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언론들은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마저 시위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며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1500여 명의 한국인 원정시위단이 지난 17일 홍콩에서 벌인 격렬한 시위를 다시 한번 비난했다.
이들 언론은 "농민들이 기어이 홍콩에서 '한국형 시위'를 벌임에 따라 우려가 현실화됐다"며 "농민 어렵다는 건 다 알지만 시민들의 공감 여부는 그 분노의 표현방식에 따라 다르다. 농민들은 삼보일배로 쌓은 좋은 이미지와 스스로의 정당성을 마지막 폭력시위로 날려버린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한국 농민들이 '폭도'로 낙인찍힘으로써 나라를 망신시켰다는 힐난이 들어 있는 보도였다.
***과연 사태의 본질이 '표현방식'에 있는가?**
그러나 "삼보일배는 괜찮고 폭력시위는 안 된다", "얌전하게 시위를 하면 시민들이 지지하고, 격렬하게 시위를 하면 시민들이 등을 돌린다"는 투의 이분법이 과연 홍콩 사태의 핵심을 말해주는 본질일까?
홍콩 현지에서 '반세계화 시위대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반응'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기자로서는 '표현방식'만 가지고 시위 전체를 평가하는 접근은 매우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이번 충돌은 1999년 시애틀 각료회의에 비해 훨씬 분노가 덜했고, 시위도 덜 폭력적이었다"는〈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의 보도와 "홍콩 시위는 1999년 시애틀 시위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는데 구속자는 1999년의 500여 명보다 훨씬 많은 900여 명이다. 시위에 대한 홍콩 당국의 대응에 의문이 제기된다"는〈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는 국내 언론의 반응과 사뭇 다르다. 그리고 홍콩 시민들이 오히려 한국 언론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시위대의 메시지를 수용했다.
물론 해상시위, 삼보일배, 촛불집회의 극적 요소들이 홍콩 시민들의 눈길을 끈 건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런 시위를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여기지 않았다. 일부 한국 언론의 표현처럼 홍콩 시민들이 시위를 또다른 한류로서 소비한 거라면, 17일 격렬시위 후에 실시된 홍콩〈명보(明報)〉의 여론조사 결과가 "홍콩 시민의 60%는 그래도 한국 농민들을 지지한다"로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언론만 모든 논의를 시위의 '폭력' 대 '비폭력'에 집중**
그 60%의 홍콩 시민들은 '시위대의 폭력'을 지지한 게 아니라 WTO 체제와 빈부격차, 환경파괴, 부채, 착취, 불공정 무역, 개발 등 시위대가 제기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공감의 내용을 밝힌 것이다.
사실 모든 논의의 초점을 '시위대의 표현방식'에 집중하는 건 한국 언론뿐이다. 홍콩 시민들이 상황을 파악하는 방식은 훨씬 진지하고 입체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정불변의 관찰자로 놓고 시위대를 '대상'으로만 보기보다는 시위대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홍콩 시민단체의 연사가 "직접 농사짓지 않아도 먹을 음식이 있고, 직접 옷을 만들지 않아도 입을 옷이 있는 걸 당연시했던 우리들의 윤택한 삶 뒤에 누가 있었는지 보자. 여기서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진짜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탱하는 사람들"이라며 "멀리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이들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아야 우리의 삶 또한 유지될 수 있다"는 연설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또한 일부 홍콩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보낸 '감사편지'에서 "여러분들이 이곳에 와줘서 정말 고맙다. 여러분들의 시위를 보며 민주주의는 단순히 권력에 조용한 요구를 하는 걸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요컨대 홍콩 시민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단순히 삼보일배의 '평화성' 때문이 아니라, 불공정한 세계화로 고통받는 농민들의 절박성에 대해 홍콩 시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홍콩 시민들은 한국 농민들의 아픔이 자신들의 삶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성찰을 했고, 한국 농민들의 활력 넘치는 다양한 시위에 의해 그런 성찰을 하도록 자극받았던 것이다.
