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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은 한반도 평화의 필수요소"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24〉미국의 한 온건파 지식인의 진단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한반도에는 새로운 긴장감이 흐른다. 한국은 물론 일본과 미국은 북한의 움직임을 면밀히 지켜보면서 대처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미사일'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할 듯이 보인다. 미사일이라 하더라도 북한은 이른바 '미사일 자주권'을 내세워 외부간섭을 배제하려는 태세다. 이같은 논란은 긴장 완화를 통한, 한반도의 점진적인 평화체제 구축에는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미사일 발사 움직임이 불거지기 전인 올해 초부터, 미국 부시행정부는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는 문제를 적극 검토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5월 18일 <뉴욕타임스>는 "부시 미 대통령의 고위 보좌관들이 북한과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대북 접근법(a broad new approach to dealing with North Korea)을 부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보도했었다.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 그동안 벌여 온 6자회담과는 별도로 평화협정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돌이켜 보면, 북한은 그동안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해 왔다. 북한은 평화협정의 내용으로 △상대방에 대한 불가침 서약과 무력충돌의 위험성 제거 △군수물자 반입 중지 △외국군의 철수 △외국군 기지사용 불가를 내용으로 한 평화협정 4개 항을 제시했었다. 2002년 북한은 외교부 담화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무력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불가침협정 체결을 미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한의 불가침협정 제의는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가기 위한 수순으로 풀이됐다.

남ㆍ북한-미국-중국 등 4개 국 서명의 평화협정안

미국이 검토 중인 평화협정안은 서명 당사국을 남북한, 미국, 중국 등 4개국으로 잡고 있다. 6자회담 참여국인 일본과 러시아는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 평화협정 추진 건의안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필립 젤리코 국무부 자문관이 초안을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부시행정부 안에서는 대북 강경론자들과 온건론자들 사이에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 부시행정부 안에서 대북 강경론을 편 고위 인사들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시설을 폐기하지 않으면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양보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평화협정 추진 방안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전제로 북한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즈음처럼 북한이 미사일(북한 주장대로라면 인공위성) 발사 움직임을 보이거나, 북한이 6자회담 참여를 거부하거나, 보다 근본적으로, 핵 폐기를 거부할 움직임을 보일 경우, 부시행정부 안의 대북 온건론자들 목소리가 힘을 잃을 것이고, 평화협정 체결 움직임도 뒷걸음질치기 마련이다.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

미국이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겠다는 얘기는 지난해 8월에도 나왔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한미 양국이 제4차 북핵 6자회담에서 북한과 평화협정 추진 문제를 검토했고 중국과도 협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힐 차관보의 발언은 북핵문제가 풀려갈 경우 미국은 남북한과 더불어 평화협정을 비롯한 평화체제 구축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방안이 계속 논의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폐기를 확실히 약속하거나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단계에 이르면 북한체제 유지보장 방안 및 경제적 지원 등과 더불어 평화체제(peace regime) 구축 문제도 자연스레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록 부시대통령이 평화협정 체결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평화협정은 평화체제의 필수요소

평화협정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그렇지만 평화체제는 평화협정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평화협정에 따라 군비통제를 비롯해 항구적인 평화를 뿌리 내리기 위한 평화관리기구 설치, 안전보장체제 확립 등이 평화체제의 구체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제임스 굿바이 브루킹스연구소 부설 '동북아시아 정책연구센터' 객원 선임연구원은 핀란드 주재 미국대사를 지냈고, 1990년대 초 옛소련이 붕괴한 뒤 핵 위협 제거를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과정에서 미국쪽 수석대표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최근 브루킹스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ion) 웹 사이이트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하기(Creating a Peqce Regime in Korea)'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굿바이 전 대사는 "부시행정부가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타결을 위해 꾸준히 힘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에 좀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굿바이 전 대사의 기고문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보유계획이 북한으로 하여금 지역경제와 세계경제로의 통합을 막는 요인임을 지적하면서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를 북핵문제와 별도로 다루는 게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편 대목이다.

