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습니다. 연해주 우데게이족을 만나고 왔습니다. 연해주에 사는 토착아시아족의 생활과 민속문화가 궁금해서 몇 년 전부터 벼르던 답사를 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우스리스크를 떠나면서 큰 기대는 접기로 했습니다. 우스리스크에서 보낸 <프레시안>의 붓그림 편지에서 '동아시아 최후의 숲사람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부푼 기대를 잔뜩 펼쳐보였습니다만, 막상 소련 시절과 현재의 러시아를 조금만 안다면 기대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행은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담담하게 다가가야 했습니다. 일상에서 거의 보이지 않은 우데게이 고유의 문화를 5박 6일 짧은 현지생활로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 ▲ 비킨강 오롤 마을 우에게이족 갤룬지가 가족들과 필자. ⓒ프레시안 |
우스리스크에서 아침 9시에 북쪽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프랜코 스파스크 루첸고르스크 도시까지 우스리강을 따라 올랐습니다. 하바롭프스크로 향하다가 저녁 5시 무렵 루첸고르스크에서 얼마 안가는 삼거리에서 갑자기 차를 동쪽으로 바꾸었습니다. 비킨강을 거슬러 오르는 비포장 길입니다. 거기서 한 시간 가량 달리니 페르베르, 이곳에도 고려인이 살았다고 우데게이 사람들은 증언합니다. 스탈린시대에 고려인들은 모두 끌려갔으나 딱 한사람이 남게 되었는데 우데게이족 남자와 결혼한 한 여인뿐이었답니다. 다시 목재공장이 있는 자센네브이를 지나 또 1시간 가량 달리면 드디어 우데게이 마을 오롤 마을입니다. 우스리스크에서 여기까지 모두 약 800km를 달렸습니다.
비킨강을 따라서 동쪽 숲으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비킨강은 시우테 알렌 산맥 서북쪽 고산지대에서 흐르는 강입니다. 우기가 되면 검붉은 강물로 변합니다. 부식토가 섞여서 차 우린 물 같았습니다. 연해주의 우데게이를 흑수말갈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비킨강에 오니 비로소 알겠습니다. 서남쪽 백두산 근처에 사는 말갈은 백산말갈이라고 불렀답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백산말갈 계열입니다. 고구려의 장군인 그는 말갈족과 고구려족으로 발해를 세웁니다.
이곳 비킨강의 우데게이족은 발해의 접경지역 또는 발해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11시간 걸려 도착한 숲 속의 마을 오롤, 지금은 주민이 대부분 강 건너의 새마을로 옮겼습니다. 크라스나야라라고 부릅니다. '오롤'이란 지명은 우데게이 말로 붉은 강이란 뜻이랍니다. 오롤처럼 예전에는 토착 지명으로 불렀을 텐데 연해주의 모든 지명이 슬라브어로 바뀌어 부르기가 낯섭니다. 예전에는 퉁구스어 아시아식 지명이 있었을 것이고 그 지명에는 전설이 얽혀 있었을 것입니다.
오롤 마을.(필자는 다리 하나 사이로 마주한 오롤 구마을과 크라스나야라 신마을을 합쳐서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모두 우데게이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 인구는 651명입니다. 그중에서 431명이 토착아시아족 우데게이 사람입니다.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본격화 되던 1950년대에 숲에서 살던 우데게이의 마지막 숲 사람들을 강제로 집단화하면서 집단마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곳 답사여행을 떠나며 제목으로 붙였던 '동아시아 최후의 숲 사람'은 엄격히 말하면 이제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우데게이는 조상들처럼 사냥을 주업으로 하며 숲에서 1족 중심으로 흩어져 살지 않습니다. 우데게이 고유의 생활양식은 없어졌습니다. 마을이 깊은 숲 속에 홀로 있기는 해도 구 소련식 집단 마을에서 생활하는 평범한 러시아 산골마을일 뿐입니다. 텃밭에서 양파 감자 고추 딸기를 심고 빵에 잼을 발라 먹고 여인들은 병원 학교 우체국 매장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나가고 남자들은 배를 만들거나 사냥과 낚시를 하였습니다.
