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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법은 끝내 아름답다. 혹은, 불안 없는, 멀쩡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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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법은 끝내 아름답다. 혹은, 불안 없는, 멀쩡한 희망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제2부 <12> 변호사 강금실

우선 앉거라. 지붕 무너질 걱정 아니 해도 된다… 요새야 지붕보다 더한 것도 백주 대낮에 와르르 무너지는 판이므로 위력을 다소 잃었지만, 이런 말 만큼 구세대 전매특허로서 신세대 지향적이고, 동시에 신세대에게 나날이 새로운 깨우침을 주는 말도 없다. 대형건물이 무너지고 화려한 권위가 정말 화려하게 무너지는 세태가 오히려 `지붕`의 권위를 더 높여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그렇다. 역사는 유구하고 문화는 더 유구하며 아무리 혈기방장한 신세대란들, 현실의 99%는 멀쩡하고, 그러므로 나머지 1%의 개혁 혹은 변혁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정치혁명은 물론, 더 근본적인 문화혁명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멸망도 그렇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신라 망하는 데 100년이 넘게 걸렸다. 역사를 읽으며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지리한 일상과 변화의 관계다. 무너질 일 없는, 말 그대로 엄청난 멀쩡함 때문에 세계는 변혁이 가능하고 필요한 것이다. 신세대는 자칫 그것을 까먹기 십상이며, 섣부른 변혁운동가는 흔히 나머지 1%를 10% 이상으로, 심지어 50% 이상으로 착각한다. 내가 보기에, 10% `이상`은 낭만주의를 넘어서는 수치고, 50% `이상`은 과대망상을 넘어서는 수치다. `지붕`의 정반대 경우는, 이를테면 온국민 절약운동의 수치가 그렇다. 국민 전원이 전기를 하루 5분 동안만 절약한다면 절약될 전기량은 물론 엄청나지만, 대한민국 인구가 그 정도로 많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많은 인원이 어떻게 매일 한 명도 빠지지 않고 5분 동안 절약한단 말인가,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이 때 수치는 99%를 가상현실화한다.
  
  법 또한 그렇다. 조선시대 궁중 드라마에서 충신도 간신도 두루 읊는 대사가 `폐하, 법통을 지키고 법치를 하소서`인 것에서 보듯, 법은 그 시대 말짱함의 수준을 반영하며, 오늘날 대한민국 법에 악법의 요소가 아무리 많단들 깨알같고 숱한 법전 조항들 중 1% 미만이며, 대한민국 법은 엄연히 민주주의 및 이성과 더불어 발전해온 99% 멀쩡한 법이고, 끝내 아름다움에 달할 수 있는 법이다. 국가보안법이 대한민국 법전의 10% 혹은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믿는 사람은, 온갖 열정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에서 손을 떼는 것이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의 앞날을 위해 바람직하다. 국가보안법은 법전과 나라 자체를 망신시키는 1% 미만의 오물에 불과하므로, 바로 그런 이유로 하루 빨리 지워버려야 할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국가보안법은 빨리 폐지된다. 그리고, 1% 악법 요소에 맞선 인간의 투쟁이 단지 그것을 삭제할 뿐 아니라 나머지 99% 멀쩡함의 질을 드높일수록, 인간의 법은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 이시영의 시 <이름>의 제목을 `법`으로 고치고 읽어 보자. 법은 사회 관계의 명명 아니겠는가. 전문이다.
