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우산에 대한 다른 생각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우산에 대한 다른 생각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1> 팔레스타인에서의 삶과 죽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중동지역이 불바다로 변한 지 벌써 3주일 지나가고 있다. 잊혀질 만하면 또다시 발생하는 중동지역 폭력사태의 근원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재앙)'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때 일어난 제1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1967년 6일전쟁의 패배, 그리고 이스라엘의 강제 점령으로 나머지 절반의 절반도 또 고향에서 쫓겨났고, 현재 팔레스타인 인구의 60%가 고향을 떠나 난민촌에서 살고 있다.

<프레시안>은 오늘부터 2주에 한 번꼴로 '팔레스타인과의 대화' 연재를 시작한다. 100여 년 전에 시작된 시오니즘과의 투쟁, 그리고 40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불법 군사점령 속에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려는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한국 독자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이 연재는 한국인 작가 오수연 씨와 팔레스타인 작가 자카리아 모하메드 씨 등이 회원으로 있는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thebridgetopalestine@gmail.com)의 기획과 번역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때에 따라 팔레스타인 작가의 글에 대한 한국인 작가의 답글도 실릴 것임을 밝혀 둔다. <편집자>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를 시작하며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 몇 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파괴된 도시, 시체들, 복면의 사나이들, 돌 던지는 소년들, 울부짖는 여인들. 국제 뉴스에서 그런 모습을 간간이 봐 와서 우리는 거기서 또 무슨 일이 터졌다는 또 다른 뉴스가 나와도 놀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겠거니, 60년도 넘게 분쟁 속에 살아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또 한 번 당하겠거니 한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또 많이 겪는다고 죽음의 공포에 대한 내성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쯧쯧 혀를 차며 그렇겠거니 여기는 순간, 우리는 바로 그 순간이 당사자들에게는 생사가 엇갈리는,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두려움과 분노의 영원한 지속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레바논을 '침공'한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의 의도가 무엇이고 앞으로 중동의 판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이냐 등등 정세 분석은 많지만, 그걸로 충분한 것 같지가 않다. 도리어 일부 부작용마저 감지된다. 이 사태를 분석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독자나 시청자로 하여금 이 또한 발생할 수도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은연 중에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나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대응 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이 사태의 핵심,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파괴와 학살은 가려진다.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는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뉴스 너머, 미사일이 붕붕 날아다니는 하늘 안쪽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자리다. 앞으로 격주로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짧지만 생생하고 감동적인 에세이가 연재될 것이다. 우리가 팔레스타인과 아랍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 지역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거기 사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사람들의 심정 또한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아랍권과 교류가 필요하다는 데 반대하는 이는 없을 터인데, 정치 외교적 제스처보다는 마음의 교류가 장기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물론 마음의 교류가 필요한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 평화 말이다. 당사자들로서는 이런 극심한 폭력 사태란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인데 구경꾼들은 이 또한 세계정세의 일환이라고 담담히 치부해 버리는, 이 막막한 거리를 줄여야 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지 못한다면 결국은 누구나 폭력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60년 동안 지속된 팔레스타인의 참극에 대한 불감증에서 당장 깨어나야 한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과연 누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팔레스타인 문제는 인류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안 풀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이 희망 없음에 대해 정신과 예술로 싸운다. 돈이나 무기로는 승산이 없을지라도,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정신적 존엄함과 예술적 성취로 이기고 있다.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독자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만이 아니라 그들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느끼기를 바란다. 오수연


우산에 대한 다른 생각

나는 나의 지인들, 특히 시인들로부터 주변의 모든 것을 너무 시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충고를 항상 듣는다. 그러나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게 있어 삶이야말로 진정한 시이고 시로 씌어진 것은 살아 있음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 장미 그 자체가 시고 장미에 대한 시는 그의 반영일 뿐이라고 할까.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삶의 의식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 자신만의 의식을 창조하려고 애쓴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한국에 손님으로 오게 되었지만1), 여기서도 나는 이 의식을 확장하고 더 많은 층과 차원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의식 중 하나가 빗속을 우산 없이 걷는 것이다.
▲ 2004년 12월 21일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살해된 살람 야쿱 힐란(당시 33세)의 포스터 ⓒ프레시안

팔레스타인에서도 나는 이렇게 걷곤 했다. 비는 내게 우울함을 쫓는 자연적 처방이었다. 그러나 한 친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동네 어귀를 걷고 있는 나를 보고는 걱정 되어 차를 세우고 그런 날씨에 무슨 짓이냐고, 갈 데가 있으면 태워주겠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게 아니라 34년 전 내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떠나온 것을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자궁을 떠난 것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내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쓸까 말까 고민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국에 와서 며칠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집요하게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우산을 쓰지 않아.'

물론 그거야 사실이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분위기- 기후와 문화 등등- 덕분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우산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곳 날씨는 온화하며 변화가 심하지 않다. 비는 겨울에나 오고 아주 가끔씩만 초봄이나 늦가을에도 내린다. 그리고 비가 내려도 충분한 간격이 있어서 사람들은 젖지 않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가 있으며, 젖는다면 그것 역시 아주 가끔 벌어지는 일이다. 나처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젖는 일이 보다 많겠지만, 그러면 문화적 분위기가 그 일을 별 거 아닌 걸로 만들어준다.

