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앞두고 거의 급조되다시피 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킨 1985년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이래, 우리 국민의 투표 결과를 보면 언제나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나라의 현실과 방향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선택을 하는가 하고. 이번 5.31 지방선거 결과를 본 소감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 선거와 관련해서 특이하고 신기한 것은 그 결과에 반응하는 정권의 태도다.
당의장을 맡은 지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정동영 씨는 선거결과에 책임을 지고, 그렇게 힘들게 운동해서 차지한 자리를 초개와 같이 내던졌는데,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번 선거 결과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노 대통령은 한번의 선거가 나라를 바꾸지 않는다고 반응하고, 국민이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힌 기존의 정책 기조를 고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아직도 자신은 잘하고 있는데 국민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선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가 이번 선거결과를 보고 취한 유일한 조치는 정부의 홍보책임자 회의에서 정부 시책의 홍보를 강화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레임덕 현상이니 뭐니 해도 노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도 2년 가까이 남아 있다. 이 남은 기간 동안 그는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을 계속 밀고 가겠다고 하고, 본인은 옳고 국민은 틀렸다고 우기는 태도를 지속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좌절스럽다. 여당을 지지하던 사람은 이렇게 나가면 다음 번 정권을 독재세력의 후예들에게 넘겨줄 것이 분명해서 좌절스럽고, 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앞으로도 2년 동안 지금의 지긋지긋한 정책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좌절스럽다. 이러한 국민의 좌절이 해결될 길은 없는가? 2년후부터 말고, 지금 당장?
여당을 쳐다보면 한숨이 나온다. 선거에 참패하고는 왜 자기들이 졌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서로 책임을 미루고, 다음 대통령선거에 누구를 후보로 낼 것이냐, 누구와 누구를 한 편을 묶을 것이냐,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다. 시그널을 읽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는 국민들은 답답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1985년 이래 국민들의 선택은 언제나 정확했다.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국민들이 한 것은, 아직도 여당이 제대로 된 개혁 혹은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이 있을 때 방향을 바꾸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졌지만 아직도 여당은 의회의 제1당이다. 민노당이나 민주당의 지원을 얻으면 얼마든지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문제는 개혁적인 정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당이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년 동안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정책 추진 방식과 내용을 국민들이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 머리 나쁜 사람들은 우리 국민들이 개혁을 반대한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들 중에 포장만 개혁이고 내용은 반민주 반개혁적인 것들이 없었는지를 세밀하게 살필 것이다. 내가 하면 모든 것이 개혁이고, 남이 하면 모두가 수구 꼴통이라고 생각하는 단순논리로 국민의 지원을 호소하던 시기는 지난 세기에 끝났다.
본인이 부패하지 않고, 주변인물들의 부정만 단속하면 권력자로서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이유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것이 파악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문제를 일으키고 국가에 해를 끼친다. 음정과 박자 감각이 없는 입 큰 개구리가 목청을 높이면 높일수록 합창단의 음악은 더 크게 망가지는 것처럼.
관료의 포로가 된 집권 여당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된 권력의 가장 첫째 되는 과제는 관료들을 감독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권력은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과 의회다. 왕정국가나 독재국가에서는 선출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왕이나 독재자가 관료들을 데리고 통치행위를 하는 것이다. 왕이 관료들을 데리고 통치행위를 하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정책추진자들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없다. 의회가 생긴 것은 이와 같은 왕과 관료집단의 권력행사를 감독하기 위해서이다. 왕 대신 선출된 대통령으로 행정부의 책임을 맡게 한 것은 미국이 처음으로, 이것은 관료집단에 대한 국민들의 통제권이 더 커진 것을 의미한다.
박정희 시절에 장덕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행정, 사법, 외무 고시를 모두 합격하고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인데,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사람은 '대통령을 시험으로 뽑는다면 내가 (대통령이 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시험으로 뽑지 않는다. 행정부의 수장이지만 관료출신 중에서 인사 고과가 제일 좋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임명하는 나라는 없다.
