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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성락원에서 삼선동 총무당까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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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성북동 성락원에서 삼선동 총무당까지 (하)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20>

삼청동 산수간의 깊은 풍치는 삼청터널을 넘어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삼청각의 높다란 솟을대문 앞으로 해서 거미줄처럼 펼쳐지며 삼선동 평지로 내려가기까지, 한쪽은 일찍이 피난민들이 형성한 오래된 산동네,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다. 한쪽은 1975년 이후 개발되면서 새로운 삶의 기준인 부촌 산동네의 개념을 담아 넓직하게 지어진 저택, 기업의 영빈관, 각국 대사관 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고 그 사이에 평범한 주택들도 자리잡고 있다.

일정기준 이상 최고부자들 수십명이 사는 곳이 성북동이라고 하는데 그런 이름난 인사들 집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돈이 많다는 것보다는 조직적인 부의 구조이다. 정원이 있어 아파트촌과는 삶의 기준에서 구분이 확연해진다. 그러나 안의 구조는 집주인의 미의식이 관건일 뿐이다.

그보다는 넓은 골목길에 최고의 정원인 성락원같은 환경에 감싸여 있으며 불빛이 바다처럼 펼쳐지는 서울시내 야경이 보이고 이웃끼리(서로 아는 부류간에) 서로 불러다 음식을 나누며 일상을 장식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 이 동네 부자집들을 특별한 곳으로 보이게 한다. 산수풍경을 집안에 둔 정원으로 누리는 호사는 이 동네에 유독 많아 보인다. 사회적 모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집, 사업용 영빈관, 외교무대가 되는 대사관 등이 많아서 더 그런것 같다.
▲ 조선시대 삼군부의 건물 중 총무당. 지금의 삼군사령부라 할 삼군부는 경복궁 광화문 앞에 있었는데 총무당건물은 1930년 서울성 아래 삼선동으로 옮겼다. ⓒ하지권

집터가 수천평씩 나가는 곳들도 상당수 있다. 성북동 입구 가게에서는 '올해도 아무 집에서 와서 눈과 낙엽을 쓰는 대나무 빗자루를 20개 사들여갔다'고 했다. 좀 큰 집의 한달치 전기요금이 백만원이 넘는다. 건축적으로는 일관된 스타일이 안 보이지만 양식 건축 틈에 수천평의 터와 여러 채의 한옥이 들어선 삼청각, 길상사, 그리고 사업가의 부인 정미숙씨가 정부지원을 받아 추진하는 한국가구박물관의 백간이 더 넘는 한옥, 간혹 보이는 살림집 한옥들이 웅장하게 건축돼있다. 분위기는 대단히 권위적이다. 여기에 비하면 가회동 삼청동 일대의 한옥은 소박한 규모의 집과 큰 저택들이 함께 섞여있고 큰 벼슬하던 집안부터 노점까지 어울려 서울 북촌의 분위기를 내주던 조화된 생활모습이 있다.

가구박물관은 10채의 한옥이 지하 2층 지상 1층으로 지어져 8년째 완공을 향해 추진 중이지만 개관까지 아마 10년은 걸리리라고 한다. 현재 건물 외관만 완성됐다. 꿩의 바다에서 북악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길가에 긴 담이 둘러있고 공개도 안된다. 담 위로 길게 이어진 한옥 기와지붕이 얹혀있다. 실제 내용은 없이 개관이 되기도 전에 이곳은 성북동의 한 이정표가 됐다.

'한옥지킴이'정도의 사명감을 가진 정미숙씨는 성락원의 안주인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한옥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열심이다. 미술을 전공한 실력으로 현대적 내부와 전통적 외관의 한옥을 직접 50채 가량 설계했으며 한옥 건축과정과 인맥도 꿰뚫고 있다. 외국인에게 한옥을 권하기도 한다. 성북동의 살림집 한옥 몇 채도 그의 설득으로 지어졌다.

새로 지으려면 양옥보다 건축비가 더 드는 한옥, 지하말고는 단층 정도로 그치게 되는 치명적 약점의 한옥은 정말 한옥이 좋은 사람들의 건축적 호사이거나 전통을 거역할 수 없는 용도에 제한된다. 그나마 이들 남은 한옥을 살리려면, 내부는 21세기 건축으로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또 성북동 일대가 지붕만이라도 한식 기와 정도로 통일됐으면 한다. 그러면 나무 많은 산언덕과 불빛 찬란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환경, 아름다운 골목길을 가진 한국적인 동네 하나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이 동네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집집마다 감시 망원경 같은 게 붙어있고 경계의 눈초리가 비수처럼 꽂혀서 낯선 사람이 동네 길을 정처없이 걸어 지나기엔 거북하다. 한 골목에는 '여기서 강도, 절도를 하면 꼭 잡힌다'고 도둑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개조심' 팻말은 그래도 인간적인 데가 있지만 이 철제 안내판은 아무리 도둑과 집주인간의 문제이니 무시하면 된다 하더라도 사납게 보이고 역시 지나다니는 사람은 뜸하다. 이 동네 건물에 입주한 한 회사 사원이 조그만 자동차를 몰고 다녔는데 어느 날 파출소에 '그런 차 못 다니게 해달라'는 민원이 들어갔다고도 한다. 그런 대단한 골목길을 지나면서는, 좋은 오동나무 있는 빈터가 쓰레기로 덮여있는 게 보이고 누추한 집들이 모인 동네도 지난다. 성북동의 두 얼굴이다.
▲ 총무당은 단청이 안 되어 있지만 아주 장중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돌기단 위에 예스런 우물마루를 거쳐 가운데 큰 대청과 양쪽에 두 개씩의 실용공간인 4개의 작은방이 대칭으로 있고 격자문이 달렸다. 관청건물 양식인듯 하다. ⓒ하지권