연해주에는 어느 토착종족도 소련과 러시아의 국가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스탈린과 후르시초프 시절에 이미 전통적인 아시아족의 생활양식을 청산할 것을 강요받았으니 지금은 잔존마저 힘든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나마 극동아시아 최대의 우데게이 집단촌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우데게이족이 비록 슬라브 문화화하고 소련식 사회주의 문화화하고 다시 러시아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격동의 시대를 감수했어도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다 변한 것은 아닙니다. 우데게이 근원문화가 숨은 채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겨울잠을 자고 토굴 속에서 기어 나온 연해주 반달곰처럼 우데게이의 뿌리문화가 새순처럼 돋아나 있었습니다.
| ▲ 흑수말갈의 후예 우데게이족(사진에 있는 사람)이 대대로 숲에 묻혀 살던 비킨강. ⓒ프레시안 |
우데게이 할머니에게 물으니 여기서는 샤만이라고 부르지 않고 '샤마'라고 부른답니다. 우리의 굿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도 굿에 대하여 이미 잊고 있듯이 그들도 샤마를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굿이 삶의 양식이자 무의식이듯이 샤마도 그런데, 이들도 양식으로 표면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고 무의식에 깃들어 있습니다. 샤마는 좁은 의미로는 무당이란 말로도 쓰이지만 넓게는 그들의 정신문화를 말합니다. 샤마나무에 댕기를 달거나 바위에 제단을 차려 놓는 것을 여기서는 '묘'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서낭당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동물을 통틀어 '니'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들은 저의 기행문에서 자주 인용 될 것입니다.
제가 오롤 마을에 처음 들어가 우데게이 주민의 집(갤룬지가 게오르기 효도로비치)에 당도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환영의 술잔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건배를 하기 전에 하는 행위가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술잔에 손가락을 넣더니 손가락을 적셔서 술잔 밖 허공으로 세 번을 뿌리는 것입니다. 고수레였습니다. 집주인 갤룬지가에게 곧바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알 수 없고 왜 하는지도 잘 모르고 조상들 대대로 해 와서 한답니다. 며칠 후 갤룬지가 어머니인 칠순 노파에게 물었더니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죽은 사람, 산사람, 살사람에게 차례로 올리는 제사"라고 합니다. 이 의례의 이름을 물으니 끝내 모르쇠였습니다.
아, 동아시아 제사의 원형을 여기서 찾는 순간 같았습니다. 우리는 제사라고 하면 죽은 사람 조상영혼에 바치는 의례로 알거나, 좀더 나아가면 동학에서는 제사가 산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본래 제사라며 인내천, 내 안에 모심(侍)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살아야 할 사람을 위한 제사라니! 저는 새삼스럽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동아시아 고대에는 앞으로 살 사람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냈었구나!" 동아시아의 고대적 제사양식의 핵심단서를 이제야 찾는 것 같았습니다. 동아시아의 고대문화에는 과거형 제사만 아닌 현재와 미래형 제사까지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발해 땅에서 펼쳐진 고대의 제사에도 그랬을 것 같았습니다.