선진민주주의 국가일수록 정부에 대한 정치인의 지배가 강하다. 관(官)에 대한 민(民)의 견제가 분명할수록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는 나라다. 이에 비해 독재자들은 민의 견제를 최소화하려 한다. 의회를 해산하거나 의회를 형식화 무력화시키는 것이 이들이 권력을 잡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독재자들이라고 해도 권력을 혼자서 행사할 수는 없다. 그들의 도구는 관료조직이다. 관료조직을 길들이는 작업을 하기는 해도 관료조직을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는 독재자는 없다. 관료조직과 행정부의 수반이 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독재국가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권력을 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고 싶어진다. 이때 방해가 되는 것이 의회와 언론이다. 그래서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노골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사람도 있다. 발달한 시민민주주의 국가란 권력자가 그런 시도를 할 수 없는 나라를 말한다. 의회권력과 언론권력과 더불어 상호작용을 하며, 그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민주적인 지도자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씨는 민주적인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취임 이래 언론과 싸우는 것을 언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부단히 진행해 왔다. 언론인을 구속하거나 언론을 폐간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피력해 왔고,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특정 언론사 기자의 청와대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고, 국정브리핑이라는 정부홍보 매체를 만들고 그 매체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정부 예산과 인력을 사용해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박정희나 전두환의 언론 길들이기 작업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이다. 다음에 수구 정권이 들어서서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인 언론에 대한 탄압을 보다 노골적으로 집행할 때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정치세력은 비판할 수가 없게 되었다. '너희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는 한마디에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정치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정치개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국회와 국회의원들이었다. 기존의 국회의원들이 부패했고, 그것이 악의 근원인 것으로 단죄해서, 제헌의회 다음으로 한국 헌정 사상 가장 높은 비율의 초선 의원을 당선시켰다. 그 결과는 무력한 국회였다. 초선 의원들이 다수를 점한 국회는 노련한 관료집단에게는 손쉬운 상대였다.
게다가 노 대통령은 관료들을 개혁의 주체로 삼았다. 임기 초의 공무원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그런 뜻의 발언도 했다. 대한민국 관료집단이 어떤 사람들인가? 박정희 정권 때 싹을 틔우고, 유신과 5, 6공을 거치면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무성하게 가지를 벋은, 역대 독재정권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역대 정권이 바뀌어도 그 집단은 물갈이가 없었고, 독재에 부역한 데 대한 회개도 반성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재정권을 위해서 일했던 경험을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현 정부에서도 여전히 정책을 입안하는 자리에 포진하고 있다.
당장 그들을 대체할 집단이 없으므로 그들의 소위 '전문성'을 활용은 하되, 독재권력 아래서 몸에 밴 조직이기주의와 권위주의가 그들이 세우고 집행하는 정책 뒤에 숨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가려내야 하는 것이 개혁을 내세운 정치인들이 할 일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어땠는가? 노 대통령과 그의 개혁세력은 관료들이 가지고 오는 것은 모두 개혁안이라고 믿고, 국민의 여론과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의 의견은 무지의 소치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의 행태라고 무시하고, 관료집단 발 각종 정책을 밀어부쳤다. 각종 교육정책이 그랬고, 새만금간척이 그랬고, 부동산 정책이 그랬고, 비정규직 노동자정책, 미군기지 이전 정책이 그랬다.
관료집단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독재정권 아래서보다 더 순조로운 항해였다. 예전의 독재정권 때에도 의회내 야당의 반대를 염두에 두고, 어느 정도 견제를 받아가면서 정책을 추진했어야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그나마의 반대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한나라당은 관료집단과 원래부터 지향과 뿌리가 같은 정당이므로 관료집단에서 내어놓은 정책을 반대할 리가 없었다.