성북동 아래 과거 연병장이던 삼선동에 있는 총무당(總武堂)은 이 일대에서 놓칠 수 없는 한식건축이다. 총무당은 1868년 고종때 경복궁 앞 지금 정부청사자리에 새로 지은 조선 삼군부(三軍府) 중심 건물로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라는 건물채가 딸려 있던, 이를테면 조선시대 국방부건물이었다. 광화문 앞이 변화되면서 총무당은 1930년 일제때 서울 성곽 밖 삼선동 1가로 옮겼다. 이곳은 삼선시장을 다 통과한 끝 한성대학 뒤쪽 삼선공원 안에 있다.

삼군부는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 신미양요 때 미국 군함과 싸워 물리침으로써 조선군의 위세를 떨쳤다(정치적으로 어떤 평가를 내리든 간에). 근대와 연결된 역사이고 그만큼 한국군의 전통을 말해주는 건물일 텐데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걸 보면 거의 감춰져 있는 느낌까지 든다. 쇄국이었다고는 하지만 양요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 세운 흥선대원군의 척화비도 보신각 경내에 있더니 올봄 가보니 어느새 없어졌다.

총무당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이름난 건축가들도 모르던데, 군인들은 알까? 총무당 말고 청헌당은 육군사관학교 안으로 옮겨가고 덕의당은 자취도 없어졌다는 설명이 안내판에 있다.

서울에 조선시대 관청건물이라곤 이곳 총무당과 화동의 종친부, 견지동의 우정국이 남아있을 뿐인데 이들 건물이 주는 분위기는 여염집과는 달랐다. 조계사 대문 옆의 우정국 건물은 본채도 아닌 별채 조그만 건물 한 동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그 안에 들어가 일제가 간섭하기 전 개화와 맞물린 우정박물관의 역사를 접하면서, 이 일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북촌을 다니다가 이들 세 채의 관청건물을 다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주 단편적이나마 조선시대의 행정이 구조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삼선동의 총무당은 정면 7칸, 옆면 4칸 해서 실건평 72평의 건물 한 채만 덩그라니 있다. 퇴락한 모습은 혼자 버려진 군사령관을 보는 것 같다. 돌기단위에 세워져 높은 처마에 지붕을 떠받치는 기능의 혓바닥 모양으로 뻗친 익공이 있고 앞뒤에 8개씩 큰 기둥이 있다. 총무당이라는 큰 현판과 모두 16개의 한문자 주련이 기둥마다 걸렸다.
▲ 앞뒤 모두 둥근 기둥이 8개씩 높은 처마를 받치고 있다. 총무당 현판아래 기둥마다 한문글귀 주련이 달렸다. ⓒ하지권

정면의 주련에서 의동상부 동서향청(儀同相府 東西向廳), 동려군공 임천하중(董勵羣工 任天下重), 모단서무 작시중의(謀斷庶務 酌時中宜), 문무길보 위헌만방(文武吉甫 爲憲萬邦) 정도를 읽었지만 정확한 뜻과 근거를 알 수 없었다. 한글로 써서 다 알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누가 지었는지 누가 글씨를 썼는지 하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이즈음 군의 구호와는 다른, 옛사람의 세계같은 느낌이 났다.

건물 벽은 관청건물 양식인 듯 앞뒤 똑같은 격자문으로 둘렀다. 한가운데는 큰 마루의 홀이고 양쪽에 온돌방과 마루방이 2개씩 있다. 모두 정확한 규격으로 사방이 대칭을 이뤘다. 재목에 쇠장식을 많이 붙인 것도 눈에 띈다. 익숙하게 보던 한옥과는 다른 것이고 군사용 건물이면서 완전히 개방적이라 용도가 무엇인가 궁금했다. 화려하고 상징적인 일만 이곳에서 하고 은밀한 작전같은 것은 다른 건물을 활용했을 것 같은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그런데 복원된 이 건물에서 온돌방에 불을 들였을 아궁이 같은 것은 설치하지 않았는지 찾아내지 못해 섭섭했다. 복원하면서 왜 그런 구조를 생략하는 것인가? 이전된 뒤 이런 저런 기관이 사용하다가 지금은 텅빈 건물이지만 요정이나 여염집, 절과도 다른 아주 남성적인 힘이 보였다. 새로운 세계를 본 느낌이었다. 성북동 삼선동을 오래 다니다가 막판에 조우한 문물이었다. 한국군의 어떤 행사든, 하다못해 기념식 파티라도 이곳에서 열리면 좋지 않겠는가? 찾아가기 어려운 동네시장 뒷구석에 가려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힘의 상징이자 정신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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