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로널드 드위킨 지음, 홍한별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파란 문화(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을 뜻함)는 '세련됨'을 추구하고, '수입 와인 취향'을 가지고 있고, '글자 많은 신문'을 읽고, '종교적 신념이 있더라도 철학적이고 약화되고 보편적인 모습'을 보인다. 붉은 문화(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을 뜻함)는 '투박한 진실성'을 추구하고, '맥주'를 마시고, '텔레비전에서 카 레이싱'을 보고, '종교는 단순하고 복음주의적이고 전투적인 편'을 좋아한다. 이것이 '국가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두 시대정신 사이의 깊고도 진정한 분열'을 드러내는 것이든 '놀라울 정도로 잘 먹히는 정치적 발명품에 불과'하든 정치적 양극화와 두 문화의 출현은 '정치적 생명을 가진 이론임에 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정도의 분석은 있을 만한데….)
미국의 한 학자(아놀드 A. 로고우)의 "정신병학과 정치학"이란 좀 오래된 논문을 보니 미국 극우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의 멤버들이, 고도의 불안, 낮은 자기 평가, 신성함에 대한 강한 희구, 사회질서에 대한 적대적·염세적인 지향에 의해 침식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경우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하나의 세계', 메디케어(노인건강보호제도), 비트족들 등등의 말들에 노하여 흥분한다고 한다.
만약에 권위주의적임과 동시에 리버럴하다면, 자본주의, 월가(街), CIA, 군산복합체,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 대공황 시기에 제31대 미국 대통령(1929~1933)이 됐다. 사람들은 당시 "후버! 후버가 다 망쳐놓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다음 선거에서 뉴딜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됐다: 편집자), 에드가 후버(FBI 국장), 가톨릭의 위계질서 등등의 말들에 분격한다고 분석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 사회에서는 대개 정치 사상적 성향을 '보수적', '리버럴'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의 관행이다. 물론 아주 최근에 보니 "법원을 지배하는 libs(리버럴들)와 Commu-Nazis(공산·나치들)"이란 표현도 <타임> 잡지 칼럼에 인용되기는 한다. 몇십 년을 보아왔지만 그런 표현은 드문 경우이다.
한국도 과거에는 '보수적', '혁신적'으로 나누어 말하고, 정당을 분류함에 있어서도 보수정당, 혁신정당이라고만 하였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그러한 정치 색깔의 구분에 점차 독기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수구꼴통, 좌빨 운운의 준(準) 깡패식 용어가 되기까지 하였다.
그 전 단계에는 보수 쪽을 '수구'라고, 혁신 쪽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보수가 수구가 되고, 수구가 수구 꼴통이 되었으며, 혁신이 좌파가 되고, 좌파가 좌빨, 종북좌파가 되었다. (좌파란 용어는 서양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으나, 한국에서는 해방 후 좌우익 투쟁이란 역사성을 갖고 있어 특이한 함축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혼란스럽다. 점잖지 못한 표현인 것 같다. 혹시라도 전자 매체들의 급하고, 축소적이며, 사고가 건너 뛰어넘어가는, 그런 상황이 언어의 난폭화를 조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의 성급함과 함께.
거듭,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이라는 시기는 약간 애매한데 우선 김대중정권 이전이라고 해둬도 괜찮겠다. 그 시기에도 처참한 6.25 한국전쟁의 경험은 살아 있었고, 북한에서 고통을 당하고 피난 온 이른바 이북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냥 보수고, 혁신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담담한 표현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둘 것은, 당시의 경험으로 볼 때, 대구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 전국에서 가장 혁신세력이 강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보수보다 혁신이 강했다는 것은 아니고 혁신의 분포를 볼 때의 이야기다. (대개 모든 사회에서 보수는 기존 세력이니 다수파이고, 혁신은 도전 세력이니 소수파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4.19 혁명 직후 대구에서 최석채(나중에 <조선일보> 주필), 김수한(나중에 국회의장), 양호민(서울대 법대 교수) 씨 등 당대의 인물들이 혁신계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에 출마했었다.(결과는 모두 낙선) 지금 이른바 TK라고 하며 새누리당의 철옹성 같은 보루로서 보수성이 가장 강한 곳으로 치부되는 점과 견주어 생각해볼 때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정치색깔을 말하는 어휘가 오래전부터 독기를 더해가며 극렬화 되고 있고, 때로는 혼란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 분야의 엄밀한 개념 규정을 위한 노력이 그동안 별로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더구나 그러한 성향들의 사회적 배경, 인맥의 분석이나 분류 작업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문제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에서 악화되었다 하겠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박정희 씨(뒤이은 전두환·노태우)와 김대중 씨의 치열한 경합 때문이 크다. 모두 아는 이야기다.
역사적 분석에는 토지소유형태가 관련된다. 내가 아는 사람에 한정하여 보면, 영남에서는 경주 최부자집이 1만 석 지주로 가장 뚜렷하다. 그리고 경북에서 1천석을 했다는 집안 출신의 언론인(현소환 씨)이 있다. 그밖에 지주 이야기는 못 들었다. 영남에는 대지주가 아주 드물었고 대부분이 자영농들이었다.