개발독재 과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관료집단을 통제하라고 국민의 지원을 받아서 정치세력이 되고, 급기야 정권을 장악한 견제 세력이 일단 정권을 잡고 나니 견제는 커녕 무분별한 관료지원집단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이제 관료들을 견제하는 힘있는 정치 세력이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민노당의 미미한 숫자로는 여당과 한나라당 연합세력의 지원을 받는 관료권력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관료권력의 정책 입안의 첫째 관심은 자신들의 권력강화이고, 둘째는 행정편의주의이다. 지난 두 정부 아래서 민의 견제를 받아 오던 관료집단들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 가져온 정책의 대부분은 관료집단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들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바꾸면 무조건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정권담당자가 냉큼 받아서 통제와 견제를 받지 않고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것이 지난 3년 동안 노무현 정부가 한 일이었다.
행정수도 이전은 건설교통부 관료들이 조직과 권한을 강화할 기회를 준 살판나는 조치였고, 지금 벽에 부딪치고 있는 로스쿨 도입법은 교육인적자원부 공무원들에게 진급과 예산 증액의 기회를 주는 일이다. 공무원들은 진급과 예산, 그리고 민간인을 상대로 인허가와 감독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제일 좋다. 그것을 알고서 다시 살펴보면 노무현 정부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한 일들이 공무원들에게 얼마나 살맛 나는 놀이터를 제공했는지 금방 파악된다.
얼치기 개혁, 개혁이라는 이름의 난장판 소동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당연히 국민들이다. 이것은 재난 상황이다. 관료집단발 청와대 경유 '개혁'이라는 이름의 태풍이 한반도를 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태풍의 피해 상황을 잠깐 살펴보자. 모든 피해 상황을 열거하면 너무 길어지므로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교육
얼마 전에 초등학교 급식시간에 일어난 일을 둘러싸고 학부모가 선생의 무릎을 꿇렸다고 보도된 사건이 있었다. 길어지니까 사건의 전말을 모두 옮기지는 않겠지만,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그러나 슬프고 분통 터지는 사건이었다. 양식이 없어서 학생들이 도시락을 제대로 싸오지 못하던 1960년대의 학교 점심시간도 이렇게 비참하고, 아이들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그 사건에 대해 교육부는 어떻게 대응했나? 학부모들을 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교권확립 차원에서. '교육부가 무슨 조폭집단인가?' 하는 것이 곧바로 드는 생각이었다. 학교 급식 환경을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교육부에서도, 여당의 국회의원에게서도. 교육문제 중에서 학교급식 문제는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평준화와 내신과, 자율학습과, 온갖 모순되는 정책이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어 많은 부모들이 차라리 해외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겠다고 하는데, 정치집단에서는 해외유학을 보내는 부모들을 비난하는 만큼 우리나라 교육 현안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냥 교육부가 가져오는 정책에 고무도장만 찍어주었을 뿐. 현재의 교육정책 문제점의 가장 큰 이유는 교육부의 부처이기주의 때문이다.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과 교육부를 원망하는데, 교사와 교육부 공무원은 가장 인기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이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정치인이 교육관료들을 통제하고 견제하지 못해서 교육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주택정책
현 정부가 부동산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은 온 국민을 한숨짓게 한다. 강남의 특정 지역 아파트 값을 잡는 데 목숨을 걸어서,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까지 집을 가지고 살기 어렵게 만들었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국가 경제를 망치고, 서민들의 주택 소유를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착각하고는, 그 사람들의 삶을 괴롭게 하는 것에 정책의 촛점을 모은다.
그렇게 해서 중상층의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진다고,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공급이 늘어나는가? 부동산 경기가 죽으면 주택공급이 줄어들고, 그 결과 서민들의 주택소유는 더욱 힘들어진다. 아주 기본적인 경제원칙이다. 주택시장이라고 경제원칙의 예외지대는 아니다.