"다자간 안보체제 구축해야"

굿바이 전 대사의 대북 인식은 미국내 온건론 쪽에 기울어 있다. 1기 부시행정부의 미국과 북한이 긴장국면을 거듭하던 지난 2002년초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기고한 글에서 굿바이 전 대사는 "북한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미국의 접근방식은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며, 북한의 핵위협 해소를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병행해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는 외교정책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폈다. 나아가 그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우선목표는 정권의 생존이지 남한 무력통일이 아니다"라고 주장, 존 볼턴 국무부 차관(현 유엔대사)을 비롯한 미 부시행정부 안의 대북 강경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굿바이 전 대사는 다자간 안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왔다. 다자간 안보체제로써 북핵문제를 비롯한 동북아 긴장을 풀 수 있다는 논리다. 아울러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핵에 국한하지 말고 동북아 안보공동체라는 더 큰 구도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기고문에서도 굿바이 전 대사는 "어떠한 평화체제 구축도 국제사회의 다자주의적인 지원체계(다시 말해서, 다자간 안보체제) 아래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하기'의 요약이다.

평화체제와 평화협정 혼동 말아야

미 부시행정부는 남북한, 중국과 더불어 한반도의 '평화체제(peace regime)' 구축을 위한 회담 제안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평화체제'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1953년 한국전쟁을 끝낸 정전협정을 갈음하는 평화협정과 혼동해선 안 된다. 평화협정은 1990년 독일 베를린에서 연합국 4개 국이 법적 권리를 넘기기로 맺은 협정처럼 법률적 문서 형태로 이뤄진다.

평화체제는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평화협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의 안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평화체제가 남북한의 완전한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고 통일을 이룰 것이다.

평화체제에 가장 가까운 형태는 1992년의 남북한 기본합의서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사문서처럼 여겨져 왔지만, 한반도의 정치적 타결(political settlement)을 위해선 아직도 쓸 만한 청사진(blueprint)이다. 제1장은 남북한 화해를, 제2장은 대량살상무기를 비롯한 군비의 단계적 감축을, 제3장은 남북한 사이의 자유로운 왕래와 경제협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기본합의서는 남북한 주변국들, 특히 미국과 중국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회담은 6자회담과는 별도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튼 남북한 관계는 변화하고 있다,

두 가지 다른 평화 협상과정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협상과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하나는 포괄적인 정치적 타결을 이루기 위한 정부간 공식협상이다. 2005년11월 한국 경주에서 열렸던 노무현-부시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북핵문제를 넘어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해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는 물론 항구적 평화와 신뢰가 구축되는 새로운 한반도의 미래를 만들어 가자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말했다).

다른 한 가지 방식은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 신뢰를 쌓음으로써 사실상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냉전 시대에 군사행동을 자제했던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는 그런 방식으로 이뤄졌다. 남북한 사이에 점점 커가는 경제적 유대와 잦은 왕래도 점진적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북한과의 접근방식을 두고 남한은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화체제 구축방식은 더 이상의 공식외교접촉이 없더라도 계속될 것이다.

북핵문제와 따로 평화체제 구축 논의해야

부시행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타결을 위해 꾸준히 힘써야 한다는 충고를 받고 있다. 6자회담에 참여중인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보유계획은 북한으로 하여금 지역경제와 세계경제로의 통합을 막는 요인이다. 따라서 평화체제 구축 논의를 북핵문제와 별도로 다루는 게 합리적이다.

2005년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부시 두 정상은 공동선언문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양 정상은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이 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협을 감소시키고 현 정전체제로부터 평화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화해와 평화 통일에 기여할 것이라는데 동의하였다."

어떠한 평화체제 구축도 국제사회의 다자주의적인 지원체계(multilateral support system) 아래 놓여야 한다. 오랜 한국 역사는 주변국들과의 친선관계가 국민들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북아시아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지역안보와 협력을 추구하는 기구를 갖지 못한 드문 경우다. 이제 미국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진지한 협상을 벌일 듯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평화체제로 발전시킬 것인지 협의를 시작해도 결코 이르지 않다.


본문 보기 http://www.brookings.edu/views/op-ed/goodby/20060530.htm

자 이메일: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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