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한반도의 현 정세는 과거의 낡은 질서가 사라지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더욱더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예측하기 힘든 성격을 지닌다. 달리 표현한다면, 현재의 정세는 단기적 차원의 규정력뿐만 아니라 장기적 차원의 규정력도 내포하고 있는 전환기적 상황이다.
이처럼 현 국면이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의 장기적·구조적 방향을 결정할 일종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때라면, 국가정책의 목표는 높게 잡지만, 정부의 전략과 행동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목표 자체를 잘게 나누어서 순서를 매기고, 천천히 하나씩 달성해 나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두 가지 사안은 주목할 만하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목표
개성공단사업의 꾸준한 확대, 재일교포사회의 민단과 총련 사이에 이루어진 '역사적' 화해(이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내일(5월 25일)로 예정된 남북간 경의선·동해선 열차시범운행, 6월로 예정되어 있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방북 등은 남북관계가 더디지만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비록 북·미 갈등으로 남북관계의 발전이 제약을 받고 있지만, 남북한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한걸음씩 한걸음씩 관계를 발전시키고 신뢰를 높여나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2차 남북정상회담을 실제적으로 제안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한국 정부 역시 범정부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번 가을이나 겨울에 이루어진다면, 남북관계는 1차 남북정상회담의 경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또 다시 한 단계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기대되는 2차 남북정상회담은 어떤 정책적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한반도 내부의 정치·안보 상황을 개선하고 남북경제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북한이 개혁·개방정책에서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북한의 체제는 안정적인 변화의 과정 속으로 점점 더 들어가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북한 지도부는 통일을 위한 남북의 공동 노력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확실하게 인정받도록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북한과 미국은 양자 간의 갈등관계를 해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현재 예상하는 이러한 전망은 지금까지 몇 차례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대체적으로 대북포용정책이라는 이름 하에 추구해 오던 것이며, 또한 현 정권이 출범을 전후하여 내세웠으나 출범 후에는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병행정책의 기본구도다. (이 부분과 관련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김근식 경남대 교수 <한반도 브리핑 5> 참조. ☞바로가기 )
과도한 목표는 금물…3개 남북합의문 재확인부터
만일 2차 남북정상회담의 목표가 이렇게 설정된다면, 몇 가지 고려사항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온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 기본 정세, 특히 북·미 갈등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큰 성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추구하는 세계전략의 기본틀이 북·미 갈등을 포함한 한반도 정세의 기본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 주도로 한반도 정세를 급격하게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성과 없는 대가만을 남한에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달성된 남북관계 발전의 성과를 확인하고, 남북한의 역량과 공동 노력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범위 내에서 남북관계, 특히 남북경협을 발전시키는 구상이나 계획에 합의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성공단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도 미국을 포함한 세계사회에 메시지를 던진다는 차원에서 유력하게 고려해 보아야 하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할 합의문은 7·4공동성명(1972년),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 6·15공동선언(2000년)의 기본 정신과 내용을 이어받아 발전시켜야 한다. 남한 사회의 세 개의 정권과 북한 사회의 두 개의 정권을 거치면서 채택된 3개의 남북합의문이 명확하게 거명되면서 재확인된다면, 남북한 모두에서 소위 '민족적/국민적 합의 수준'은 매우 올라갈 것이다. 특히 통일원칙·방안에 대한 기존 합의들은 적절한 방식으로 다시 표현되어야 하며, 화해·불가침·교류협력의 약속도 재천명되어야 한다. 작년 9월의 4차 6자회담에서 관련국들 사이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남북한이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와 관련하여 적절한 합의를 이루어낸다면 매우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아마도 현재의 판단으로 가장 가능성이 크고 그럴듯한 방안은 1991년 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담긴 화해와 불가침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남북정상의 관심을 표명하는 형태다. 이를 '한반도 평화선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한반도 평화통일이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되돌아본다면, 2차 남북정상회담은 아마도 10여 차례 있었던 남북정상회담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는 정상회담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회담의 내용이나 합의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어려운 대외환경 속에서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남북한이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계기를 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 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또한 2차 남북정상회담이 답방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화통일과 관련한 남한 사회(정부와 시민사회 모두)의 역량이 이 시기부터 한 단계 상승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미래에서 바라보는 이러한 평가가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대추리 사태'로 도전받는 '국가안보제일주의'
최근 주목받아야 할 다른 하나의 사안은 평택 지역에서 미군기지 확장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부와 국민 사이의 갈등 사태다. 지난 5월 4일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미군기지 이전예정지로 결정한 대추리 주변의 농토를 장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군·경과 주민·시위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다. 그 뒤 대규모 폭력적 충돌은 더 발생하지 않았으나, '대추리 사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대추리 사태'는 주한미군의 재배치 및 기지이전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 중의 하나이지만(이와 관련해서는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인터넷자료실(www.peoplepower21.org) 및 평화전문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www.peacemaking.co.kr) 참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중의 제23조에서 모든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하고 있다(1항). 하지만 우리 헌법은 재산권의 한계도 규정한다.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 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23조 3항)." 아울러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도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될 수 있다(37조 2항). (물론 같은 항목에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구절이 함께 있지만, 무엇이 '본질적 내용'에 해당하는지는 참으로 알기 어렵다.)