집값을 잡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서민의 주택마련을 쉽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강남의 집값을 잡는 데만 골몰하다보니 처음의 목적과 반대되는 정책을 집행하면서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적과 반대되는 수단을 취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각종 정책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현 정부 부동산 정책의 피해자는 있어도 수혜자는 아무도 없다.
행복도시 건설
지금 정부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교묘하게 어기면서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개고기를 팔지 말라고 하니까 개고기에 양머리를 붙여서 파는 수법이다.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법을 교묘하게 위반하는 모범을 보이면서 국민들이 법을 준수하라고 할 수는 없다. 법을 지킨다는 것은 법 조문의 자구를 지키는 것 뿐 아니라 법의 취지를 따르는 것이다.
수도를 옮기지 말라고 했으면 옮기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일부 부처만이라도 옮겨서 상처난 자존심을 달래야겠다는 옹고집으로 죽도 밥도 아닌 일이 일어나고 있다. 본인이 다음 번에는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별 문제가 없겠다고 말했지만, 최소한 행정수도 이전은 백지화되고, 거기에 쏟아부은 돈은 국가적인 낭비가 될 것이다.
한미FTA 졸속 강행 추진
한미 FTA 는 왜 좋은지, 누구에게 좋은지도 모르면서 밀어붙이고 있다. 자동차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관세율 2% 인하로 수출이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그 댓가로 미국은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을 대폭 개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업계가 미국 관세율 2% 인하로 얻는 것이 더 많을지, 국내자동차 시장 개방과 규제완화로 잃는 것이 더 많을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구결과가 없다.
김현종 통상본부장은 한미FTA 가 체결되면 관세가 인하되어서 한국의 소비자 물가가 내려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지금 요구하는 대로 진행이 되면 한국의 약값과 미국이 지적소유권을 소유하고 있는 상품에 대해서는 한국 소비자 가격이 올라가게 생겼다. 관세환급제도도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폐지하면 수출기업체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된다. 한미FTA 가 한국의 소비자용품 가격을 낮추고, 수출을 늘릴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아무리 믿어주려고 해도 믿어줄 근거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FTA 를 반대하는 운동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200개가 넘는 학술단체가 모여서 '한미FTA 반대 학술단체 협의회'를 만들었다고는 하는데, 전직 청와대 비서관 한 명을 제외한 누구의 입으로부터도 조리있는 반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 많은 대학교수들이 모인 단체에서는 성명서 한번 내고 끝났다. 농민단체, 노동자 단체, 그리고 영화인들이 모여서 데모도 하고 성명서도 내지만 국민들은 그들이 국가전체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경제는 어떻게 되든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일반 국민들은 생각한다.
지금 한미FTA 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노무현 정부의 출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고 일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노 대통령과 이들이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으니 국민들이 보면 사이좋게 놀던 아이들끼리 으르렁대면서 싸우는 것을 보는 것 같아서 한심하고 가소롭다. 대통령이 되어서 어제의 지지자들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자기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겠다고 한다니.
그런데 이 대립의 현장에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명동에서 꼭지점 댄스를 출 시간은 있어도 한미 FTA 협정문 초안을 읽어보고, 반대의견을 들어보고 하는 노력을 한 여당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다. 국민의 의견을 꼭 정부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공청회를 열어야 찬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의정연구회니 헌정연구회니 하면서 다음 번에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시간은 있어도 한미 FTA 찬반 의견을 들어보느라고 보낼 시간은 없다. 그러니 관료들에게 얕보이고, 국민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시위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평택에 미군기지를 옮기는 일을 놓고 노무현 정부 출범을 지지했던 그룹이 노 대통령의 지휘 아래 있는 공권력과 폭력적으로 싸웠다. 현지 주민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그 싸움에 참여했겠지만 애매한 전투경찰들은 이유없이 두들겨맞고 다쳤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징집되어서 간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 행사한 폭력에 부상당하고 상처를 입는 일이 이 정권에 새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정부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전경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시위대도, 반발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전경을 투입해서 다치게 만드는 사람들도 다 싫다.