허다하고 정기적인 죽음 속에서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각별히 축하할 일이요, 비에 젖는다는 것쯤이야 도리어 살아 있음의 징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음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감사드려야 한다. 그 사람들이 젖었는지 아닌지, 우산을 썼는지 안 썼는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특히 그 사람들이 열정이 충만하여 '기느니 차라리 죽겠다'2)는 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얼마 만에 만나건 우리는 만날 때마다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춘다.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우리더러 오랜만에 만난 모양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웃으면서 지난 밤 늦게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고 답할 뿐 더 이상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한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우리에게는 턱없이 진지해지는 습관이 있다. 나는 가까운 친구하고 술을 마실 때 가장 진지해져서 정치, 삶과 죽음, 연인에게 듣는 잔소리 따위에 대해 '언어의 칼날을 겨루고(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는 만족감을 느끼며 서로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음날 아침 모든 벽에 도배된 바로 그 친구의 사진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그 친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주거지를 옮겨간 변화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 나는 포스터 중 하나에 다가가 읽는다.

"이스라엘 특수부대3)가 자행한 암살로 인해, 모모 씨는 순교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만약에 이런 일이 평생 한번 일어난다면 몹시 비정상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들 중에 두 명, 아는 사람이나 동료들 중에는 여러 명이 이렇게 죽어간다면4), 그건 그저 일상생활의 일환이 되고 만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와 "그래, 또 봐!"하고 헤어져 놓고는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악몽이 된다.
▲ 힐라나와 함께 살해된 다른 2명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 오른쪽은 당시 22세의 무하마드 사이에드 엘-이프타위, 왼쪽은 30세인 나세르 사이에드 자와브레. 이 2장의 사진은 이 글에 언급된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가 촬영한 것이다. ⓒ프레시안

단언하건대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면 개인적 습관이나 생각뿐 아니라 사회 언어적 행동 양식까지도 바뀐다. 잘 지냈느냐는 인사 대신에 "아직 살아 있었구나!"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어, 죽음이 날 깜빡하고 비껴갔거든"이라고 대답한다. 심지어는 자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까지 느낀다.

한번은 문인 몇 명과 함께 국가 행사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가던 길에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이스라엘 공군이 거기를 급습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던데." 시인 마흐무드 아부 하쉬하쉬가 답했다. "우리가 이제껏 산 것만으로도 남들보다는 오래 살았잖아." 나 또한 그 말에 완전히 동의했으며 "우리 세대 중에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 안 되니 아마도 우리 역시 갈 때가 되었나 보지"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우리 스승 후세인 바르구티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 길가 벽에 씌어진 글들은 한밤중에 은밀히 나가 자신들의 감정을 피로써 적어놓았던 장미의 세대의 것이다."

만약에 한국에서 누군가 내게 왜 우산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글에 쓴 것처럼 대답하고 싶고, 명백히 이 대답 역시 너무나 짧다. 그러나 나는 그런 평범한 질문에 이토록 유별나게 답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그 대신 할 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비를 맞으면 영혼과 감각이 깨어나거든요"라든가, "자연을 더 이상 겪지 않으면 우리도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따위, 현학자와 자연주의자 중간 즈음의 대답 말이다.

마지막으로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중얼거리며 목적 없이 걷고 있을 나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밝혀두자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않도록 자신을 교육시키는 중이다. 한국의 정상적인 삶의 리듬에 넘어가지 않도록, 그래서 팔레스타인에 돌아갔을 때 거기서는 죽음이 정상적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도록 말이다.

<기획·번역: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는?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는 한국과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다리를 놓으려는 모임이다. 한국 소설가 오수연,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 모하메드를 비롯한,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예술가와 평화운동가들이 모여 올해 4월에 시작했다.

우리는 아랍, 아시아 문화가 삭제되거나 검게 색칠된 서구 중심의 세계상이 추하다고 느낀다. 직접적, 주체적 상호 소통으로 보다 둥글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가고자 한다.

팔레스타인은 아랍의 불행한 역사와 현실의 상징이자 자존심의 상징으로서, 아랍 세계와 한국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본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는 한국과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가 되고자 한다. 이 다리를 통해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정서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두 문화가 왕성하게 넘나들기를 소망한다.


<註>

1)필자는 현재 광주 '아시아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옮긴이 주. 이하는 필자 주다)
2)나이겔 패리의 '그림자의 땅'이라는 노래에 "죽어서는 안 되는 자들에게 기기를 가르친다"는 구절이 있다.
3)이 죽음의 부대는 1987~93년 첫 번째 인티파다 당시 이스라엘 국무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설립했다. 부대원들은 'Musta'rebeen'이라고 불리는데, 아랍인처럼 보이는 자라는 뜻이다. 아랍인처럼 생긴 사람들 중에서 부대원을 뽑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자기 나라에는 사형제도가 없다고 자랑하지만, 정확히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재판을 통한 사형' 제도는 없다고.
4)내 친구 '이사 아베드'는 1999년에 이스라엘 저격수에게 암살당했고, '살람 야쿱 힐란'은 다른 두 친구와 함께 이스라엘 특수부대한테 2004년에 암살당했다.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thebridgetopalestine@gmail.com)' 기획·번역>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