, 다음엔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그 다음엔 '내가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교동에서 만나 1, 2, 3차를 하고 강 출판사 소파에 구겨져 잠든 키파 판니 시인을 두고 새벽이 되어서야 끝까지 남은 동료 문인들과 나는 밖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그리고 유리문 사이로 열쇠를 밀어두고 나왔습니다. 키파 판니는 그날 밤, 어떤 꿈을 꾸었을지 모릅니다. 함께 숨바꼭질을 하고 놀다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혼자만 버려진 그런 시절이 떠올랐을지도 모르지요.

다락방에 수배자 P형과 S언니를 숨겨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되어 우리집을 드나들던 연락책 언니가 꼬리를 밟혔지요. 언니는 수없이 고문을 당했다 했습니다. 마지막에 벌겋게 달군 인두 비슷한 물건 앞에서 발설하고 말았다 했습니다. 늦게 잠들었던 그날 새벽 들이닥쳤던 까만 양복들과 다락에서 끌려나와 린치를 당하던 P형의 비명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와 술래만 있었다면 어찌 술래가 나를 잊어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나와 그만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빗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수없이 많은 존재와 존재의 연속적인 빗나감 속에 서 만들어진 오류의 세계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병들어 아프고 전쟁과 살육은 진정되지 않습니다. 세계 자체가 오류입니다.

어쩌면 우리 앞을 가로지르는 세계가 이미 빗나간 길이고, 빗나간 채로 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계의 오류를 인정합니다. 이미 오류 속에 있는 세계의 어느 지점에서 나에게 타전하고 있는 그대여, 기꺼이 타전하십시오. 나는 형제여, 외치며 그대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고통의 메시지여, 나의 오류여. 나는 나의 오류를 승인합니다. 오류의 반대는 정답이 아닙니다. 오류의 대극에는 빗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 있습니다. 그 겸허한 승인 이후에야 우리는 우리에게 내민 간절한 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밤새 방전된 핸드폰 속에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울음소리가 들어 있다
수신지를 잘못 찾은 울음 사이 토막난 채
찍힌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
암호 같다 접선을 잘못한,
SOS 타전 같다 사랑에로 가는 길은
잃어버린 자가 일부러 잘못 누른,
아니, 나에게 내민 간절한 손인지도 모른다
밤새 떨어진 포탄과 화염 속에서 흘린
머나먼 아라비아 남자의 울음소리인지 모른다
누군가 잘못 누른 번호는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사랑은 이렇게 어긋난 부호라고
잘못 배달된 메시지는 말하는 것 같다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네 사랑이 오류라고

-<내 사랑은 오류>

아다니아 쉬블리, 오류 속에서도 살아남으십시오. 며칠 후면 떠나갈 키파 판니, 그리고 바쉬르 살라쉬, 포탄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으십시오, 부디 살아서 메시지를 보내십시오, 그리고 또 만납시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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