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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철학과 철학하는 문학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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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철학과 철학하는 문학 사이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제2부 <13ㆍ끝> 철학자-문학평론가 김진석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녁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고 있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강연 기획으로서는 마지막 편인데, 김진석을 부른 것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장비가 방통에게 한 표현을 빌자면, 그가 `호되게 유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혼란`을`이 아니라 혼란 `속으로` 정리해 들어가는 데 대가급 실력을 지녔다. 우리나라 철학교수 참 많지만, 내가 아는 한 철학자는 나의 친구 이병창(동아대 교수)과 이영철(부산대 교수), 그리고 나의 후배 김진석(인하대 교수)뿐이다. 물론 김형석 혹은 김태길이 있지만, 문학하는 사람들한테 두 분은 철학자라기보다는 교수를 겸한 인생론 수필가다. 김진석은 철학과 문학 평론을 겸하고, 문학평론이 예술평론이며 철학이고, 이성과 이성 바깥을 어지간히 끈질기게 파고 들지만, 들뢰즈와 달리, 기계적 유물론으로 후퇴하면서 문학-예술 상상력을 결합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기고 또 기어 들어가는 방식을 취한다. 얼핏 매우 어려운 시리즈 저서 명 `초월과 포월`이 바로 그렇고, 혀가 짧은 데다 더듬는 듯한, 그렇지만, 말을 할수록, 논리를 전개할수록 근엄이 유쾌로 허물어지고, 주장이 이미 상대방을 친절하게 감싸는 그의 언술 및 철학, 그리고 안경에 묻은 웃음 표정의 광경이 그렇고, 그가 철학자를 `더러운 직업`이라고 정의할 때도 그렇다. 하니, 김진석 말부터 들어보고, 그 후에도 주로 들어보자.

나이가 들어가면서 책은 여전히 많이 읽지만 지식은 자꾸 비우고 사는 편이다. 이러다 치매에 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식을 비우고 고집스럽게 내 얘기만 하려고 한다. 철학은 참 더럽고 치사한 짓인 것 같다. 철학이 근본이고 원칙이니까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기대가 분명 있고, 그런 기대감이 좋은 점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시대착오적인 구시대 발상인 면 또한 있다. 오늘날 철학자들이 진리의 입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실 아무도 그걸 기대하지 않는데, 우리 모두, 시민 모두 각자 철학자일 뿐인데, 따로 철학과 교수, 철학자 노릇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거. 세상은 더러운데 철학자들은 매일 자기 근본의 깨끗함, 근본이 깨끗하고 본질적인 것을 말하며 스스로 어떤 깨끗한 길을 가는 시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더러운 짓 같다. 그런다고 해서 세상의 더러움이 깨끗해질 리 없음이다. 그래서 더 더럽고 이상한 면을 받아들이자, 텍스트, 글쓰는 걸 좀 더럽게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오히려, 차라리, 들 때가 많다. 의도적으로 자꾸 하기도 하고…

으음. 역시 혼란을 아예 풀어 놓는군. 그래서 불렀지만, 벌써 머리가 아프네. 난, 두통과는 상관 아니 인연이 없는 사람인데.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철학 `교수풍토`를 따지기 전에,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의 문제)은 변한 것이 없다지만, 그건 좋게 말하면, 철학이 2천 년 넘게 자기 문제를 찾으며 왔다는 얘기도 되지만, 대체로 니체 이후 철학이 그 전과 달라진다고, 변혁된다고 하는데, 사실 김진석도 니체에서 시작, 문학예술을 포괄하면서, (초월이 아닌) 포월로, (소외가 아닌) 소내로 나아간다.

