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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조형미술의 남상(濫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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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조형미술의 남상(濫觴)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5〉사천왕사라는 절 (3)

사천왕사의 쌍탑은 신라가 한반도에서 당군(唐軍)을 몰아내고, 명실공한 삼국통일을 이룩한 기념비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쌍탑 뿐 아니라 금당과 단석을 포함한 사천왕사 전체, 나아가 가람 설계 자체까지도 어쩌면 역사적 기념물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우리는 사천왕사가 만만찮은 조형미술품들로 장엄되고 있었음도 알게 된다. 사천왕사 쌍탑은 양지 스님이 빚었다는 소조(塑造) 사천왕상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또 벽화도 있어 거기 그려진 개가 짖기도 하고 벽에서 튀어나와 마당을 뛰어다니기도 했다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그리고 이런 장엄은 사천왕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사천왕사와 같은 시기에 건립된 감은사의 동서 쌍탑 속에는 정치(精緻)한 솜씨의 사천왕상이 장식된 금동 사리함들이 봉안되었고, 이후 이 땅의 곳곳에 건립되는 쌍탑들에는 사천왕상 부조(浮彫)들이 화려하게 탑을 장식하기에 이르러 사천왕상은 가히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사천왕사의 소조 사천왕상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에는 양지(良志) 스님이 '천왕사 탑 아래 팔부신장'을 빚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미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양지 스님의 작품이 '사천왕상'이 아닌 '팔부신장상'이라는 점을 의아해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사천왕과 팔부신장을 혼동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학자들은 팔부신장을 임의로 사천왕으로 새기곤 한다. 실제로 사천왕사 터에서 수습된 소조(塑造) 조각들도 사천왕상임이 분명함에 미루어 볼 때, 『삼국유사』는 사천왕사에 양지 스님의 소조 사천왕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셈인데,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 조형미술계로서는 매우 소중한 기록이 되고 있다.

이 기록이 소중한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나라 회화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수많은 고구려 고분 벽화들을 그린 사람들이 언제적 누구였던가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금동대향로를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며, 익산의 저 위대한 미륵사를 누가 설계하고 건축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조형미술사의 초기 부분은 익명과 몰(沒)연대 속에 파묻혀 있는 셈이다. 그런 판국에, 작가의 이름이 밝혀져 있고 제작 연대가 분명한 작품이, 천년 세월을 견딘 끝에 파손된 조각들로나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조형미술사를 '익명과 몰연대'라는 어둠 속에서 가까스로 구해내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소조 사천왕상. ⓒ프레시안

"서기 679년 신라의 양지 스님이 제작한 사천왕사의 소조 사천왕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두 개의 소조편(塑造片)들로 전시되고 있다. 양지 스님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사천왕사 사천왕상 외에도 영묘사의 장륙삼존상, 사천왕상 및 전탑 기와,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 여러 종류의 소조 작품들을 만들었음이 『삼국유사』에 열거되어 있으며, 양지 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석장사 터에서는 삼천불 전탑의 잔편(殘片)들과 소형 금동여래상·금동보살상·금동인왕상 등이 발굴되기도 했다. 양지 스님은 또 명필로도 알려져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도 썼다고 전한다. 이렇게 소조, 금동공예, 서예 등 다양한 기예를 가진 양지 스님을 두고 일연은 "큰 인물로서 작은 기술에 숨었다"라고 평하고 있지만 그 "작은 기술"들이 우리나라 조형미술의 선편(先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미술사의 입장에서 결단코 작은 일이 아니다.

몇몇 연구자들은 사천왕사의 소조 사천왕상에 이어 감은사 동서탑의 사리구까지 양지 스님의 손길이 미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거기 사리함에 장식된 금동 사천왕상을 만든 솜씨가 사천왕사의 소조 사천왕상에서 보이는 솜씨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소조편과 감은사 탑 사리구의 금동 사천왕상 조각(彫刻)은 그 내력에 있어서도 친연성(親緣性)이 있다. 사천왕사와 감은사 두 절은 각각 당군과 왜병를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문무왕이 건립한 것으로, 서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사천왕사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에 자세한 내력이 있거니와, 감은사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이런 기사가 있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소조 사천왕상. ⓒ프레시안

두 절 모두 문무왕에 의해, 외적(外敵)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목적으로 착공되었는데, 사천왕사는 679년 문무왕 생전에 준공을 보았지만, 감은사는 공사 도중인 681년 문무왕이 죽게 되자 부랴부랴 문무왕의 원찰(願刹)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절에는 모두 사천왕상 관련 조형물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사천왕사에는 목탑 하부에 소조 사천왕상이 장식되고, 감은사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된 금동 사리함이 동서 두 석탑의 내부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두 절은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할 수 있어, 두 절의 사천왕상은 그 제작 형태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에서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사천왕사에서 소조(塑造) 형식으로 시작된 사천왕상의 조상(造像)은 감은사에서 금속공예로 그 장르가 바뀌고 이어서 통일신라시대에 석조 쌍탑들이 건립되기에 이르러서는 이들 석탑에 부조상(浮彫像)으로 자리잡고 나아가서는 고승들의 사리탑, 석등에까지 조상(彫像)되게 됨으로써 통일신라시대 조형미술의 큰 흐름을 이루기에 이른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로 전개된 사천왕상 조상(造像)은 당연히 회화 장르에서도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유감스럽게도 회화 작품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던 사천왕사 벽화의 이야기에서 사천왕상이 회화로도 구현되었을 가능성을 짚어볼 수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 '경명왕(景明王)'조는 사천왕사에 사천왕상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의 일화로 전해 주고 있다.

"제54대 경명왕 때인 정명(貞明) 5년 무인(918)에 사천왕사 벽화(壁畵) 속의 개가 짖었다. 이 때문에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반일(半日)이 지나자 그 개가 또 짖었다. …… 또 7년 10월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이 글에서 우리는 경명왕이 재위했던 10세기 초반, 사천왕사에 사천왕상을 그렸던 벽화가 있었으며 이 벽화에는 오방신과 개가 그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벽화가 사천왕사 창건과 함께 그려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그림의 품격을 추측해 보자면, 사천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사격(寺格)이 높았음을 감안할 때 거기 벽화의 수준도 당대 최고로 본다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감은사탑 사리함 사천왕상 중 서탑 사리함 외함 서방 광목천(좌)과 동탑 사리함 외함 서방 광목천(우). ⓒ프레시안

『삼국유사』의 기록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벽화 속의 개가 짖었다"라든가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라는 대목이 그 그림의 생동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사기』가 유명한 솔거의 그림을 말하면서,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가 간간히 날아들다가, 다 와서는 어름어름하며 떨어졌다"라고 한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그림이 얼마나 리얼했으면 그림 속의 개가 짖었다고 했겠으며, 얼마나 생동감이 넘쳤으면 개가 뜰로 달려나왔다가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아무튼 창건 당시의 사천왕사에는, 목탑 하부를 장식하는 소조 사천왕상이 있었고, 더불어 사천왕이 포함된 오방신상의 벽화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사천왕사와 자매관계에 있었던 감은사의 동서 쌍탑에는 금동공예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천왕상 장식의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통일신라시대를 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두 절에서 사천왕상을 주제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었다는 것은, 삼국통일로 고구려와 백제 예술의 맥이 끊어진 이후 사천왕사가 통일신라 조형미술의 새로운 요람으로 등장했음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이후 건립되는 원원사, 화엄사 등 여러 사찰들에 세워지는 쌍탑들의 사천왕 부조상들로 이어짐으로써 '사천왕상'이라는 테마는 통일신라 조형미술의 한 전형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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