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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쌍탑가람의 효시(嚆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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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쌍탑가람의 효시(嚆矢)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4〉사천왕사라는 절 (2)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에 따르면 문두루 비법은 두 번에 걸쳐 설행(設行)되었다. 첫 번째는 670년 당군 50만이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침공했을 때, 문무왕이 명랑(明朗)으로 하여금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문두루 비법을 썼던 일이 그것이고, 그 이듬해 신미년(671년)에 "당나라가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또한 군사 5만명으로 쳐들어왔을 때에 다시 그 법을 썼더니 배들이 전과 같이 침몰했다"는 대목이 그 두번째 설행을 말해 주고 있다.

이 기사가 실린 '문무왕 법민'조에는 "그 후에 절을 고쳐서 새로 짓고 사천왕사라 했는데,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남아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몇몇 연구자들이 '단석'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이를 문두루 비법의 설행과 관련 있는 유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단석 유구(遺構)는 지금도 사천왕사 금당 터 북쪽 좌우에 남아 있는데, 일제 때 사천왕사를 발굴 조사했던 후지시마 가지오(藤島亥治郞)는 이를 좌우 경루(經樓) 터로 명명했다가 나중에는 종루(鐘樓) 또는 고루(鼓樓)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동국대 장충식 교수가 이곳을 문두루 비법의 제단으로 보고 『삼국유사』의 단석으로 추정하면서 다른 연구자들도 이를 뒤따르고 있는 형편이다. 장충식 교수는 단석 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금당 후방의 현존 유구는 동서에 대칭하여 두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데 각각 4방3칸의 방형 초석(사방 약 80cm)이 높이 약 60cm 정도의 토단 위에 다소 교란되어 있다. 두 지역에 각각 12개의 초석이 토단 둘레에 'ㅁ'자 형태로 배치되었는데, 초석의 중앙 상면에는 각기 직경 약 20cm에 깊이 약 20cm의 원공(圓孔)이 있고, 원공 주변에는 약 50cm 내외 크기의 이중 돌기선이 정방형으로 몰딩(molding)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네 모서리 부분에서 사각(斜角)을 이루면서 초석의 네 귀퉁이에 연결됨으로써 일종의 우동(隅棟)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까 중앙의 원공 주변의 정방형 부분이 높고, 그 바깥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특수 형태이다. 이 유구의 용도에 대하여는 과거 낭산(狼山) 유적조사에서도 고심한 바 있다."

장충식 교수는 이 초석들에 대한 후지시마의 언급도 곁들이고 있는데 후지시마 역시 이들 초석 뿐 아니라 유구 자체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해 고심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 사천왕사 추정 단석지 초석의 배열(좌), 사천왕사 추정 단석지 초석 윗면(우). ⓒ김대식

"이지(二址)의 초석은 너무나 우아하고 화려하며, 정교·정치하게 만들어져서 현존하는 조선의 초석을 통하여서도 이에 비견되는 물건을 얻을 수 없다. 만일 탑이라면 이와 같이 정중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아무튼 이 아름다운 초석들이, 이 두 곳 터를 탑 터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각 터라고 부를 수도 없는 딜레마 속으로 학자들을 몰아넣고 있던 터에, "금당 후방 좌우대칭의 위치에서 각기 원공을 지닌 12개의 특수한 초석이 있는" 이 유구(遺構)는 오랜 망각에서 깨어나 서서히, 문두루 비법이 행해졌던 단석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 후지시마의 사천왕사 가람 복원도. ⓒ김대식

그렇다면 이런 수수께끼의 유구를 가진 사천왕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일까? 1920년대에 사천왕사 터를 직접 발굴, 조사했던 후지시마는 발굴보고서에 사천왕사 가람의 복원도를 싣고 있다. 이 복원도를 보면 절의 전면 중앙의 중문과 후면 중앙의 강당이 동서 양쪽의 회랑으로 이어져 있고, 그 안쪽에 금당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동서 두 개의 탑이, 그리고 뒤쪽에는 역시 동서로 종루와 경루가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사의 가람배치는 매우 기하학적이어서, 한 마디로 간단명료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그 가람배치가 관정경(灌頂經)이라는 밀교 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하학적 차원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철학적 깊이까지 지니고 있다.