그 싸움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한나라당뿐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을 찍었다. 열린우리당 사람들 중에 누가 그 시위의 현장에 가서 양쪽을 말리려고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국민이 보기에는 평택에서 싸운 양쪽과 열린우리당은 한뿌리에서 나온 집단이다. 자기네들끼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애꿎은 젊은이들(전투경찰)이 다치고 있는데, 열린우리당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고, 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이 싫었다. 정치능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갖춘 정당이고 국회의원들이면 그런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양쪽을 만나서 서로의 이견을 조정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았어야 한다. 몇날 며칠 밤을 새더라도. 선거일 전에 표 달라고 돌아다닐 때는 밤도 잘 새더니만. 표 구걸하느라고 쪽방동네는 찾아가는 사람이 왜 갈등이 생기는 곳에는 돌림병 걸린 동네 피하듯이 외면하는가? 그것도 자기편끼리 싸우는데. 그러고도 표를 달라고 하다니 정말 염치도 좋다. 정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다. 생뚱맞게 역사를 창조한다고 엉뚱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정책
지방선거 기간 중에 KTX 해고 여승무원들이 강금실 후보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걸 난처하다고 생각한 강금실 후보측 인사가 '왜 여기 와서 농성을 하느냐, 오세훈 후보 사무실에 가라' 고 했다고 한다.
강금실 후보는 거기서 이미 선거에 졌다. KTX의 최고 경영 책임자는 이철 사장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꼬마민주당 출신이며, 대선과정에서 정몽준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할 수 있게끔 만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급 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정치적 인연으로 철도공사 사장에 임명된 것이다.
그런 KTX에서 해고된 여승무원들이 강금실 후보의 사무실을 농성장소로 찾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강금실 후보 측에서는 그들을 쫓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강금실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기존 정치를 비판하고, 평택 시위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도 내놓았다. 그의 정치 행동을 반드시 서울시 행정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KTX 해고 노동자 문제는 자기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서 발을 뺐다. 다른 행동과 일관되지 않는 태도였다.
강금실 후보가 자신이 말하는 것과 같은 정치인이었다면 KTX 를 찾아가서 이철 씨와 담판을 벌였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해고를 철회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내든지, 아니면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논리로 KTX 해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어야 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니고 '나 모르쇠,' 하는 태도에서 서울시민들은 또 한 명의 언행 불일치 정치인을 보았다. 그 다음에 어떤 노력을 해도 지지율이 오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금실 씨뿐만 아니다. 열린우리당 사람들 누구도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놓고 정부와 노동자들이 대결할 때 중간에 나서서 타협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관료들이 마련해 온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 주지 못해서 안절부절할 뿐. 그런 일은 한나라당도 한다. 차라리 날치기라면 한나라당이 더 잘한다. 그러니 열린우리당의 존재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책임지고 물러난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고 앞장서는 사람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지방선거의 피해자가 아니다. 2년이 지나면 대한민국에서 어떤 공직도 다시 맡지 못할 분이고, 본인이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열린우리당이 다음 정권을 맡는 데 대해서도 별로 집착이 없는 분이다. 이번 지방선거에 참패를 해도 자신의 임기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고, 여당 의석에는 변함이 없으니, 자신의 임기 중 유일하게 남은 과제로 생각하는 한미FTA 는 그대로 밀어부칠 수 있다. 한미 FTA 는 한나라당이 더 좋아하는 정책이니 만약 열린우리당이 지지하지 않더라도 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이미 섰다.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국민이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민들이 조중동에 현혹되어서, 아니면 국정홍보가 아직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자신의 '길게 보는'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지금의 정책기조를 밀고 가는 것이 최선의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으로서는 답답하지만 어떻게 말릴 방법이 없다. 누가,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의 그와 같은 생각을 바꾸겠는가?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아니면 그의 생각대로 추진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된다. 왜?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런 노 대통령의 생각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상식과 합리가 통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열심히 노력하면 정당한 댓가를 받고, 노력해서 쌓아올린 부가 올바른 평가를 받고, 비싼 과외를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대학에 자녀가 들어갈 수 있는 교육제도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이 일이 일어나도록 2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2년 후에는 누가 확실히 그렇게 되도록 해줄 것인가?