과거형 제사는 왕권과 가부장으로 지배권의 법통을 강조하는 부권형 제사입니다. 청동기문화 이전의 모계사회에서는 과거형 제사가 아닌 현재와 미래형 제사였을 것 같습니다. 아기의 잉태와 성장을 배려하며 사는 삶이 모성이니 이런 삶은 미래형 기원이 강한 삶인 것이 당연합니다. 부계 전통이 수직적이고, 과거의 권력승계적이고, 과거의 권위를 상기하는 것이라면 모계 전통은 수평적이고, 생활 보존전적이며, 미래의 생장기원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3계의 세계를 모두 모시는 것이 본래의 제사의 시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안에, 사람과 생물과 귀신 등 공간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같은 니로 섬기는 것이 본래 전례인 굿 또는 샤마인 것입니다. 러시아 인류학자 아르쎄니에프가 1907년에 쓴 '데루스 우잘라'에서도 나오는 기록입니다. 동행하는 슬라브족의 답사군인들이 먹다 남은 고기를 불에 태워버리려 하니까 데루스 우잘라가 화를 내면서 말립니다. 앞으로 찾아 올 니들의 음식인데 왜 태워서 없애느냐고 야단을 칩니다. 이 행동에서는 '앞으로 올 니'에 대한 배려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술잔이나 물잔을 들 때 전례의 양식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먼 나라 타민족의 문화관습을 가진 슬라브족 인류학자 아르쎄니에프는 여기까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방인류학자의 눈에는 이족의 행동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관찰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직한 인류학적 기록이 오리엔탈리즘의 편견을 넘어 고대의 동아시아 원형문화를 이어주는 단서가 되고 있으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 우데게이 샤마문화를 증언하는 갤룬지가의 할머니. ⓒ프레시안 |
동아시아에서 제사는 과거형, 현재형의 모심에 그치지 않고 미래형의 모심까지 포괄하는 의례라는 단서, 앞으로 올 생명의 탄생에 대한 배려, 걱정, 모심까지 담긴 전례가 동아시아의 고수레였습니다. 고수레는 사전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민간 신앙에서,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무당이 굿을 할 때, 귀신에게 먼저 바친다는 뜻으로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는 일. 고시(高矢)는 단군 때에 농사와 가축을 관장하던 신장(神將)의 이름으로, 그가 죽은 후에도 음식을 먹을 때는 그에게 먼저 음식을 바친 뒤에 먹게 된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민간의 습속은 나라의 역사를 상회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 신라로 바뀌고 고려로 변한 것은 국가지배층이 변한 것이지 민의 생활습속이 변한 것이 아니듯이 고조선의 고시장군 유래가 고수레의 시작이라고 못박을 필요는 없습니다. 권력지대의 제사와 민간생활공간에서의 전례를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숲에서 살면서 하던 1족살이 고수레는 사냥족 문화의 기원과 일치합니다.
숲에서 산다는 것은 과거형이나 현재형의 생활문화로 한정하여 생활할 수 없습니다. 도시문명은 자연을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숲 생활은 앞으로 '살 니'에 대한 예측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삶입니다. 사냥꾼은 앞으로 다가올 짐승의 발길을 예상하고 길목에서 기다립니다. 생물의 개체수가 줄지 않도록 숲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도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자연의 미래가 니의 생존을 위한 엄정하고 숭고한 미래입니다. 데르수 우잘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중국인과 조선인을 비난합니다. "그들은 이상하다. 왜 숲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화전을 하느냐. 숲을 놔두면 거기서 먹을 것이 많이 생기는데, 모든 니들이 같이 살 수가 있는데 알곡 하나만 구하려고 숲을 다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데게이 고수레 술잔에 취해서 내가 묵을 집으로 왔습니다. 갤룬지가 성씨네 바로 옆의 옆집입니다. 집주인 내외의 이름은 유라와 라야 부부입니다. 유라는 마흔여덟 살이고 배 만드는 기술자입니다. 부인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객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마을 동사무소에서 회계 업무를 봅니다. 월봉 1만5000루불을 받는다고 하니 하루 일당 150루불을 받는 우스리스크 노무자들을 보았는데 그에 비하여 보수가 아주 좋은 편입니다. 내가 묵은 집은 마을에서도 잘사는 축에 들었습니다. 러시아식 목욕탕 반야가 있고 우물이 집안에 있고 500평은 되어 보이는 텃밭에다 가전제품도 거의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냉장고 냉동고 빵 굽는 오븐 가스렌지 등도 보입니다. 슬하에 자식은 넷인데 셋은 객지에 나가 살고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삽니다. 그들은 객지에서 대학까지 나왔으나 다시 귀향해서 살고 있습니다. 고향살이가 도시생활보다 행복하답니다. 이 부부는 이곳에서 중학교를 같이 나오며 사귀다가 결혼하였답니다. 결혼을 대학 가기 전에 해서 벌써 장성한 자식이 있습니다.