헌법에 꼭 근거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까지 '국가안보'는 우리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로서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면서, 재산권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안보제일주의가 이번 '대추리 사태'에서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평화권의 이름으로, 생존권의 이름으로.
사실 우리 헌법은 이 점에서도 그다지 인색하지 않다(5조, 10조, 14조, 16조, 35조). '국가안보'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는 앞으로 정부가 안보영역에서도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또한 평화의 관점에 기초한 새로운 안보관(인간안보)이 전통적인 안보관에 도전할 것임을 보여준다(이와 관련해서는 참여연대와 <한겨레 21>이 실시한 <주한미군 관련 현안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 참조. ☞관련기사 바로가기)
전통적인 안보관에 대한 도전은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한 평택지역 미군기지 확장·이전이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논의는 <한반도 브리핑 좌담> 참조. ☞바로가기). 평화의 전략과 통일의 전략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일의 통일은 하나의 교훈이다. 서독이 지켜 왔던 전쟁과 학살에 대한 반성과 지역협력 및 협력안보의 추구는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와 반대를 불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잔존할 것을 미국에 약속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통일에 대한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석을 피하도록 요구한다.
과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직도 동북아 차원의 지역협력이나 협력안보가 실현가능한 정책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 평화·통일과 한미동맹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
독일의 평화전략-통일전략 연계…한반도의 경우는?
이미 많은 전문적인 논의들이 존재하지만, 논지 전개를 위해 독일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차이점만 간단히 언급해 보자. NATO는 다자간 지역안보협력체이지만 한미동맹은 쌍무적 안보협력체다. 독일 통일 당시 유럽에는 헬싱키선언에 기초해서 전유럽의 협력안보를 지향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존재했지만, 동북아에는 미국-일본-한국과 중국-러시아-북한 사이에 잠재적 갈등구도가 유지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당시 군축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동북아에서는 현재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더욱이 동북아에서 유지되고 있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의 세력불균형은 중장기적으로 세력균형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한미동맹을 유지·강화하는 것과 서독이 통일 당시 취했던 전략적 선택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독일 통일의 경험은 한국이 양자동맹을 벗어나 지역 차원의 안보협력체를 모색하고 또한 동북아 지역차원에서 군축을 실현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평택의 대추리는 국가안보제일주의에 저항하는 평화권·생존권 운동과 한미동맹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안보·통일정책이 미군기지 이전·확장을 계기로 충돌한 지점이다. 이러한 충돌 속에는 '반미자주투쟁'을 한민족의 생존과 통일을 위한 기본 노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전통적인 통일운동도 큰 흐름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대추리 사태'와 그를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주파와 동맹파 사이의 대립만을 본다면, 이는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대추리 사태'는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시점에서 인권·평화운동이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를, 나아가 인권·평화운동이 어떻게 통일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지 또는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북한의 핵문제, 인권문제를 생각하면 결코 쉬운 답변을 얻지 못할 것 같다. 아마도 남북관계의 발전과 인권·평화운동의 확산만이 우리의 영혼을 구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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