독일에 갔다가 희랍 문헌학. 인도 산스크리트어도 하고, 어쨌든 고전을 파고들려 했지만,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유구한 거 한다, 좀 재미있고 좀 자유분방한 것 없겠나, 그런 생각이 퍼뜩 들면서 니체를, 처음에는 서구적인 맥락에서 했고, 한국에 돌아온 90년대 초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었다. 그런데, 철학이란, 일상 언어에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주면서 그것을 개념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사상이란 내용으로서 생각뿐 아니라, 그걸 담는 구체적 언어, 국어로서 새로운 표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과, 초월과 소외라는, 흔히 쓰는, 철학적 개념으로 생각되지 않은 정도로 흔히 쓰는 단어가, 너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포월과 소내는 그런 심정의 반발적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막막하기도 하지만, 한국 자생의 철학 언어 혹은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모종의 비유로서. 우리는 흔히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는데, 목수가 보면 사실 기절초풍할 일이다. 철학은, 말 자체가, 주춧돌-개념 위에서만 가능하다. 포월이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초월이 더 엄청나고 거창하게 어렵다. 껑충 뛰어 어디로 넘어간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가. 이 어려운 말을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얼마나 난감한다. 반면, 내가 쓰는 `포`자는 `길` 포자고, `포월`은 기어서 넘어간다는 뜻이다. 철학에 고공비행 많고 추상 개념들 많지만,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는, 비유 혹은 운유랄까. 포월의 포는 `차적으로 길 포이고, 곧장은 아니고, 한참을 기다보면 껴안을 포, 혹은 감쌀 포에 이를 것 같지만, 아직은 그냥 길 포다. 몸이 움직이는 가장 낮은 지점, 낮은 바닥부터 시작한 비유 혹은 은유. 소외란 말 또한 너무 진부해졌다. `소외된 현대인의 내면을 심도있게 설명한 작품`이란 평은 이미 난무 상태고, 소외라는 말의 설명력 자체가 소진되지 않았나 싶다. 보다 근본적으로, 소외는 중심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헤겔, 마르크스의 소외가 모두 그러한데, 소내는 중심을 전제하지 않으며, 계속 안에 있는 것을 전제한다. 안에 있는데도 낯설다는 느낌. 서양 교회와 성당이 크다지만, 대중 쇼핑몰은 내부가 굉장히 크고, 바깥은 없다. 그러므로 바깥으로 바깥에서 소외되는 게 아니라, 안으로 낯설어진다, 즉 소내된다는 개념이 가능한 것이다. 덧붙혀, 소외란 말이 풍기는 뭔가 징징대고 투정하는, 부정적인 뉴앙스가 나는 싫다. 고독하고 막막하지만 당당히 제 몫을 갖고, 지고, 이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포월은, 설명을 듣다보니, 혹시 섹스를, 섹스에서 오르가즘까지를 설명하는 것 아닌가, 그런 착각이 들었다면서 `좀 천박하지?`하고 물으니 김진석은 천박한 게 아니라 사실적인` 거란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역시 몸이군. 몸이라… 그런데, 개념이란 게, 세상이라는 내용에 대한 법칙이고, 내용의 형식화다. 개념화한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명명이다. 어떤 학과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과목 구분이다. 이것은 수학에서 발명은 없다, 오로지 법칙의 발견만 있을 뿐이다, 라는 말과 같다. 니체의 반란은, 내용보다 표현이 더 강조되고 중요시되는 흐름에 대한 육체의 반란 아니었을까? 새로운 내용을 찾기 위한, 아니 형식의 전복을 위한 `육체=미궁`의 탐험이랄까, 왜냐면 육체야말로 난해하다. 빅뱅보다 난해가고 원자를 쪼개고 또 쪼개다 보면 아무 것도 없고 속도 혹은 에너지만 있는 것보다, 문명이 공을 향해 치닫는 것보다 더 난해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 혹은 이성의 배신 이후 몸이 중요하고 니체 철학이 중요하다. 철학이 여러 학문의 평준어 혹은 보통어에서 여러 예술장르의 열린 종합어, 각 장르의 장점만을 종합면서 자기 수준을 열며 높이는 동시에 각 장르 수준의 고급화를 열며 자극하는 평론어, 특히 문학평론어를 닮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진석의 교과 과정 또한 그것을 지향한다.