  
  밤이 깊을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깊을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추었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 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순 낫이 될지라도
  오늘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의 장승이 되기 위해
  
  잘 알려져있다시피 강금실은 변호사고, 법무장관으로 발탁되어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인기를 누렸고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에도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미인이지만, 내가 그녀를 처음 본 80년대 초는 너무 눈부셔서 옆자리에 앉아 얼굴을 보태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선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 나는 이 글은 계획보다 장장 4개월 늦게 쓰고 있다) 이순자와 닮았다니, 선거는 정말 니편 내편, 니탓 내탓 할 것 없이 미쳐돌아가고, 그래야 피차 직성이 풀리는 판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인기란 대체로 대중적 인기의 준말이고, 그래서 불안정하게 부침을 거듭하는 것이지만, 강금실 `인기`의 원인은 다르다. 그가 장관직을 퇴임한 직후 기자가 한 말씀 요청하길래, 퇴직도 했으니 별 누를 끼칠 것은 없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유관순 이래 강금실만큼 전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여성은 없다`고 정말 `한 말씀`했고, 훗날 강금실한테 `내 얘기라 쑥스럽기는 하지만, 역시 문학인은 발상이 다르더라`는 칭찬(?)도 들었지만, 내가 그 말을 왜 `던졌는`지, 무슨 뜻으로 그랬는지는 그 후 한참 동안의 곰곰 생각을 요했다. 유관순은, 남성 전태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참혹을 빛으로 전화한 여성이다. 참혹은 지도사상의 부재고, 죽음은 역전시키며, 빛은 역전된, 그러나 보다 질 높은 사랑이다. 하지만, 세태는 보다 영리하다. 죽지 않았다면, 유관순은 영원한 누나 혹은 누이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죽었다는 사실`이 주는 안심을 산 영웅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강금실의 인기는, 내가 보기에, 단지 참신하다는 것이 아니라(참신은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한 사람이 정가로 불려와 멀쩡함(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는 것, 그래서 그 주변의, 혹은 이제까지 정치의 정치적 유난스러움을, 유종호가 김수영을 평하면서 쓴 표현을 빌자면, 일거에 `추문화`하고, 멀쩡한 대중, 혹은 대중 깊숙한 곳에 몸 숨기고 숨 죽인 멀쩡함과 일순 의사소통하는, `환희=감동`을 준다는 것과 더 연관이 있다. 그리고 점차, 저런 멀쩡함이라면, 개혁이니 혁신이니 이제껏 뭔가 수상하고 불안해 보였던 것이 실제로 가능하겠구나 하는 안심과 연관이 있다. 참신함의 의미가 달라진다. 노무현은 물론이거니와 김영삼도 김대중도, 아무리 개혁적이고 경륜이 풍부하단들, 그리고 거꾸로, 당선 후 아무리 소위 개혁파들한테서 `배신자` 소리를 듣고 실제로 보수화했단들, 강금실만큼의 `대중적 안심`을 누리지 못했다. 젊은 `개혁정치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강금실은 결코 젊다고 할 수 없지만, 강금실로 하여 젊음의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에 여성 문제 있고, 남성 문제 있고, 벼라별 문제가 다 있겠으나, 일순, 대한민국은 참 늙은 나라로구나 하는 생각이, 왈칵 드는 거다. 강금실은 포지티브화한 유관순이다. 긍정적이고, 밝고 맑고 명랑한 신세대의 미래가 필요하고, 가능하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왜 그런 생각을 못해보았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아름다움의 무게, 아름다움의 의미 같은 것. 다시, 선거 얘기 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이 점이 강금실의 이미지고, 색깔이고, 공약보다 근본적인, 그리고 개개 정책보다 중요한 전망의 예감이고 내용이다. 