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과 2006년 6월 남한은 월드컵 열기로 매우 뜨거웠다. 4강까지 올라갔던 2002년과 16강의 목전에서 좌절한 2006년 모두 한반도가 들썩일 정도로 대단한 응원이 남한에서 있었다. 운동장에서 직접 경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수만 명이지만, 남한 인구의 절반 가량인 2000만 명 이상이 TV를 통해 한국팀의 월드컵 경기를 보았으니 실상은 'TV방송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축구는 남북한에서 공히 '국기'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의 말로도 "체육에서는 축구가 기본"이다. 그러면 남한 땅이 요동치던 이 시간에 북한 주민들도 TV를 통해 월드컵경기를 보고 있었을까?
2006년 6월 월드컵 개막 직전,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위원회는 남한의 방송위원회에 월드컵중계를 요청했다. 경기 개막 직전에 이루어진 북한의 요청에 남한의 방송위원회는 서둘러 중계권을 구입하고, 북한으로 월드컵 경기프로그램을 송출했다. 그리고 북한방송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해설과 편집을 거쳐 주민들이 시청할 수 있도록 방송했다. 촉박하게 프로그램 지원을 요청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월드컵 프로그램이 필요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인민들이 월드컵 경기 시청을 원하기 때문이다.
북한 대표팀이 출전하지 않은 월드컵 경기인 만큼 북한 주민들의 관심이 남한만큼 높지 않은 것이야 당연한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 속에서 월드컵 경기가 최대의 관심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스포츠 경기의 관람은 작은 즐거움이 될 수 있고, 힘든 세상에서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오락거리가 다양하지 않고, TV채널도 다양하지 않은 북한에서 월드컵 경기는 오랜만에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고, 남한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또 다른 재미일 수 있다. 또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TV보급이 11.5명당 1대(대체로 200만 대)라는 현실은 TV시청을 위해 이웃이 함께 모이는 재미도 만들 수 있다.
북한주민이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 주민들이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도 드라마(예술영화)다. 드라마는 주요 뉴스인 저녁 '8시 보도'에 이어 가족들이 편안히 쉬는 시간에 방영된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시간대에 편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평일의 <조선중앙TV> 방송이 5시부터 시작해 대체로 10시 30분 경에 끝나므로 드라마의 비중은 약 15% 가량 된다. 그러나 프로그램 사이에 나가는 선전이나 찬양 노래, 그리고 재방송 등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드라마 편성 비중은 20% 가까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방송의 드라마는 대체로 50% 이상이 증산 선전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최고권력자에 대한 충성심 고양과 체제 우월성 선전에 큰 비중이 주어져 있다. 물론 증산 캠페인의 경우도 단순하게 생산만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아니고, 이 안에서도 최고권력자에 대한 우상화가 반복적으로 진행된다. 오히려 체제 자체의 우월성 선전보다 김정일 위원장 개인에 대한 우상화가 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러한 선전선동의 메시지들은 인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와 어우러져 있고, '사랑 이야기'가 주민들의 눈을 드라마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
남한의 드라마는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에서도 '한류' 바람을 일으켰으며, 이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아시아의 스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인들을 흥분시키는 소재인 남녀 간의 사랑이 북한에서도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내용 전개에 사용된다. 이러한 남녀 간의 사랑이 아시아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인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극중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사랑에만 몰두하는 남한의 드라마와는 달리 북한의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을 함께 보여준다.
드라마 다음으로 북한 주민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은 체육경기와 노래자랑, 상식이나 해외물, 보도 프로그램의 순서로 알려져 있다. 체제와 우상화 선전에 초점이 맞춰져 반복되는 프로그램이 주민들의 흥미를 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선전과 계몽적 성격의 반복적인 뉴스 프로그램도 인민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체육경기 프로그램에 대한 주민들의 시청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고, 이같은 사실은 남한의 경험으로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북한 TV 방송의 주인
자본주의 국가의 방송은 시청자가 주인이다. 대부분의 상업방송은 광고 수입을 위해 시청률에 매달리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에 사활을 건다. 그래서 때로는 방송의 공영적 역할이 심각하게 훼손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방송의 주인이 시청자인 시민들로 확인된다. 중국의 경우를 보아도 개혁개방이 추진되고, 방송이 이윤을 추구하게 되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반자율집단'이 되었다. 그리고 광고의 등장을 통해 시청자들이 방송의 사활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반면에 아직까지 조선로동당의 하부조직으로 기능하는 <조선중앙TV>는 인민들의 관심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고권력자와 체제 선전에 치중하는 북한 TV방송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고,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반복적인 프로그램 재방송으로 인민들의 눈을 끌어당기기에 역부족인 상태이다. 하지만 인민들의 의식이 변하여 체제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었고, TV방송의 선전선동에 대해 인민들은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2004년에 북한TV방송은 중국 드라마인 '홍루몽', '수호전', '꼬마전사 장갈'을 수개월 동안 방영하는 고육지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0년 이전까지의 북한TV 방송은 나름대로 인민들과 호흡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수 년간의 가혹한 경제위기를 거쳐 남북이 교류하고 중국의 생필품이 시장을 휩쓰는 현상황에서는 인민들과의 일체감이 크게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조선중앙TV>는 10년 이상 정체된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민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다.
북한방송의 변화 전망
북한의 방송은 표면상으로는 내각 직속의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나, 모든 방송수단은 당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실질적으로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가 방송을 통제하고 있으며, 북한의 방송은 김정일 정권의 체제유지를 위한 선전선동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요즘 남한에서도 쉽게 수신할 수 있는 <조선중앙TV>는 위성중계를 통해 대내외용으로 모두 활용되고 있다.
사회 전반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중국의 언론과 방송이 성장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북한 언론과 방송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1980년대 후반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국제사회에서 북한정권의 고립, 경제위기 등을 감안한다면, 북한 정권의 언론방송에 대한 개혁을 기대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 특히 중국이 개혁개방과정에서 외국의 자본과 영상의 도입, 물적·인적 교류를 허용했던 것과 달리 체제위기를 우려하는 북한정권은 아직도 이러한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도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 주민의 의식변화는 이미 부분적으로 북한정권의 정책적 변화를 추동하는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통제 하에 있는 북한 방송이 앞으로 단시일 내에 빠른 극적 변화를 갖게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성과의 확인과 체제의 변화 확산이 이루어진 뒤에야 방송언론 분야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남한 주민은 수십 개의 채널이 시청자의 눈을 끌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방송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에서 방송의 주인이 다르지만, 북한 방송도 결국은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 방송은 이미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 주민이 주인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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