관정경은, 위험한 재앙을 당하는 날에 동·남·서·북·중 오방대신의 이름을 원목(員木) 위에 써놓고 그것들로 문두루의 형상으로 삼으면 이 문두루가 모든 귀신을 압착시켜 갈아 없애어, 망령되이 그른 일들을 행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천왕사의 가람배치는 관정경의 이 대목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금당을 비롯하여 후면의 좌우 단석, 그리고 전면의 좌우 쌍탑들은 동·남·서·북·중의 오방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들다 보면 사천왕사의 건립은 오방신(五方神)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단석이 설치되고 쌍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건립된 사천왕사의 쌍탑에는 다시, 신라에서 최초로 건립된 쌍탑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사천왕사에 신라 최초로 쌍탑이 건립된 사실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쌍탑 건립의 근거를 법화경에서 찾는다. 중국 운강석굴의 부조상에, 석가·다보 두 불상이 안치되고 그 좌우로 탑이 배치된 사례가 있는데 이를 법화경(法華經) 제11 견보탑품으로 설명하면서 사천왕사 쌍탑 건립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우현 고유섭 선생도 『한국탑파의 연구』에서 "쌍탑식 가람의 출현은 설령 그 본류는 당조(唐朝) 가람 형식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관념으로서는 도리어 법화신앙의 유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바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쌍탑의 법화경 유래설에 기우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법화경 견보탑품에 보이는 설명은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불국사의 경우에는 맞춤한 설명이 될지 몰라도, 사천왕사에서 쌍탑이 출현한 근거로 삼기에는 어딘가 모자라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가람배치의 근거를 억지로 불교 경전에서 찾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사천왕사 건립과 관련된 실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서는 우현 선생이 제시한 또다른 중요 논점이 있다.

우현 선생은 『한국탑파의 연구』에서 당탑(堂塔)가치의 변천이라는 관점에서 당탑 비율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당탑 비율이란 금당 면적에 대한 탑 면적의 비율을 수치로 표시한 것인데, 고구려 금강사의 경우 0.7, 백제 미륵사의 경우 0.6, 황룡사 0.5 등으로 표시되고 있다. 우현 선생은 신라시대의 탑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당탑 비율이 저하되는 현상을 지적하여 "쌍탑식 가람제의 출현도 금당에 대한 탑의 가치의 저하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하나의 해석이 성립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염두에 두면서, 사천왕사가 본격적으로 건립되던 무렵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천왕사가 건립될 당시에는 아마도, 여러 해 전에 문두루 비법이 설행되었던 단석이 어떤 형태로든 금당 후면 좌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건축가는 고민스러운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관례에 따라 금당 전면에 탑을 세운다면 그 탑이 금당 후면 좌우의 두 단석과 균형을 이루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쌍탑을 세우는 방안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사천왕사터 발굴 현장(좌), 사천왕사 동탑 심초석 사리공(우). ⓒ김대식

그리 넓지도 않은 사천왕사 경내에 부담스러운 크기의 탑 하나를 세우느니, 그보다 작은 탑 두 기(基)를 금당 전면 좌우에 세운다면, 당탑 비율이 저하되는 추세에 순응하면서, 금당을 중심으로 전면의 두 탑과 후면의 두 단석이 동서와 남북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황금구도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접근방법은 사천왕사의 전례없는, 쌍 단석, 쌍탑 가람배치를 합리화시켜 주면서, 동시에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에 어울리는 하나의 새로운 가람배치 형식을 제공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은, 사천왕사에 쌍탑이 세워졌다는 사실 자체는 신라 탑파사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쌍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천왕사가 세워지기 50년 전 쯤, 백제 무왕이 익산 땅에 미륵사를 세웠을 때, 목탑 하나와 석탑 두 기가 한꺼번에 건립된 예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의 목탑을 사이에 두고 동서의 두 석탑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미륵사의 경우는, 사천왕사보다 앞서 쌍탑 개념이 구현되었던 선구적 사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미륵사의 쌍탑 건립이 백제의 멸망으로 빛이 바래고 만 데 비하여, 신라에서는 사천왕사의 쌍탑 건립 이후 쌍탑식 사찰의 건립이 줄을 잇게 된다. 679년 창건된 사천왕사에 목조 쌍탑이 건립되고 이어 685년에는 망덕사에, 그리고 그후 보문사에 목조 쌍탑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쌍탑의 주역은 단연 석탑으로, 682년 감은사에 석조 쌍탑이 건립된 이후, 불국사, 원원사 등등 통일신라시대 석조 쌍탑의 건립이 붐을 이루게 된다.

문두루 비법이 설행된 사천왕사에서 불현듯 출현했던 쌍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로 내려오면서 당탑 비율이 줄어들고 탑간 거리가 좁혀져 탑의 규모도 아담해지고, 기단부나 탑신부에 불상이 조각된 쌍탑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쌍탑들은 그후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신라 영토 곳곳으로 퍼져나가, 통일신라 말기에는 쌍탑의 수가 약 30여 쌍, 60여 기에 달하게 되었고, 이 땅은 그리하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쌍탑의 나라'가 되어 전 국토가 아름다운 쌍탑들로 장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쌍탑의 원형이 되는 소수의 목조 쌍탑들이 세월의 단련을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져 내려 그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된 사실을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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