옛날에는, 아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철학과 교과목이 철학사, 인식론, 존재론 이런 것들로 많이 짜여 있었는데, 직업으로 철학하거나 철학할 사람들을 위한, 철학교수 유지 및 양성용 커리큘럼이었다. 철학사도 고대철학사, 중세철학사, 근세철학사, 동양 노자사상, 유가철학 뭐 그런 식이었는데, 최근 고전적인 커리큘럼 대신 학제적이랄까 문화적으로 영역 사이 경계와 겹침을 심화-확산해가는 상상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초기에 철학사를 주로 가르치다가, 그때 그때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걸 가르치는 쪽으로 강의 방식을 바꿔왔다. 몇 년 전부터 문학 과정도 가르치는데, 얼핏 철학 싫어하면 문학 좋아할 것 같고, 문학 싫어하면 철학 좋아할 것 같은데, 그거야 말로 정말 고전적인 얘기고, 철학이 인기 없어지니까 문학도 동시에 되어버린, 문학 또한 딱딱하게 느껴지는 그런 형국이 된 듯하다. 내 강의가 충분치 못해 그런 면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인문학의 시대가 많이 가버렸다. 내가 학생 때는 휴머니스틱하고 인문적인 문과대학을 보다 선호한 반면, 요즘 학생들은 국문학과보다 국어학과보다 아예 국어교육과를 더 선호한다. 물론 취직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내가, 문학하는 철학자이자 철학하는 문학자 김진석에게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예술=의사소통`의 매개로서 언어의 운명이다. 일전에, 제법 그럴 듯한,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영화사의 회사 소개 자료를 얼핏 읽다가, 내 어줍잖은 실력에도 국어와 영어 모두 문법 틀리고 표현 서툰 데가 너무 많아 직접 고쳐준 적이 있다. 그런데, `기본은 알아야지 말야.` 뭐 그런 꽤나 흡족한 태를 내다가 갑자기 흡족함이 애매모호해지고, 불안해졌다. 혹시 영화의 문법과 글쓰기 문법은 각각 서로 같은 점보다 서로 다른 점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글쓰기 문법에 너무 정통하면 영화문법은 오히려 방해받는 것 아닐까, 영화쟁이는 영화문법으로 세상을 전유하게끔 권장해야 하고, 아니 영화문법으로 전유한 결과가 바로 영화 예술이고,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께름직한 거다. 옛날에는 글은 기본이고, 글 기본이 안 되고서야 무슨 시나리오를 쓰고 자시고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팽배했고 당연시되었지만, 정말 그럴까? 연극은 어떤가, 다른 장르는, 아니, 우선, 문학부터, 문학의 문법은 일상의 문법과 같은가? 작곡가는 소리로 세상을 인식하는 자고, 우리가 귀명창이라면, 위대한 작곡가가 인식하는 세상은 가장 완벽한 세상이다. 그것은 미술도 그렇고, 모든 예술장르가 그렇고, 모든 `직업인`이 그렇다. 어떤 소설가가 얼핏 정치에 무관심하고 굉장히 무식한 것 같아도, 그의 소설이 위대하다는 것은, 우리가 소설쓰기 문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느 정치가보다 더 정치를 잘 안다는 뜻이다. 장르 특성과 위상에 대한 배려 없이 그냥 100분 토론에 앉혀 놓는다면 화가처럼 눈 먼 놈 없고, 글쟁이 처럼 말 주변 없는 놈 없고, 소리쟁이처럼 귀 먼 놈 없겠지만, 문학과 음악, 그리고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의 세계 속에서는 정치가처럼 천박한 놈 없고(언어를 `대중화`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있으므로), 시사평론가처럼 멋대가리 없는 놈 없고(하나 마나 한 소리 계속 해대므로), 사회자처럼 하릴 없는 놈 없다(양비론을 벗지 못하므로). `문학하는 철학` 혹은 `철학하는 문학`이 규명,혹은 실천해야할 것은 예술을 매개로 한 `초`언어의 구상이다. 김진석은 말한다.

문자뿐 아니라 회화까지도 어떤 세계관을 대변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많이 잃어버렸다. 사실, 문자나 회화, 그리고 연극조차 상징의 방식이다. `세상`이란 말을 우리가 거침없이 많이 쓰지만, 세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세상`이란 말이 세상을 상징할 뿐이다. 엄마한테 `너 과일 가게 가서 과일 좀 사와라` 해서 과일 가게로 간 어린아이가 사과나, 배, 바나나 등을 담아 주는 과일가게 아저씨한테, `사과 말고 과일 주세요`, 혹은 `배 말고 과일 주세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 어린아기가 바로 철학자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비슷한, 상징적인, 그러니까 이해 방식이 우리 몸과 거리가 있는 말을 개념뿐 아니라 회화로도 쓰고, 연극으로도 쓴다. 과거에는 몸과 말의 거리를 고급문화가 모두 커버해주었다. 정신의 힘에 대한 희망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달까. 그런데 어느 순간, 이 격차가 없어지면서, 혹은 격차를 메울 문화적 힘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이 그런 상징성에 대해 어느 순간 매력을 잃고, 이를테면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든지, 어쨌거나 어떤 상징적 표현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별 기대를 품지 않고, 그것의 현실 해결 능력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영화가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로 되는 것은, 물론 때린단들 진짜 때리는게 아니고, 총을 쏜단들 진짜 총이 아니지만, 표현물 자체는 허구적이지만, 이것은 기호 및 기호가 대변하는 의미 사이 간격이 없고, 그냥 우리들이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장르기 때문이다. 각 영역에 고유한 표현방식을 따지기 이전에, 상징적 표현과 직접적 표현의 차이가 더 포괄적으로 있고, 상징적인 표현은 사람들이 `아, 멋있다` 뭐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돌아서는 순간 맥이 빠지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 혼자서 막 고민하면서 무슨 글을 죽어라 쓰다가도 쓰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듯 허망한 느낌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매체의 차원을 메워줄 그 무엇인가가 없고 또 우리가 속아넘어가는 것을 원치도 않는 것 같다. 말 빨 좋은 사람들이 나와 토론을 하는 TV 프로그램을 이발사 주인이 보면서 `아이고 저 이들은 말로 벌어 먹고 사네` 한다면, 인식의 간격은 얼마나 큰 것인가. 옛날에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다 여기고, 그 의미를 계몽받기 원하고, 그럼으로써 뭔가 자양분을 얻는다 생각했는데 말이다. 과거 매체와 요새 매체 사이 간격은 분명 크다…