그래서 국민은 이번 선거에서 여당에게 확실하게 징벌을 가하고도 불안하고 답답하다.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했다고 기뻐하고 좋아하는 국민들은 소수다. 정신차리지 못하는 자식에게 매를 때리고 속이 상해서 울고 있는 것이 지난 선거에서 노무현 씨를 대통령으로 뽑고, 열린우리당에게 국회 과반수 의석을 안겨준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안을 기다린다. 노 대통령은 포기했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도 거의 포기 수준이다. 그렇다고 한국 축구처럼 히딩크를 불러올 수도 없고, 열린우리당이나 민주세력 출신 정치인 중에서 혹시 그런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가 숨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은 한심하다. '혹시?' 했지만, '역시..." 이다. 여당정치인들은 줄을 바꿔서 서고, 짝을 새로 짓는 것으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누구와 짝을 짓고 누구의 줄에 설 것인가 머리 굴리기에 정신이 없다. 책임지고 물러난 사람은 있는데, 책임지고 앞장서는 사람은 없다. 진정한 지도력은 위기상황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열린우리당이 그런 지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보여 주지 못하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출신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은 없다. 지금 아니면 영영 때가 없다. 영어로 'NOW OR NEVER!'다.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심판한 국민들은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을 기대한다. 다음 대통령 선거 이후에 능력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금 당장 능력을 보여주는. 이미 국민들에게 거부당한 정책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노 대통령에게 제동을 걸고, 상식과 합리의 수준에서 모든 정책을 재검토하게 만드는 지도자를.
그는 여당 안에서 나와야 하고, 여당 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다가 자기의 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것을 노대통령이 싫어해서 탈당을 하고 한나라당과 더불어서 남은 임기의 국정을 수행하겠다면 그건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때는 확실하게 야당이 되어서 거대 야당으로서 관료집단의 무분별한 행진을 가로막아서 국민들을 보호하고, 한편으로 다음 대선을 준비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다음 지도자로 책임을 맡고 나서는 사람은 새로운 정치를 보여야 한다. 맨날 정치인들끼리 어울려다니고, 후원자나 만나는 정치, 관료들의 보고에 의존하는 정치를 내던져버리고, 국민들을 직접 만나고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에 대해서 직접 조사하고, 직접 해결책을 내놓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천성산에 직접 가서 정말 지하수가 새는지 살펴보고, 고속철도가 천성산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지 도면도 검토하고 전문가들과 관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는 모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내고, 설명을 해준다.
평택에 가서 농민들을 만나서 그들이 정말 그 땅을 비워줄 수 없는지, 아니면 어떤 조건이 불만족스러워서 이전을 반대하는지 들어보고, 국방부와 현지주민들이 모두 웃으면서 마무리지을 수 있는 대책을 찾아내야 한다.
한미FTA 찬반을 검토할 당내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국민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과 해결책을 내놓는다.
교육문제, 부동산정책, 비정규직 노조문제 등 각종 현안에 대해 정부 관료들이 들고 오는 안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대의견들을 직접 들어서 '상식과 합리'를 바탕으로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고, 필요하다면 이해관련 집단들을 직접 만나서 듣고 이해하고, 때로는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정치이고, 국민이 원하는 정치인이다. 관료들이나 만나고, 끼리끼리 어울려다니면서 운동이나 하고 밥이나 먹지 말고.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서 전화위복을 만드는 능력있는 지도자의 등장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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