***컨벤션센터로 간 것은 일종의 정치적 행동**
한국의 한 기자는 칼럼을 통해 "홍콩 언론이 연일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보도하고 평화시위 시 경찰들의 특별한 제재도 없었는데 왜 '굳이' 회의장인 컨벤션센터로 가야 한다면서 경찰과 충돌했느냐"고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이런 식의 '합법시위에 대한 염원'이 타당하려면 필요한 전제가 있다.
홍콩 당국이 시위구역을 아무리 각료회의장과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잡아도, 행진코스를 컨벤션센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해줘도 시위대는 그런 조처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어쨌든 반세계화 시위대는 17일 경찰의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고 컨벤션센터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홍콩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알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행동의 공간인 거리에서 구호로 요약된 자신들의 요구를 '조직화된 물리적 압력'을 통해 들이밀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시위대의 결정은 일종의 '정치적 행동'이다. 1999년 시애틀에서도, 2003년 칸쿤에서도 시위대는 이러한 '정치적 행동'을 했고, 당시 제3세계 정부들은 이를 나름대로 협상카드로 활용했다.
***'움켜진 주먹'만 가지고 거리에 나선 시위대**
힘 없는 약자일수록 뭉쳐서 함께 목소리를 높인다. 여기의 관건은 최대한 위력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협적이지 않은 포즈로 호소하는 선에서 그치라는 것은 강자가 원하고 주장하는 '약자가 사랑받는 법'일 뿐이다.
여기서 '폭력시위'라는 표현에 들어 있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 시위대가 가진 물리력은 일반 시민은 절대 공격하지 않는 것이었음은 물론이고, 이번에는 반세계화 시위의 관행인 '맥도날드ㆍ스타벅스 부수기' 등의 사유재산 침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홍콩 도심의 상점들은 시위 첫날 일제히 문을 닫았다가 시위대가 상점 침입은 전혀 안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17일에는 모두 다시 문을 열었다.
오로지 경찰과의 충돌이 남았는데, 시위대는 자신들이 무장경찰과의 '폭력경쟁'에서는 늘 패배해 왔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동료가 '공인된 폭력'에 의해 맞아 죽는 것까지 지켜본 농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해봐야 '움켜진 주먹이 허용하는 물리력'을 가지고 허용된 구역을 벗어난 곳에 섰을 땐 그 힘으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건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의사표시'였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논의들이 저 멀리 컨벤션센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자신은 정작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거부의 표시였던 것이다.
***"물리적 충돌은 '진짜 상황'의 부산물"**
컨벤션센터에 가능한 한 가까운 곳에서 의사표시를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당국의 명령을 어겨야 했다. 그 상황에서 발생한 물리적 충돌은 '상황'의 부산물이지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삼보일배만 하면 '착해서 동정받을 자격이 있는 시위대'이고 허가구역을 거부하고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면 '나쁜 짓 했으니 모든 게 무효'인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홍콩엔 한국 농민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필리핀의 어부,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소농들, 대만의 노동단체, 브라질과 온두라스의 농민 등 작은 규모의 작고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입장을 외쳤다.
이들의 외침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였다. 내 삶의 결정권이 너무도 철저하게 빼앗기고 있다는 데 대한 절망, 그저 농토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 자신의 몸뚱이 하나 가지고 세계 각지를 떠돌아야 하는 이주노동자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절규들이 시위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쇼핑천국'의 홍콩 시민들은 기꺼이 세계화된 경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연대의 뜻을 표했다.
물론 17일의 격렬시위로 도로는 '잠시' 동안 진압경찰의 최루탄과 시위대의 함성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다음날 홍콩에 평온한 일상은 다시 돌아왔고, 평온함 속의 잔인한 현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홍콩에서 한국 농민들이 던진 질문들에 대해 이제는 한국사회 전체가 답변을 해야 할 차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