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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잃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평택의 봄] 대추리 사람들은 왜 떠나지 못하는가

불어오는 봄바람에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고 3월을 맞은 대추리의 땅은 무척 보드랍다. 흙덩이 사이에 박혀 있던 얼음이 녹아내려 흙은 촉촉하고 논두렁에는 벌써부터 파란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군화와 구두가 아닌 장화와 운동화를 신고 이 땅을 밟아본 이라면 이제 이 땅이 농사 지을 채비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땅에 대해 하나 모르는 무식쟁이도 온 들판에 가득한 봄내음을 느끼는데, 이곳에서 몇십 년 농사를 지어 온 농부들은 얼마나 애가 탈까.

***"평택쌀 알아주잖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2리에 사는 한승철 씨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땅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지금 평택 시민이 38만 명인데, 여기 대추리, 도두리서 나는 쌀이면 이 사람들을 7개월 간 먹일 수 있어. 쌀은 또 오죽 좋은가. 평택쌀 알아주잖아. 밥맛이 좋거든."

한 씨에 따르면 전국에서 대추리, 도두리만큼 농사기반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도 없다. 기후조건 역시 농사에 알맞아 흉년이 잘 들지 않는 지역이기도 하다.

보통 땅을 일컬어 어머니와 같다고 하지만, 한 씨에게 이 땅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자식과 같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광활한 간석지였던 이 땅에 대추리 주민들은 일제시대부터 뚝방을 쌓고 갯벌에 흙을 부어 소금기를 빼냈다. 지금처럼 이름난 평택쌀을 내기까지, 다시 말해 "다른 동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옥토가 되기까지 많은 이들이 이 땅에서 피땀을 흘렸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 씨는 말했다. "정부가 무식해서 그래. 이제까지 이 땅이 어떻게 만들어진지도 모르고 한번 와서 쓱 보고 평평한 게 좋다 싶으니 덜컥 미군한테 줘버리고. 우리들이 없었으면 있지도 않았을 땅인데."

***집을 잃어버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제 땅이 있었다면 굳이 소금에 온 몸을 절여가며 이 땅을 개간했을까. 1952년 오늘의 K-6 미군기지터에 살던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미군들에 의해 쫓겨났다. 미군들은 주민들이 짐을 꾸릴 시간도 주지 않고 집을 불도저로 밀어 붙이며 쫓아냈다.

당시 대추리는 미군들이 빼앗아간 곳 외에는 모두 갯벌이었고, 주민들은 농사지을 땅과 집 지을 터가 필요했다. 이들은 미군이 준 약간의 목재와 한 가마의 보리쌀을 들고 대추리와 함정리 사이의 황새울들과 아직도 갯벌 상태로 남아 있던 흑무개들의 개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땅도 주민들의 것이 되어주지 못했다. 땅 주인이라는 이들이 나타나서 소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간기(소금기) 우려내려고 고생만 죽도록 하고, 그럭저럭 논 만들어 놓고는 얼마 농사 지어 먹지도 못하고 재판질 하다 끝내고 그냥 뺐긴 거지 뭐." 17일 궂은 비가 내리는 날에도 대추초등학교 정문을 지키던 한 주민의 푸념이다.

그래서 대추리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땅과 농사에 생존을 걸고 있지 않은 땅주인들은 국방부가 협의매수에 나서자 덜컥 땅을 팔아버렸다.

한승철 씨는 "집을 잃어버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설령 보상금을 받아 나간다고 해도 거의 모든 이들이 예전만큼 살지 못하기 마련이고, 돈만 주면 끝인가?"라고 반문했다.

***"주민들의 3분의 1이 거지가 될 판"**

1973년에는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됐다. 방조제 건설로 만들어진 농지에 전국 각지의 빈농들이 몰려들었고, 도두2리는 이 시기에 형성됐다. 이들도 대추리 사람들처럼 소금기 가득한 논에 흙을 부어 간기를 우려냈다. 하지만 이들이 집을 지은 땅은 세종대학교 재단인 대양학원의 것이었고, 주민들은 재단과 40년 간 토지소유권 분쟁을 벌였다.

그러나 재작년 12월 법원은 대양학원의 손을 들어줬고, 대양학원은 미군시설 부지로 편입되는 농지에 대해 보상가의 20%를 '농지간척 및 개량에 대한 변상'의 의미로 농민들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토지 보상가의 20%'를 받고 쫓겨나는 것도 용납 못 할 일이지만, 이마저도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한승철 씨에 따르면 도두리 70가구 가운데 자기 땅이 한 평도 없는 집이 26가구다. 300여 가구가 사는 대추리에도 30가구 정도가 같은 처지라고 한다. 이들은 집터마저도 자기 땅이 아니라서 한 푼 보상도 못 받고 쫓겨날 판이다.

***보상금 받아 부채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대추리 사람들 왜 그러나 모르겠네. 나라에서 땅 보상 해주면 갑부 되는 거 아닌가? 돈도 받고 땅도 갖겠다는 심보여?"

대추초등학교로 기자를 실어다 준 한 택시기사의 질문이다. 그러나 이곳에 땅을 갖고 있던 이들이라고 해도 결코 속 편히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추리는 평당 8만 원 정도 보상되는데 이 보상액은 시가를 참조해 감정에 의해서 책정했고, 인근이 계혹 폭등한다고 해서 이를 보상가에 적용하기란 불가능하다. 보상에 따르는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미군기지에 수용될 토지의 주민들이 이 보상금을 받아 부채를 상환하면 대부분 남는 게 없다는 점이다."(2004.4.8. 국방부 및 국무총리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 3차 간담회 내용 중)

한국의 대다수의 농촌이 그렇듯 대추리 주민들도 농가부채에 시달린다. 주민 대부분이 땅에 근저당을 잡히고 농기계를 사들이고 자식들 결혼을 시켰다. 열심히 일을 해 수년 간 갚아나갈 계획으로 빚을 지는 것인데 지금 땅이 수용된다면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대부분 칠팔십대 고령자인 주민들이 어디 가서 취업을 하기도 막막하다. 보상금이 남는다 해도 주변 땅값이 모두 올라 경기도 내에서는 다시 농사 지으러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이대로 여기서 죽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땅은 얼른 씨를 뿌려 달라는데…**

대추리는 이제 논갈이 기간이다. 전국의 농민들이 올라와 트랙터로 이들의 논을 갈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대추리 길목마다 경찰을 배치해 다른 곳에서 온 트랙터는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추리, 도두리의 너른 들은 아직도 외형상으로는 겨울 모습 그대로다.

지금 땅 밑의 생명들은 봄을 맞아 환희의 노래를 부르려 아우성인데 이 새 봄의 뭇 생명들을 보듬어 줄 수 없는 농부들의 마음은 타들어가기만 한다. 이 '평화의 투사'들의 눈가에 핏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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