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싼 가나파니의 소설 <불볕 속의 사람들>과 <하이파에 돌아와서>를 단숨에 읽어내려 간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20년 전, 대학에서 우리는 혁명과 문학을 꿈꾸고 있었으며 온 존재를 바쳐 그것들을 성취하고자 몸부림쳤다. 낮에는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밤에는 노여움 가득한 대자보를 썼었다. 깊은 새벽 자취방에 돌아와 홀로 누우면 저절로 눈물이 뺨을 적시던, 그 시절에 만났던 <하이파에 돌아와서>는 내 소설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스라엘에 남겨진 아들을 20년 만에 만나는 부모의 마음을 담담하게 그려낸 <하이파에 돌아와서>를 읽으면서,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생각했다. 팔레스타인의 피를 받았으나 이스라엘에서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팔레스타인을 철저히 대상화(對象化)의 장벽 안에 가둔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해 노여워했었다. 동시에 인간의 내면마저도 불구로 만들어버린 한반도 분단의 장벽에 대한 질감을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그때 나는 가싼 가나파니에게 인종의 차이와 시공간을 넘어선 뜨거운 형제애를 실감했었다.
1999년 가을, 물의 도시 베니스에 배낭여행을 갔었다. 마침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었다. 닷새 동안 베니스에 머물면서 날마다 민박집에서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었다. 현대 미술이 회화에서 너무 과도하게 벗어나 설치로 중심을 옮겨가고 있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 그런 심정으로 어느 전시관에 들어서는데, 모골이 송연한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스라엘관이었다. 역시 설치작품이었는데, 철조망과 벽으로 둘러싸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첫 느낌은 역겨움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1993)>,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La Vita E Bella / Life Is Beautiful, 1997)>를 보고 느꼈던 감동이 '이제 그만 좀 하지!'라는 비아냥으로 바뀌었다. 나찌 파시즘에 당한 유태인의 고난을 지속적으로 부각하려는 기획된 동어반복에 짜증이 났다. 나찌 파시즘에 당한 그 모든 비인간의 고통을 고스란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서는 어떠한 성찰도 없으면서 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소재로 만든 설치작품이라니!
소름이 끼쳤다. 유태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찌에게 당하면서 나찌를 닮아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 나찌 파시즘의 태도를 그토록 완강하게 가지고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해답을 알랭 핀킬크라우트에게서 찾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그밖의 다른 대부분의 동물 종을 구별짓는 점은 바로 '인간들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고양이에게 다른 한 고양이는 언제나 또 하나의 고양이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인간사회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일정한 조건들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만 조심스럽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고유의 특성으로 타고났다. (알랭 핀킬크라우트, 이자경 옮김, <잃어버린 인간성-20세기에 관한 에세이>, 19쪽, 당대출판사, 1997년)
나찌가 유태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고, 바로 그 감정상태 위에서 장벽은 만들어졌다. 똑같은 이유로 2000년 6월 15일 이전까지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우리는 분단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적게는 한 시간, 많게는 다섯 시간만 달려가면 더 이상 자동차를 전진시킬 수 없는 길의 끝에 다다른다. 길의 중간에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철조망은 바다와 육지, 산맥과 산맥, 들판과 들판, 길과 길을 삼엄하게 분리하고 있다. 철조망의 이쪽과 저쪽에의 초소에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 군복의 색이 서로 다른 병사들이 형제의 가슴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이것이 분단체제를 상징하는 한국의 휴전선이다. 외국 군함이 하이파에 들어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도시에서 참담하게 내몰렸던 것처럼, 내가 사는 이 땅 한반도 역시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장벽과 한반도의 분단은 그들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의해 기획되고 강제된 비극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세워놓은 장벽의 가장 끔찍한 결과는 그 장벽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내면에도 고스란히 옮겨진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휴전선은 한국인들 개개인의 내면에도 고스란히 옮겨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땅위에 설치된 장벽이 인간의 내면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겪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장벽이나 경계가 내면 속에 설치된 인간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참담했는지에 대해 제국주의자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장벽과 경계는 스스로 뇌관을 작동시켜 전쟁과 학살, 고문과 투옥, 암살과 사형을 공공연하게 폭발시켰다. 흉탄에 목숨을 잃어버린 어린 아기의 축 늘어진 몸뚱아리를 가슴에 안고 피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흔하디 흔한 풍경에 속했다. 심지어 작가들조차 내면에 설치된 분단의 장벽 때문에 스스로 검열을 하면서 글을 쓰곤 했었다.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베이루트가 이스라엘에 의해 폭격 당하고 있을 때, 하루 종일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내 슬픔은 작가로서, 인류의 일원으로서 이토록 무기력하게 앉아 폭삭 무너지는 집들과 피 흘리며 죽어간 소년의 감기지 않은 맑은 눈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그대들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인간의 존엄이 마구잡이로 파괴되고 있는 그 모습을 누군가는 참으로 슬퍼하며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 어떤 장벽도 영원하진 않는 법이었다. 한국의 민중들과 일부 작가들은 분단의 장벽에 온몸을 부닥치며 투쟁해왔다. 그 과정에서 고문과 투옥과 대규모 학살을 견뎌내야만 했었다. 그래도 투쟁은 멈추지 않았고 콘크리트처럼 완강했던 분단의 장벽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0년에 발표된 6.15공동선언으로 분단체제는 급격하게 흔들리고 말았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 새로운 시간대를 6.15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완강해보이던 휴전선에 남북이 오가는 도로와 철도가 건설되었고 하루에도 몇 천 명씩 휴전선을 통과해 남으로 북으로 오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쪽 사람이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유엔군사령부의 허가를 일일이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벽의 일부가 허물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아주 멀고 험난하기 짝이 없다. 미국이 한반도 운명의 목줄을 죄고 있는 이상 분단 장벽의 붕괴까지에는 더 많은 시간과 인내와 투쟁이 필요하다. 팔레스타인의 대지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내면에 설치된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역시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만적 욕망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에 전면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무저항 비폭력의 양민의 생명까지 불가항력적으로 희생되는 테러를 볼 때마다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테러에 의한 무고한 희생과 복수의 악순환이 너무 길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야만의 시대에 평화는 언어가 아니고 현실이다. 평화란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폭력에서 해방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야만이란 폭력의 효율성을 굳게 신뢰하는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 폭력의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어떤 폭력도 인정하지 않으며, 모든 폭력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획득하는 길이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폭력성은 물론이고 국가의 폭력성까지 부정하여 우리의 삶에서 야만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첫 걸음인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 길을 향해 걸어가자!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thebridgetopalestine@gmail.com)' 기획ㆍ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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