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가 한창인데 군인들이 투입되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대추리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만 들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구체적인 사정은 잘 몰랐고, 다만 그곳의 주민들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들의 터전에 군사기지라는 죽음의 땅이 또 349만 평이나 늘어난다는 사실에 격앙되어 있었다. 그리고 '올해도 농사짓자'라는 대책위의 모토에 공감했고, 나는 그저 대추리에 가서 하루 품을 팔고 싶었다. 현재의 나로서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추리에 갔더니 초록의 어린잎들, 풋내 나는 목숨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여느 세상과 똑같은 풍경인데, 그 끄트머리에 보리개떡이 있었다. 작달막하고 시커먼 그 오갈 데 없는 귀신이 생명평화 순례한다고 떠돌다가 빈 집이랑 버려진 논밭이 아까워 대추리에 왔는데, 일이 되려고 그러는지 어쩌다 보니 이웃 마을 처녀까지 사귀게 되었단다. 직파한다 고추모종한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저무는 들녘을 둘이 걸으면 외로움도 슬픔도 가난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대추리는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웠고 생명력이 넘쳐났다.
생각해 보면 대추리뿐만 아니라 생명의 가치와 존귀함이 경시되고 무참히 학살되는 현장은 지구상에 수없이 널려 있는 것 같다. 제국주의 국가적 침탈뿐만 아니라 다국적기업이나 단체, 개인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 자본 중심의 생활세계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구체적 일상으로 깊숙이 질러오는 폭력을 피할 수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모든 생명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러다 보니 개인이나 집단, 국가들도 이런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다양한 폭력을 준비하거나 저항하며 살고 있다.
나는 위기의 현장에서 비로소 사랑을 만난 보리개떡의 행복이 불안했다. 보리개떡의 평화를 깨는 것은 정부나 미국의 폭력이겠지만, 보리개떡도 스스로의 분노와 폭력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구에 의해 절망적 상황을 맞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것이 더 처절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나는 고추모종을 위한 밭갈이 일을 배당받았다. 모종을 위해 고랑을 올리고 비닐을 씌우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대추리를 대추리로 있게 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해마다 그랬듯이 고추밭 옆 좁은 공간에 서 있는 배나무가 배꽃을 피우는 일도, 직박구리 한 마리 날아와 그 꽃을 쪼아먹는 일도 다 대추리를 대추리로 있게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 풍경 속의 하나가 되어 즐거웠다. 아니 고마웠다. 그것은 내가 6시간 동안 차를 몰고 올라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왜곡시켰던 대추리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추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 공병대와 용역과 경찰들이 대추리에 투입되었고 비명과 고함소리, 사람들은 피범벅이 되었고 3중 철조망이 설치되었고 대추분교가 헐렸고 주민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그들과 대추리는 고립되어 남아 있다. 보리개떡도 아직 대추리의 총각으로 남아 있고 보리개떡의 사랑도 희망도 모두 고립된 대추리와 함께 남아 있다. 할머니의 고추밭도 배나무도 직박구리도 대추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소유의 논리, 독점의 논리, 힘의 논리, 공격의 논리, 승리의 논리로 취할 수 없는 것들이 대추리에 남아 대추리로 숨쉬고 있을 것이다.
대추리를 찾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가 대추리가 되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 대추리의 고추밭이 되고 직박구리가 되고 배나무가 되는 것이다. 일찍 대추리의 주민이 되어 대추리에 살다가 21일 단식을 한 문 신부님이 그걸 말해 준다. 밖에 있는 우리 모두가 대추리가 되어야만 대추리를 찾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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