반면에 호남에는 대지주가 많고, 따라서 소작인들이 무수히 깔려 있었다. 대부분이 소작인이라고 보면 된다.
언론인 가운데 전남의 4만 석(호왈(號曰) 백만대군 같은 동양적 과장법도 있는 것 같다) 집안 출신(지갑종 씨)이 있고, 전북의 2만 석 집안(정인량 씨)이 있을 정도다. (흥미로운 것은 전북의 경우 대원군의 비서인 분이 조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기다리고 있을테요, 그 찬란한 슬픔의 봄을"으로 기억되는 김영랑 시인의 생가를 전남 강진으로 가 보았더니 그 집안은 눈어림으로 1천석쯤의 지주였던 것 같다. 영랑은 시인답지 않게 한민당계로 2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곁가지 이야기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강서·양천 지방(전에는 김포군)에서는 김도연 씨네 집안이 엄청난 대지주였다 한다. 김포공항 뒤쪽까지 요처 요처에 마름들이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여세가 남아 있다. 서울 강서구 염창동 증미(지하철 9호선에 증미역이 있다)에 살던 김도연 씨의 할아버지가 대홍수 때 한강에서 파선한 배에서 엽전을 일확천금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돈으로 대지주가 되고 손자를 미국 유학시켰다는 것. 김도연 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내각에 한민당(한국민주당, 8.15광복 후 우익 인사들이 결성한 대표적인 보수 정당: 편집자)으로는 유일하게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
앞서 말한 자영농들과 소작인들의 (인류학적인) 문화가 다르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자영농 쪽은 비교적 독립심이 강하고 보수적이다. 소작인 쪽은 반항적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개혁성을 띠었다. (이것은 순천 출신 언론인 조덕송 씨의 해석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사회적 존재양식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견해가 통계적으로는 반박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위에 설명한 요인에 더하여 박정희 정권 이래 영남에 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찬 일이 추가된다. 호남의 상대적 낙후는 계속된다. 인재등용의 편중도 겹치고. 영남과 호남을 구별한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판단하면 과오를 범하기 쉽다. 적은 수이지만 영남 출신에 진보적인 사람도 있고, 호남 출신에 보수적인 인사도 있다. 각각의 가정적 배경 등이 특히 중요한 것 같다.
영호남 말고 큰 집단이 이른바 이북사람이다. 북에서의 피난민과 그 2세들이다. 영어에 upper cream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들은 대개가 피난 오기 전 이북에서 중류·상류에 속했던 upper cream이다. 그리고 이들은 거의가 쓰라렸던 체험으로 인하여 대단히 보수적이 되었다.
내가 자라난 충북의 친구들은 온통 보수 일색이다. 남에게 설명할 때는 얼마간 민망스럽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밖에 기독교 개신교 세력이 있다. 대개가 보수적이다. 개신교에서도 기독교장로회(기장)측은 개혁적인 인사가 많다는 느낌이다. 지역적으로도 함경도 출신이 두드러지는 차별성을 보인다.
근래에 와서 영남 보수 대세에 균열이 생겨났다고 언론들이 분석하고 있다. 영남이 TK와 PK로 나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분열이란 표현은 부적절하고, 약간의 차별화 정도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PK지방의 공장지대에 호남 인구가 유입되었음을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정치 색깔의 분화·분열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의식화가 덜 되어 비교적 둔감했던 때의 이야기다. 60년대 후반쯤일 것이다. 서울대의 이용희 교수는 정치학(주로 국제정치) 교수이면서 한국 미술사에도 일가를 이룬 수준 높은 지성인이다. 그가 리버럴이 무어냐를 두고 장시간 담론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역시 매우 세련된 학자이기에, 그것은 약간 빙빙 돌려 말하는 꽈배기 습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기에, 그는 멋 부리는 결론을 내렸다.
"리버럴이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어쩌면 커피 맛을 제대로 잘 안다는 것 정도라 할까."
미국에서는 요즘 같으면 정치·경제적으로 네오·케인즈 경제정책을 따르는 측을 리버럴이라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운찬 전 총리가 대표적인 네오·케인지언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 간단하다.
우파, 좌파의 분류는 까다롭다. 그런 그렇다 치고, 다만 표현만큼은 좀 온건화 되었으면 한다. 실상이 그렇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만큼의 극우도 극좌도 아니다. 수구꼴통도 좌빨도 아니다.
물론 가짜도 있다. 출세를 위하거나 직업으로서의 우파도 있고, 팔푼이 좌파, 어릿광대 좌파도 있다.
따지고 보면 사회는, 정치는 그러한 의견의 대립에서, 그 대립에 바탕한 경쟁이나 투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 아닌가. 좋은 이견(異見), 좋은 대립으로 보는 관용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