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기사 : "곽노현을 업고 사법 개혁으로 가자", "곽노현 항소심 판결문에는 논리가 없다", "곽노현을 살려야 한국의 정의가 살아난다")
요약하자면, ① 검찰이 법의 잣대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다. ② 공직선거법의 모호한 조문이 검찰의 무리한 법 적용의 빌미를 제공하므로 위헌으로 판시되어야 한다. ③ 사전 합의가 있었는지 여부를 분별하지 않고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범죄 구성 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유죄를 선고한 셈과 같다. ④ 검찰은 피의 사실을 보수 언론에 흘려서 여론 재판을 시도했고, 자칭 '진보 논객'들이 부화뇌동했다. ⑤ 한국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은 이 사건에 힘과 관심을 모아 사법 개혁의 동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법학자 조국은 이 사건에 관해 상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초기에 적극적으로 발언했던 데 비해 정작 1심 재판 이후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 다음에 침묵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국은 초기에 선의건 뭐건 곽노현은 돈을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오세훈의 사퇴가 가져다준 환호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보 인사의 조그만 잘못을 침소봉대하는 검찰과 보수 언론의 여론 조작에 관해 감수성을 드러냈고, 그러면서도 다시 "표적 수사를 비판하기 전에 내부를 돌아봐야 한다. 이번 사건은 진보 진영 후보 누구든지 인정과 상황 논리 때문에 추후 폭탄으로 터질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에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나는 조국을 개인적으로 모르지만, 대충 외견상으로 형법 및 형사 정책 등을 전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파고 들어가 확정하는 팩트 파인더의 역할을 수행할 만한 자격과 그렇게 확정된 실체적 진실에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를 판정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에게 재판관으로서 공적 임무는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확정해서 판결을 내릴 법률적 의무도 권한도 없다. 그렇지만 초기에, 다시 말해 자세한 사정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나서서 발언하던 태도에 비춰보면, 나중에 자세한 사정이 훨씬 많이 알려진 다음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초기에 그가 나서서 발언한 동기는 아마도 지식인의 정치적, 사회적 의무감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나는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무를 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가 비록 나와는 입장이 달랐지만 그의 발언 자체는 중요한 사회적 기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식인으로서 그의 의무감이 왜 중도에 사그라졌는지 의아하다.
형법을 전공하지 않고, 가령 핵물리학을 전공하는 지식인이었어도 이 사건 초기에 자신의 견해를 공표하는 것 자체는 건강한 공론 형성에 이바지하는 일이다. 다만, 어떤 핵물리학자가 사건 초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견을 공표했다고 한다면, 그 후에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처음에 공표했던 입장을 계속 고수하는지, 아니면 입장이 바뀌었는지까지도 공표하는 편이 지식인의 의무에 충실한 경로일 것이다. 하물며, 법학 교수 중에서도 형법을 전공하는 사람이 이 경로를 추구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한 것은 실망스럽다.
▲ "법학자 조국은 곽노현 사건에 관해 상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뉴시스 |
곽노현 사건과 관련된 조국의 반응을 하나의 사례로 객관화해서 보면, 한국 사회 담론의 질서가 어떤 상태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를 얻을 수 있다. 말한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해야 할 의무(accountability)라고 하는 척도이다. 자기가 한 말이 구체적인 사안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밝혀 말하고, 나아가 반론이 제기되었을 때 어떻게 물리칠 것인지 이유를 해명할 의무를 가리킨다. 이는 수용자 측의 입장에서 보면 해명 받을 권리에 해당한다. 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11년 1월 7일)에 기고한 기사에서 이를 일반적으로 논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한국, 고장난 대의 민주주의")
해명의 의무를 제멋대로 회피하고, 인민의 해명 받을 권리를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화법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전가의 보도로 삼았던 무기였다. 오늘날 박근혜의 언설들이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언어인 까닭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생각에 5·16을 당시로썬 불가피했던 최선의 선택으로 여길 자유는 누구나 누려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마한 사람이 5·16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으로 여긴다고 말을 했다면, 헌법 전문에서 5·16이 삭제된 의미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해명해야 한다. '5·16 혁명'은 1962년 박정희가 만든 헌법에서부터 3·1 운동 및 '4·19 의거'와 함께 전문에 들어가 있었는데, 1980년 전두환이 만든 헌법에서부터는 삭제된 상태이다. 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 헌법은 '4·19 민주 이념'만을 계승한다고 명시할 뿐, '5·16 혁명'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보면, 현행 헌법의 정신이 5·16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헌법을 준수하기로 서약하는 것으로 직무를 시작하는 대통령을 해보겠다는 사람이 이러한 헌법의 의미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밝혀야 할 의무가 당연히 있는 것인데, 박근혜는 이를 따지는 질문들을 쓸데없는 과거사 논쟁이라거나 "정략적 공세"라는 식으로 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박근혜는 '해명의 의무'를 무시하는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박근혜는 해명의 의무를 체계적으로 묵살하는 부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가끔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해명의 의무를 묵시하는 사람들의 수는 한국 사회의 지식인 가운데 매우 많다. 이명박을 위시해서 이한구, 황우여, 김황식, 권재진, 신영철, 김재철, 안병직, 이영훈, 박효종 따위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풍토는 절대 덜하지 않다. 위에 조국의 사례를 적시해서 거론한 까닭은 바로 이야말로 조국 자신이 언급한 바 있는 "내부를 돌아봐야 할" 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른바 '시대정신'의 하나라고 너도나도 입에 담는 "경제 민주화"라는 유행어와 관련해서도 해명의 의무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서양에 없다"고 불평한 이한구는 그 말로써 스스로 천박한 독서량 수준을 자백한 셈이지만, 경제 민주화를 입에 담는 사람들이 구체적인 내용을 해명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만은 진실이다.
