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비타'로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에바의 대중적인 인기로 말미암아 페론은 정치적인 위기에서 벗어났고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될 수가 있었다.
그후 에바는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노동자들, 그리고 일반 소외계층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노동·복지부 차관 자리를 자청한 뒤 노동·복지부 내의 사무실을 개방해 누구나 자신을 만나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아르헨 부유층들과 기업들의 지원이 늘어나고 일반 대중들이 열화와 같은 호응을 보내자 그에 부응하기 위해 에바는 1948년 6월19일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한다. 이 재단은 불우청소년, 버려진 여인들, 미혼모, 실직노동자, 노약자 구제에 전력하면서 직업훈련소와 아동병원, 학교, 노동자들을 위한 휴양소 등의 설립을 주도했다.
1949년에는 에바의 주도로 극빈노약자들을 위한 연금제도가 마련됐고 아르헨 전국에 당시로서는 최신시설의 무료병원과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기차를 이용한 순회 진료서비스를 정착시켜 오지의 농부들까지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했다.
에바의 이런 봉사정신을 높이 사서일까? 이 의료사업에 참여한 모든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앞 다투어 무료봉사를 자원했다. 이 제도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르헨의 모든 의사들에게는 국·공립 병원에서의 무료진료활동이 사실상 의무화되어 있다는 얘기다.
탄력을 받기 시작한 에바의 구호사업은 그때부터 민간 차원을 넘어 지역마다 무료 휴양소를 설립하고 상류층들의 전유물이던 유명 휴양지에 호텔을 신축하게 해 누구나 여름휴가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50만 채 이상의 아파트와 개인주택을 지어 무주택 극빈층에 무상으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에바는 특별히 청소년 복지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어린이 전용병원, 전용도시를 건설하는가 하면 전국적인 유소년축구대회를 열어 자신이 직접 시상식을 챙기고 참가 팀은 물론 관중들에게까지 상품을 수여하는 등 아르헨티나 전역의 빈민 청소년들 사이에 축구 붐이 일게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사람들 입장에선 세계 최고수준의 복지국가 국민들이란 자부심을 느끼게 할 만도 했던 것이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너도나도 자원봉사 대열에 합류해 에바 페론 재단은 항상 각계의 전문가들로 넘쳐나 무슨 일이든지 가능케 됐으며 소외되었던 극빈층들은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아르헨 국민들이 '성 에비타'를 외치고 있는 이유다.
에바의 빈민구제사업은 아르헨티나에 국한하지 않고 2차대전이 끝난 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한 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스라엘에까지 식품과 의약품 등 대규모 구호품 수송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에바는 1947년 스페인과 로마 교황청을 방문,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대규모 복지사업에 필요한 재정은 어떻게 조달했을까?
'에바 페론 재단'은 초기에는 부유층들과 귀부인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을 했으나 규모가 커가면서 기업들의 자진참여를 유도했다. 물론 에바 사후 일부에서 "페론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강제성을 띤 기부행위도 있었으나 부족분의 예산은 정부에서 조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페론 정부는 에바의 구호사업에 4억 달러 정도의 예산을 지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정부 지원은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아르헨 정부는 매년 예산의 10% 정도를 무료교육과 국민복지기금으로 책정, 에바의 유지를 받들고 있는 것이다.