확실히, 내가 `문학하는 철학` 이야기를 할라치면, 그는 `철학하는 이야기`로 받고, 거꾸로 할라치면 그는 다시 거꾸로 받고, 나는 늘 한 쪽으로 과하고 그는 늘 중용 속에 아주 팽팽하게 있으니, 역시 철학과 문학 `사이` 고수는 고수다. 말은 의식과 더불어, 글은 문명과 더불어 생겨났고, 둘 다 몇 천 년 동안 지배적인 매체였다. 예술의 경우 글의 장르가, 사실 지배적인 성과를 낸 것도 아니건만, 다른 장르를 과도하게 지배해왔다. 니체는, 그걸 역전시키려 하지만, 그에게도 글은 지배적인 매체므로, 불행하다. 몸의 미로 속을 파고 든다는 것은, 글 `이전` 속으로 들어가 글 `이후`를 끄집어낸다는 뜻이다. 음악과 회화, 연극 모두 이미 세상에 있는 것, 그러므로 인간 이전의, 소리, 모양과 색과 질감, 그리고 육체가 매체지만, 글은 사람이 만든 매체다. 니체 철학은 말 너머를 말로 파고 들기 때문에 문학-예술과 만나지만, 문학-예술만큼 행복한 것은 아니고, 문학-예술 자체에 비해 하릴없을 수 있다. 몸 자체에 비해서도. 이를테면 전지현을 성공한 영화배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성공한 광고 모델(여기서 `성공`이란 대중적 성공이 아니라, 예술적 성공을 말한다) 중 하나라고 할 수는 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영화 연기를 못하거나, 광고연기를 잘 해서가 물론 아니고, 얼굴만 보자면 젖살이 덜 빠진 듯 빼어난 미모랄 것도 없고, 섹시할 것도 없지만, `몸=언어`를 강력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으로 말한다는 세대를 대표하며,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동작을 하든 육체 전체, 육체의 무게 자체가 얹혀서 전달된다. 아니, 그녀는 말하지 않고, 몸한다. 이것은 `한 몸 한다`보다 근본적으로 더 발전한 것이고, 보는 이한테 그녀가 주는 쾌감은 `육체=언어`적이고, 그래서 단순한 섹시함보다 훨씬 더 미래지향적이다. 조금 더 쉽게, 우리 아이들 글이라고는 한 줄도 안 읽는데, 내가 여러 번을 보아도 줄거리 이해가 쉽지 않는 영화 <메트릭스>를 어린 나이에도 척척 보길 래, 내가 둔하거나 아이 놈들이 빠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걔들은 줄거리가 아니라 그림으로, 혹은 줄거리가 크게 생갹되어도 가능한, 줄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총체로 영화를 샤샤샤샥 전유해버린 거다. 글의 역사와 운명에 대한 김진석의 설명은 보다 친절하다.

요새 이미지가 하도 범람하니까 글이 사라지는 걸 굉장히 애석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글을 해독하는 계몽적이고 인문적인 능력이란게, 어떻게 보면 기득권의 도구인 면도 없지 않았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이를테면 한자, 희랍어,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잇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대개 각각 지배자와 피지배자에 속했고, 중세 라틴어 성경을 민족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근대화 과정의 근본적인 일부였다. 문자와 문자 아닌 것과의 관계, 그러니까 문자가 꼭 좋은 것이냐 하는 물음과 논쟁은 기원 전 1000년 무렵 이미 벌어졌다. 문자가 오히려 나쁘다는 생각이 문자 발생 시기 이미 세를 이루었고, 문화 격변기마다 유행을 이루었다. 내가 보기에, 전반적으로, 문자언어는 결국 민족언어고, 민족언어는 결국 폐쇄적이므로, 대중은 갈수록 그것보다 더 큰 걸 지향하므로, 문자 매체가 힘을 잃어가는 것이 당연하고, 일반적인 이미지가 더 민주적일 것 또한 당연하다. 물론 `일반적 이미지`가 갖는 위험도, 해악도 있겠다. 그것은 더 대규모적으로 조작되기 쉽고, 사이비로 남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위험은 딱히 오늘의 일은 아니고, 문자의 쇠퇴 또한, 지금처럼 대규모의 빠른 속도로는 아니었지만, 신석기 이전부터, 문화 격변기마다 있었으며, 17, 18세기 이미 정보가 넘치고 혼란이 심하여 `고전` 혹은 `클래식`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정도였다. `고전`이라는 개념이 그때 이미 위기를 겪었으며, 오늘날 위기는 그 대규모화일 뿐이라는 얘기다. 물론 거칠게 상대화할 일은 아니고, 문제는 매우 복잡다양하지만….