이미지에서 공약 혹은 정책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구체화가 정책이고, 공약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신뢰를 확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보수-진보 따질 것 없이, 언론은 그녀의 멀쩡함을 이해 못하고, 더욱 어처구니없는 쪽으로 흘렀다. 보라색이 귀족색이라고? 서민은 보라색을 싫어한다고? 색에 무슨 귀천이 있는가? 색깔론 대신 색 계급론이 들어서는가? 진시황제의 국색은 검정이었는데, 그걸 흑색선전이라 할 것인가. 거꾸로, 보라색 범벅으로 요란굉장을 떨다가 언론이 시비를 걸자 일약 `서민풍 작업복` 착용` 방침을 흘린 열린우리당의 선거운동 방식은 완연 80년대 운동권적이다. 강금실의 `고전무용` 학습 경력을 꼭짓점 댄스로 대중화한 것 또한 그렇다. 그런데, 대중화 맞나? 선거 전이나 선거 후나 국민 대다수는, 도무지 운동권 하는 꼴이 보기 싫은 거다. 우선 운동권 출신인 내가 싫다 나의 꼴이. 억울하지만, 정치와 무관한 운동권들이 모두 억울하겠지만.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왜냐면 선거운동 기간은 짧고 승패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선거운동의 `구태=살벌` 방식을 일거에 씻어낼 `부드러움=이미지`가 긴요하고 시급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 낡디 낡은` `혁명`이란 말조차, 부드럽게, 다채롭게, 당연하게, 설득력있게 들리게 만들 매력을 지녔고, 이 매력이야말로 언론이라는 미로를 `꿰뚫을` 수 있는 아름다운 파괴력이었다. 강금실의 참신이 오세훈의 참신을 불렀고, 강금실의 색이, 후보 경선 때부터, 여야 없이 선거를 다채롭게 했다. 특히나 `젊다는 것들`이 좌지우지하므로 더욱 깜깜절벽인 오늘날 정치-선거판`에서`, 아니 `한테`, 강금실은 할 만큼 했고, 신나게 했고, 견딜 만큼 견뎠고 신나게 견뎌주었으나, 정치판은 `구태=살벌`의 틀 속으로 `초자`를 끈질기게 `가이드`해 들어갔다. `신입식`의 사전적 풀이의 전범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흥분하면 나만 손해므로(정치인들이야 흥분이 밥벌이지만 나는 글쟁이 아닌가), 역시 그녀와는 법과 문학 `사이`를 논하는 게 자연스럽다. `법`은 (멀쩡함이 아니라) 말짱함에 가깝고, 문학은 멀쩡함보다는 `헛소리`에 가깝지만, 법 `행위`와 문학 `행위` 모두 나름대로, 별도의, `멀쩡함`, 즉 현실보다 우월한 진실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강금실은 맨정신일 때 너무 말짱해서 아프고(그건, 내가 미친 세상과 싸움을 자처하더니 승리는 고사하고, 나도 함게 미쳐버렸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다. `너는 제정신이 아니라니깐, 너는 좀 이상하다니깐, 그걸 왜 모르니?`하는 그녀의 말투는 부드럽지만, 그래서 더 아프다.), 취했을 때 `율동이 과도`하고(이런 `두 얼굴` 성격에 그녀는 `게다가 제가 좀 게으르죠` 하고 덧붙인다), 나는 맨정신일 때가 별로 없지만, 일 없는 사람들끼리 치고는 다소 정기적인 술자리에서 그녀와 내가 가끔씩 박장대소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을 보면, 그녀나 나나 `멀쩡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그녀와 술자리를 갖게된 계기도, 그녀의 변호사 개업 초기 엉뚱한 부탁 때문이었다. 내 법률 지식으로 변론을 때울 수는 있겠으나, 제대로 변론하자면 아무래도 인간을 알아야겠다. 문인들 술자리가 있으면 자주 불러주시라… 그녀는 그런 부탁했다는 사실을 기억 못 하지만, `제가 잘 까먹어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몇 차례 술자리 이후 그녀가 `가능하면 좀 쎈 자리`, 즉 험악한 말들이 오가고 주사가 낭자한 술자리를 `부탁`했는데, 그건 더더욱 기억 못할 것이다. 아무대로 율동이 과해서 그랬을 거다. <이름>의 저자 이시영은 70년대 저항시인 중 유독 서정성을 고수한, 즉 `울혈과 풍자`, 혹은 `풍자와 자살`에 빠지지 않은 경우다. 내가 읽기에 `이름` 그 자체가 법이다. 누가 부르기 전에 와야 하는,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는, 그것으로 약자가 강자와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세상이 끝내 아름답다는 증거인 법. 그때 법은 문학의 골간이자 전망이다.
