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부 장관의 5일(현지시간) 발언은 미국이 북한의 위조 달러 제작·유통 문제에 대해 물러설 용의가 조금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이날 "북한의 불법행동들에 대한 우리의 제재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그런 행동을 수수방관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위조 달러의 유통과 돈세탁과 관련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취해진 금융 제제가 최고 정책결정자인 부시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미국은 그간 주로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와 국무부·재무부 당국자들의 입을 통해 북한의 위폐 의혹을 제기해왔다. 그러나 최고 외교 책임자의 입을 통해, 그것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 문제에 대해 북한이 해명하거나 시인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힐 차관보, 6자회담 1월 개최 불가 시사**
이렇게 되면 우선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6자회담이다. 북한이 위폐 문제를 '회담을 깨버리는 기본 요인'으로 규정하고 이 문제가 계속되는 한 6자회담 테이블에 나올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이같은 입장이 가장 최근 드러났던 지난 3일자 〈로동신문〉에서는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조치가 6자회담의 진전과 9.19공동성명 이행에 장애를 조성하는 행위"라고 못박고 미국의 제재를 받으면서까지 6자회담을 지속할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한은 위폐 문제가 계속되는 한 6자회담은 물론이고 회담과 관련한 어떤 접촉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해왔다. 지난해 말 우리 정부에 의해 제안됐다고 알려진 6자회담 수석대표들의 비공식 접촉은 그래서 무산됐다.
미국도 6자회담 재개가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이며 그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날 6자회담이 "어려운 국면"에 빠졌다며 "북한이 협상에 복귀하지 않기 위한 이유를 열심히 찾고 있어 인내가 조금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이 6자회담 재개조건으로 금융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는데 대해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면서 "미국 사법당국이 불법계좌를 동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해 이 문제에서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6자회담이 이처럼 가시권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북핵 문제 해결의 모멘텀을 이어가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희망도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 공동성명 문구의 모호한 부분을 분명히 하고 성명 이행의 원칙과 순서, 방법을 논의해야 하는 등 과제가 산적한 6자회담이 탄력을 잃는다면 북핵 문제라는 큰 산을 넘는 발걸음은 또다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위폐 문제, 결국 '진실게임'으로 가나**
우리 정부는 위폐에 대한 '사실(fact)' 확립이 우선이라는 입장으로 북한과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만 난무하는 '진실게임'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고농축우라늄(HEU) 존재 여부에 대한 북미간의 공방이 지난해 2월 북한의 핵보유 선어까지 이어졌던 전례로 보아 진실게임이 가져올 파국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BDA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는 마카오 당국의 최종 조사 결과 발표가 문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마카오 당국이 아무리 철저히 조사한다 하더라도 위폐 유통 사실 정도나 알 수 있을 뿐 북한이 위폐를 직접 만들었다는 증거를 내놓을 수는 없어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더군다나 미 국무부가 북한의 위폐와 관련한 설명회를 가진 데 이어 미 재무부가 이달 22일 경 금융범죄 단속반 관계자들을 한국에 파견해 의견을 조율키로 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해 부시 행정부 전체가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운신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허문영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그동안은 부시 행정부 내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만 대북 강경책을 주장했는데 위폐 문제가 나오니까 국제관계에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무역 등을 중시했던 세력들까지도 '대화는 무슨 대화냐'고 밀어붙이는 상황"이라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근본 문제는 '범죄 정권'이라는 대북 인식"**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위폐 문제를 어떤 식으로 건 봉합하고 6자회담의 재개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중국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북미 양국 모두 이 문제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철회할 수 없어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인데, BDA를 조사하는 마카오 당국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중국이 나서야 한다"며 "위폐 유통이 있었다고 해도 북한 정권 차원에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이 다소간의 책임을 지고 미국이 양해하는 선에서 제재를 풀도록 하는 역할을 중국이 해야 하고 우리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최근 심양에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만났다는 얘기가 있다"며 "김계관 부상도 '우리가 책임질 건 책임지겠다'는 입장이었다고 하니 중국이 이를 중재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기존의 '북미 양자 해결' 원칙을 버리고 중국을 또 하나의 해결 주체로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 우리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지난달 28일 "위폐 문제는 북한과 미국, 중국 3자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폐 문제가 결국 해결된다 하더라도 '북한은 범죄 정권'이라는 버시바우 대사의 말처럼 북한을 범죄 집단시하는 미국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북핵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요원할 것이라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위폐 외에 마약 밀매, 무기 거래 등 미국이 '벼르고' 있는 문제들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존 페퍼는 최근 〈프레시안〉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미국이 정상적인 경제 체제로서 기능하는 북한을 원한다면 우선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대해야 한다"며 "미국이 북한을 정상적인 경제 체제로 여기고 북한 생산물에 대해 시장을 개방한다면 불법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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