그의 저서 중에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는 게 있다. 더러 이 책의 발상이 한나 아렌트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는데, 얼핏 그럴 수도 있겠으나, 내가 보기에 `문학하는 철학` 혹은 `철학하는 문학` 외에, 혹은 그 속에서, 이 제목만큼 김진석다운게 또 있을까 싶다. 나도 아렌트 책을 한 권 번역한 적이 있지만(번역자 이름은 아마 다른 사람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럴 때다.) 그녀는 절대 이런 식으로 제목 붙이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너무 엄정하고 학구적이다. 이 제목, 싸움을 잘하는 동시에 싸움과 철학의 관계를 생각하는 `우리나라` 철학자만이 붙일 수 있는 제목이다. 어쨌거나, 그의 `철학적 폭력론`은, `문학적 철학론`의 연장이고, 몸적이면서 독보적이다.

아렌트는 `모든 사람이 대화를 통해 자발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정치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이상적인 틀`로서 권력과,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폭력을 구분하지만, 난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본다. 굉장히 고상한 폭력도 분명 있으며, 우리가 문화적이라고 보는 것 중에 오히려 폭력적인 것이 많기도 하다. 도구적이지 않고 수단적이지 않은 폭력 영역이 점점 더 커진다는 점이다. 아니, 내 관심사는, 우리가 각 개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폭력을 용인하고 있는지, 혹은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다. 내 안의 폭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겟지만, 어쨌거나 폭력은 폭력이고, 그런 점이 우리 내부에 엄존한다는 것.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광장 대화를 통해 대표를 뽑는 아주 이상적인 공화정을 누렸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다수결이 아니라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정했으며, 이것은 정치 지도자 선출 과정에 대해 그들이 매우 회의적이었다는 뜻으로 내게 들린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 목소리 큰 자들을 두루 똑같이 고른 목소리로 아우르고 조절하여 대표자를 뽑았을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야만은 의식 이전과, 폭력은 의식 이후와 더 연관이 깊다. 물론 폭력은 야만적이고 야만은 폭력적이며, 아먄과 폭력은 서로를 부르지만, 야만은 문화 이전의, 폭력은 문명 이후의, 뉘앙스가 진하다. 야만을 벗게해준 것은 `문화=문명`이지만, 폭력은 오로지 문명 이후 문화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김진석은 (특히 고등학교 교육부터의)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3위일체)은, 김진석에 의하면 `죽었다`하면 편켔지만, 그러기가 힘들고, `죽어라`하면 속 시원하겠지만, 그러기도 힘들고, `죽기 직전이다. 국가에서 빨리 손을 써라`하기에는 너무 오도방정 같고, `에이 잘됐다, 죽어라` 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한, 정말 지지부진과 지리멸렬이 너무 난감한 문제고, `철학의 이름으로 하더라도,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문제와 통합하여 사고 훈련하는 것이 더 큰 문제`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속속들이 더 많이 만들어주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다. 내가 보기에, 문사철 자체가 원래 글 혹은 이성의 독재를 그나마 벗기 위해 만든 틀이다. 역사는 논리를 능가하는 `현실=실체`며,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가장 훌륭한 문학(예술) 작품 그 자체다. `정치적`은 `역사적`과 `문화예술적` 사이에 있으며, `역사적`은 언제나 `논리적`보다 논리적이며, `문화예술적`은 언제나 `논리적`보다 더 역사적이고, 이 모든 것은 과학적이다.

* 특히 강형철(시인, 당시 사무총장)의 호의와 배려에 힘입어 진행되었던 문예진흥원 강좌는 이렇게 13회로 끝났다. 직접 강좌에 참석하여 들어주고 질문해준 수강생들이 고맙고, 강좌 덕분에 좋은 인연들 만나 같이 이야기하면서 나는 내내 행복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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