  
  맨정신과 맨정신 너머를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의 버릇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다. 언젠가 (장관 직 그만두고 1년쯤 지나서) 집에 들어가서 잠잘 때까지 텔레비전만 1-2주일 동안 마냥, 주로 살인 혹은 연쇄살인범을 다룬 수사물을 보면서, 말짱함과, 말짱함을 놓아버릴 수 있는, 상념이 강요하는 긴장을 놓아버릴 수 있는, 그래서 더 나은 곳으로 가는 지점이 섞여 있는게 인생이라 얘기할 수도 있고, 거꾸로, 어떤 성격 하나를 규정하기 어려운게 인간 아닌가, 이를테면 한 열 명이 모였다고 할 때 그 중에 한 명도 많다 하겠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보통, 악이라고 규정짓는, 반성의 기제가 전혀 없는 범죄인이 있겠고, 아주 뛰어난 한 두 사림이 있겠고, 그냥저냥 사는 사람도 있고, 나도 그렇고, 어느 인간 속에나 그런 면들이 섞여있어서, 내가, 내 자신의 성격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 혹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자꾸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나. 얘기가 좀, 헛소리로 흐르는가요, 초점이 안 맞는 얘기를 하는게 아닌가? 천만에, 그녀의 총체를 향한 생체실험(?)은 문학과 변호사 경험을 아우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100년 전 작품인데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문장 하나하나의 섬세한 감촉과 품위, 깊은 성찰이 어우러져, 인간다움의 품위 혹은 품격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케된다. 변호사하면서 이거 참 이기기 어렵겠다 싶지만, 그래서 더 관심을 기울이고, 안간힘 겸 최선을 다하니까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오는 소송들이 있고,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사건이 정반대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 순간 충격을 받고 판사, 감사, 변호사가 서로 '판단 잘못`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기도 하지만, 지나고 보니, 재판이란 같은 사건을 두고 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A를 진실이라고 믿었단들, 그것은 내가 나의 의뢰인 시각에서 본 각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때도 분명 있는 것이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판사가 분명 잘못한 거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기가 힘들 뿐 아니라, 한참 시간이 지나 보니까 판사가 정확하게 본 게 아닌가 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하고 문학이 어떻게 보면 같은 아름다움의 지점에 가닿을 수 있다는 말의 배경도, 법 또한 진실을 추구해나가는 직업이고, 사실이 뭐냐, 현실에서 발생한 사실이 뭐냐, 진실이 뭐냐를 너머 사실이란 뭐냐, 현실이란 뭐냐, 진실이란 뭐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진실이냐, 사실하고 진실은 같은 것이냐, 이런 복잡하고 헷갈리는 문제를 떠안기는 마찬가지라는 거다. 소설은, 실제 사실을 배경으로 할 수 있으나 픽션이고, 가공의 스토리인데, 그 속에 훨씬 더 많은, 훨씬 더 근본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는 거. 더 우리가 보고 듣고 믿는 사실은 사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 ..
  
  이쯤되면 강금실은 탁월한 법관인 `동시에` 버지니아 울프의, 현실과 가상현실의 `멀쩡한` 관계와 아주 잘 어울린다. 난 사실, 요즈음 울프하고 조이스의 관계가 더 흥미롭다. 둘 다 현대소설의 영역을 개척했건만, 울프는 여자고 조이스는 남자므로, 울프가 받는 대접은 조이스에 비해 형편없다. 그런데, 그걸 미리 알고, 교정하겠다는 듯, 울프는 조이스와 생몰연대가 같다. 생몰연대처럼 운명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생몰연대처럼 `사실=진실`에 가까운 것이 어디있겠는가. 프랑스문학사에서 발자크도 위대하고 플로베르도 위대하고 보들레르로 위대하지만, 생몰년대(의 운명)를 비교해보면, 플로베르는 누추하고 불쌍하다. 이거 강금실 핑계로 뭔, 헛소리, 강금실한테 뭔 지청구 들을라고? 과연, 강금실은 완연 멀쩡해진다. 그것과 관련해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작품이 일본소설 <라쇼몽>이다. 아키라가 영화로 만들면서 더 유명해졌다. 숲 속 살인사건을 목격한 세 사람의 말이 모두 다르다. 법무부 있을 때 그 영화 비디오를 많이 복사해서 검사들한테 주기도 했다…. 요즘 연애 안 하시나?, 물었더니 `도청도 심하고 해서` 안 한단다. 그리고 강금실의 `문학과 법의 관계` 이야기가 청산유수처럼 흐르는데, 소재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다. 아니, 내가 아는 한, 가장 본질적이고, 미학적이다.