자칭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경제 민주화"라는 표어만을 답습할 뿐, 구체적인 내용을 공표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지금 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 있게 공표할 만한 의견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견이 아직도 정립되어 있지 못하는 까닭은, "경제 민주화"라는 표어에 덩달아 휩쓸리는 순간부터 해명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충분히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에게 해명의 의무를 엄격하게 지우지 않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 풍토가 원인을 제공한 면은 분명히 있다. 선생, 부모, 상관, 정부, 교단이 말하는 게 옳아서 배워야 하는지 아니면 선생, 부모, 상관, 정부, 교단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다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뒤섞어버리는 사회화 과정 전반이 병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이 병을 고치지 않고는 한국 사회의 정치를 질적으로 개선할 길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 병은 권력으로 고칠 수는 없고, 권력을 고치는 만큼만 치유되는 병이다. 아울러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한, 권력의 속성을 완벽하게 무력화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병을 고치고자 할 때에는, 어떤 사안의 진실이 권력에 의해 은폐되거나 재단되는 모든 경우를 완벽하게 차단하려 들어서는 안 되고, 그런 빈도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경제 민주화를 떠드는 담론에서 이 측면이 간과되는 것이 그래서 걱정스럽다. 경제 민주화 담론은 미국에서 예컨대 로버트 달과 같은 정치학자들이 주도하는 담론이다. 경제학과에 몸담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따라서 존 스튜어트 밀,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존 롤스, 아마르티아 센처럼, 경제를 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경제 민주화를 말한다. 이들은 정치철학자, 사회철학자, 정치경제학자,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미시 경제학에만 파묻혀 편협하게 공부한 이한구류가 이 단어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는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경제 민주화 담론은 미시 경제학 수준보다도 더 편협하게, '먹고사니즘'에 직접 영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먹고사니즘'에 직접 영합하겠다는 식의 대책은 스스로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기대치만 잔뜩 높여 놓을 뿐, 성과의 측면에서는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날 위험이 대단히 크다.
경제 민주화 담론은 소득의 배분 문제를 다루되, 그것만을 다루는 데 국한되면 안 된다. 소득 배분 문제와 함께 권력의 배분 문제를 함께 다뤄야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 노동자와 경영진 사이에 이익 배분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질 때,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서 지도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과부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에서 강자의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협상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일차적인 통로는 사법 개혁과 국회 개혁이다.
김진숙, 쌍용자동차 노동자, 용산 세입자, 전북고속 노동자들이 저토록 처절하게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할 때,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진상을 확인하는 기능이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야 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재판정을 비롯한 사법 기관의 책무인데, 한국의 사법 기관은 곽노현 사건에서 보듯이 진상을 묵살하고 권력에 굴복하는 빈도가 대단히 높다. 그러므로 경찰, 검찰, 그리고 법원이 자신의 발언과 행태에 관해 해명해야 할 의무가 더욱 엄격하게 부과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은 국회가 진상을 확인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법제를 개정해야 한다. 국회의 청문회나 국정 조사가 무슨 진상을 밝혔느냐는 회의론은 제도상의 결함을 보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국정 조사의 발동 요건을 가령 재적 의원 3분의 1 정도로 완화하고,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기한을 정하지 않고 시작해야 국회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열리는 것이다.
기한을 정하지 않고 시작해도 국회에서 진상이 낱낱이 밝혀질 수 있을지는 해봐야 알 일이다. 인간의 인지 능력은 원래 여러 방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안이 무엇이든 그 진상을 확보하리라는 보장 같은 것은 본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국회에서 소수파가 국정 조사의 시동을 걸 수 있고, 일단 시동이 걸리면 무한정 시비가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사회의 구석구석에 숨어서 기생하는 권력들은 지금보다 훨씬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여차하면 국회에 불려가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하는 처지로 몰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곽노현에 대해 대법원이 내놓을 판결문을 나는 꼼꼼히 읽고 궁금한 점에 관해 해명을 요구할 작정이다. 이 나라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경제 민주화를 입에 담는 소위 '경제 전문가'들도, 이 문제가 '먹고사니즘'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 질서의 근간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깊게 깨달아 종합적인 대책을 강구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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