페론은 집권말기 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80억 달러 정도의 외채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페론 집권기간 동안 경제는 130% 수준의 성장세를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00%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에바가 주도한 빈민구제 사업에 무작정 정부 지원을 쏟아부어 경제를 망가뜨렸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또한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에바와 페론이 취한 획기적인 조치는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정부 지원을 백지화하고 교회의 모든 수익에 대한 세금부과를 입법화한 것이었다. 에바는 "소외계층을 챙기고 빈민 구제에 앞장서야 할 교회가 정부와 담합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면서 "이들 종교지도자들에게 베풀던 정부지원과 세금을 빈민층 지원에 활용하겠다"고 아르헨 종교계를 향해 전면전을 선언했다. 당시 정치세력 위에 군림했던 교회의 반발을 잠재우고 이 법안을 밀어부칠 만큼 에바의 빈민구호사업은 국민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교회와의 악연으로 군정 시절 아르헨 교회는 군부를 도와 '페론이즘'의 제거작업과 업적말살, 진실왜곡 등에 일조 했고, 군사정권은 그 대가로 페론이 제정했던 교회의 소득세법을 무효화시켰다고 현지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에바가 생전에 심혈을 기울였던 또 하나의 역점사업은 여권 신장과 여성들의 정치참여였다. "정치·사회의 모든 결정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며 여성들은 철저하게 배제됐다"고 주장한 에바는 1947년 여성들의 정치참여와 투표권을 이끌어내 '여성 페론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 당을 중심으로 1952년에는 6명의 여성 상원의원과 23명의 하원의원을 배출시켜 여성들의 본격적인 정치참여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노동자들과 극빈자들로부터 성녀라는 칭송을 받으며 불철주야 아르헨티나를 명실공히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들겠다는 사업에 매진하던 에바는 건강문제로 몇 차례나 "쉬어야 한다"는 주치의들의 경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에바는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다"며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바레이로 박사는 "에바는 몇 번에 걸쳐 페론의 아이를 가졌었다"고 밝히고"자궁 외 임신으로 판명 난 한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정상적인 임신이었으나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는 열성적인 구호사업 때문에 매번 아이를 유산했다"고 공개했다. 에바는 극빈자들을 돌보는 일 외에는 건강이나 다른 부분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1952년 7월 26일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병상에 누워 있는 에바의 쾌유를 빌며 정부 공보실 차관의 공식성명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오후 8시 25분 아르헨티나의 정신적인 지도자 에바 페론이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된 걸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라는 발표와 함께 에바는 33년의 짧은 일생을 마감했다.
아르헨노총(CGT) 본부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도 에비타 기념관을 청소하고 돌보는 게 '생의 마지막 보람'이라는 한 에비타 지지자는 "에바는 빈민들의 위해 자신의 몸을 태운 하나의 촛불 같은 삶이었다"고 회고하고 "우리가 그녀를 향해 성녀라고 부르는 것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우리 같은 서민들의 애로사항만을 걱정하고 챙겼기 때문"이라고 33년 동안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그라진 에바의 짧은 일생을 정의했다.
에바 역시 살아 생전 이와 같은 자선사업에 매달리게 된 동기를 "이것이야말로 내 존재의 이유이며 박애정신이나 단순한 자선사업이 아닌 양극화된 사회를 평준화시켜 빈부상호 간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는 것이 준엄한 내 삶의 좌우명이었다"고 회고했다.
'체 게바라와 에비타의 관계'
자신을 약자와 극빈자, 여성들의 운명을 바꾼 혁명가로 평가해주기를 바랐던 에바의 봉사정신은 당시 의대생이었던 어르네스또 체 게바라의 삶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체가 에바의 의료봉사 활동에 자원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국립대 의대생이면 누구나가 이 봉사대열에 의무적으로 합류했다는 게 정설이다(체는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의대에 입학해 1953년 졸업했다).
따라서 체 게바라의 혁명사상에 기초를 심어준 건 에바였을 가능성까지 대두하고 있다. 에바가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우아한 매력으로 가진 자들을 설득하여 빈부의 평준화를 시도했다면 체는 무장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는 게 다르긴 하다.
하지만 현지 역사학자들은 체가 "나의 삶을 중남미 극빈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련다"고 외치며 무기를 잡은 건 우연하게도 에바의 좌우명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에바와 체는 평소 사회혁명에 대한 교감을 서로 나누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최근 현지학자들은 체와 에바는 서로 알고 있던 사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에바를 저명인사로 만들어준 탱고가수 아구스띤 마갈디의 개인자료 속에서 체에 대한 이야기가 발견돼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마갈디의 기록 속에는 체가 로사리오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육을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상당기간 거주했을 때 바로 옆집에서 살았고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소년 체는 마갈디에게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는가 하면 마갈디를 향해 '띠오(아저씨)'라고 부르며 친 가족처럼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당시 마갈디의 연인이었던 에바는 소년 체와 자연스럽게 어울렸을 거라는 얘기다. 다만 체가 장성해서 의대에 다닐 때 영부인이 된 에바와 직접 만나 사회개혁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현실화시키기 쉽지 않은 '소외계층을 위한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똑같은 이상을 추구했다는 점과 영국의 전설적인 의적 로빈훗을 동경했다는 점 등은 단지 우연으로만 치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따라서 에바가 가난이 한이 되어 빈부의 차이를 평준화하려는 아르헨 사회혁명을 주도했다면,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이에 영향을 받은 체는 중남미 전체의 빈곤추방 혁명을 주도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걸출한 두 혁명 영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비롯해서 중남미 빈민들의 가슴 속에 이들은 성녀와 혁명가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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