  
  그냥 얼핏, 카프카 <심판> 생각이 난다. 카프카 자신이 법원 근무 경력이 있다고 들었다. <심판>은 법조인 혹은 법률가 자체를 다룬 건 아니지만 법률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소설의 플롯으로 만든 그의 역량은 놀랍다. 굉장히 냉정하고 모든 것을 가볍게 다루는 듯 하지만, 이 가벼움이야말로 절망의 열린 깊이다. 울프는, 진짜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을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남자대학 잔디밭에 앉은 주인공이 생각이 떠오르는 과정을 호수가 낚시과정으로 묘사를 하는데, 그게 무르익어 바야흐로 수면 위 떠오름이 이뤄지려는 찰라, 수위 아저씨가 와서 `너는 왜 여기 앉아 있니?`하는 바람에 떠오름이 확 깨지고 무산되죠. `좀 나가라. 너 좀 나가. 너 왜 풀밭에 앉아 있어?`라며 여성을 억압했던 상황이 그야말로 섬세의 극치로 드러나는 거다.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기점이 됐던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울프는 여성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면서도, 거리를 잃지 않고, 즉 사물의 본질과 실체를 놓치지 않고, 문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그래서 문학적 효과는 물론 `운동적` 효과도 더 크다. 이를테면,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여성을 비하하는 사회 환경에 대한 울분과 주관적 감정이 폭발적으로 섞여 있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그리고 셰익스피어 대표작들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서 있다는 거다. 울프 작품을 읽으면, 그 작품이 쓰여지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우리가 더 나아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
  
  그건 `고전` 이야기인데, 울프 작품이 고전이란 말인데, 문학의 고전은 당시 정황을 정확히 포착하면서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 창을 열어 놓는다, 혹은 창이 열린다. 역사적이므로 확실히 옛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옛날과 지금의 거리를, 규격화하지 않고, 열림으로 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거리를 미래지향적으로 사색케된다. <햄릿>과 <리어왕>이 여전히 감동적인 것은 현대의 미친짓이 거의 다 나온다는 소재적인 의미를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지 않고 광기로 자신을 열어 젖힌다는, 주제적인 의미 때문이다. 언론적인 논의와 달리, 햄릿은 돈키호테보다 본질적으로 용감하므로 현대적이고 돈키호테는 도피적이므로, 비겁하므로 현대적이다. 고전에는 `열린 창`이있고, 그러므로, 세상이 변하는 만큼, 언제 읽어도 재미있고, 문제적이다. 의미가 참신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참신한 의미라… 참신함의 의미, 혹은 `의미=참신함`. 그렇다. 내가 강금실한테서 본 것은 진정한 의미의 고전성이었구나. 중국인들은, 대개 중화정신이 체질화했고, 대대로 변방의 `쬐끄만` 나라 한국을 무시해왔지만, 오늘날, 잘 사는(?) 남한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경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도무지 `인물` 키울 줄을 모른다는 점이라고 한다. 특히, 언론과 정치판이 그렇다는 거다. 좀 될 성 부르면 여론조사하고 인기투표하고, 알권리를 빙자, 도무지 성가시게 하고, `아니면 말고` 남발하고 모처럼 나서면 검증받으라 윽박지르며 이러저리 찔러대고, 인터넷 네티즌들 헷소리 퍼와서 같이 시시덕거리고, 마타도어까지 섞여 들고… 이래서야 우리가 인물을, 더군다나 강금실이라는 `고전`을 어떻게 문화 (상품이 아니라) 걸작으로 키우겠는가(강금실은 덧붙인다. `키워서 잡아 먹겠는가`). 정말, 선거판과 정치판 대단하구나. 선거 얘기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Ps. 청중이 `다시 태어 난다면 무엇을 하시겠느냐?`는 질문에 강금실은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니르바나 하고 싶다는 얘기. 미국 방문 때 김치 등 한국 반찬을 전혀 찾지 않았지만, 음식 적응력이 좋고, 개와 뱀고기 빼고 다 먹지만, 김치를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정말 좋아하는 것은 명란젓, 두부, 계란 등이란다. `애를 낳을 생각이 없냐`는 질문도 나왔는데, 설명을 듣자 하니, 애 문제에 관한 한 그녀는 너무 학술적이고, 그래서 낳을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미리 낼 수 있었다. 결혼 안 하냐는 질문은, 내가 대신 답하겠다. 내가 술값을 낸 적이 전혀 없는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서(`형, 돈은 있는 사람이 그냥 내는 거야.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녀는 주로 그렇게 말했다) 모처럼 그녀를 집으로 초청한 적이 있는데, 나보다 더 강금실한테 호감을 갖고 있는 아내가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자 그녀가 처음 한 말은, `아니, 왜 이혼 안 하세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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