내가 묵은 집 바로 앞에는 비킨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낙시와 그물로 열목어를 잡고 숲에서는 사슴을 사냥하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잘 잡히지 않는답니다. 원인을 물으니 도로가 나면서부터랍니다. 지금은 하바롭프스크에서 브라디보스톡을 잇는 중산간 도로를 공사중입니다. 같이 간 내일신문의 남준기 기자는 열목어가 동해변으로 흐르는 강에서는 없고 서해 쪽으로 흐르는 강에서 나오는 물고기라고 합니다. 이곳 시우테 알랜 산맥과 백두산을 같은 지질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생태계도 지질적 동질성이 있습니다. 동해 연안의 산천은 같은 자연사를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제 아무리 사람들이 국경의 담을 높이 쌓아도 자연은 연대하고 있습니다.
| ▲ 인류학자 아르세니에프가 1907년에 찍은 '데루스 우잘라'. ⓒ프레시안 |
여기서는 짐승을 사냥하면 동네사람들이 같이 나누어 먹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다음 사냥이 잘된다고 믿습니다. 유라의 집에 머물며 안주인 라야가 해준 사슴고기만두를 먹으며 편하게 보냈습니다. 말린고기, 쌀밥스프, 찐빵, 러시아식 넓적 빵, 양귀비씨가 박힌 빵, 오이지, 사슴고기 양배추 스프, 당면잡채, 닭고기 칼국수, 차, 커피, 과자, 초코렛, 사과, 배, 토마토, 심지어는 바나나까지 식탁메뉴가 바뀌었습니다. 인심 좋고 다정한 주인아줌마는 자꾸 먹을 것을 권하는데 과식이 싫어서 사양하기 바빴습니다. 모처럼 바쁜 조국생활을 떠나 이국땅 숲 속 마을에서 푸짐한 음식과 비 오는 틈틈이 낮잠까지 즐기며 보냈습니다.
이 동네가 도시근교의 시골집들보다 풍요로워 보이는 것은 자연 덕분입니다. 이들은 영양식이 널려 있는 숲과 강이 있기에 언제나 사냥과 낚시 나가 먹을 것을 구해 옵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담비사냥으로 모스크바로 수출까지 하였을 때는 잘 살았다고 합니다. 한 때 가동했던 헬기비행장이 마을 어귀에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 담비가죽 공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벌써 이틀이 지났습니다. 다시 유라의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우데게이의 근원문화를 더 깊이 파고 싶은데 짧은 여행이 안타깝습니다. 더군다나 이곳을 연구한 민속학자나 인류학자의 대동에도 실패했고 시간상 고령의 우데게인들과 오랜 접촉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날이 4일밖에 없습니다. 내일은 이곳 역사학자를 만난다니 그에게 우데게이족의 역사를 물어보렵니다. 그 다음날은 비킨강 상류를 거슬러 오르는 탐사가 있고 마지막 날 샤만의 방문에 기대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이곳 샤만문화은 어떤가? 배를 타고 비킨강을 거슬러 오르면 무엇이 있을까?
우데게이족 문화에는 미래의 것, 앞으로 살 니를 모시는 의례인 고수레가 있었습니다. 우리문화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강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동아시아의 공통된 문화권이 그곳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동시성(과거 현재 미래와 모든 니)의 제사의례가 고대부터 내려오는 동아시아입니다. 생태계의 내일까지 배려하는 영혼의 문화를 여기서도 찾았습니다. 깊은 시우테알랜 산맥 속에 사는 우데게이족 탐사는 이것 하나 만으로도 성공적이라고 자평합니다. 지속 가능한 자연의 미래를 배려하고 기원하는 문화가 동아시아의 숲 안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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