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세상이 좀 나아지긴 한 모양입니다. 거의 실감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5년 전에 처음 노르웨이에 와서 "한국어를 가르치러 왔다"는 이야기를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했을 때, "한국어와 중국어는 차이가 무엇이냐", "한국이란 원래 중국의 지방이냐"와 같은, 그야말로 한심한 질문을 꽤 받았는데, 요즘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5년이라는 시간이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의 전체 존속 기간의 10분의 1도 안되지만, 그 동안 "바깥"에서의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졌나 봅니다. 그 일등공신은 과연 누구인가? 노르웨이의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도 한국 이미지 구축 상의 한 전환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들의 인기가 큰 보탬이 됐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올드보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의 최근 일련의 한국 영화들의 대인기는, 중국의 지방인지도 모를 그 "미지의 코리아"를 시각화, 구체화시켜 기지(旣知)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만큼은 톡톡히 한 것입니다. 영화뿐만 아닙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에는 최근 "태권도 붐"이 일고 있으며, 태권도를 보다 잘 터득하려는 벽안의 젊은 "협객"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까지 본격적으로 배우려 하는 경우들이 점차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국위가 좀 선양됐다고 이제 마음 놓고 기쁨에 잠겨도 되는 걸까요? 기쁘긴 하지만, "우리 영화", "우리 국기(國技)", 나아가서 "우리 음식" 등의 유럽에의 개선(凱旋) 행진에 다시 꼼꼼히 생각해봐야 할 부분들도 꽤 있는 걸 아닐까요?
과연 저들이 최근 일련의 신작 영화와 태권도 등을 이렇게 "맛있고 흥나게" 소비하는 이유가 그것이 "우리 것"이기 때문인가? 과연 저들이 "우리 국위"에 지금 승복하고 있는 것인가? 확언컨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한국 영화의 팬들이 대다수 동시에 중국영화와 일본영화를 역시 신나게 소비하고 세 나라의 영화 사이에 정확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있으며, 태권도 연습을 시작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미 가라테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즉, "올드보이"도 태권도도 저들의 식탁에 오를 때 그 메뉴판에 "한국음식"이 아니라 "아시아 음식"이라고 적혀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과연 영화나 무술의 "한국성(性)"만에 반하는가? 실제 한국 영화나 태권도의 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역시 꼭 그렇지만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올드보이"를 좋아했다고 답한 사람들 중에서도 거의 모두가 액션과 호로의 섞임 그 자체를 이미 "올도보이"를 발견하기 이전부터 좋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팬들에게 "올드보이"는 "독특하게 한국적"이라기보다는 괴이한 살인을 재현함으로써 관객들의 눈요기를 해주는 그 국제적 장르의 대표 격인 셈입니다.
역시 태권도 팬들도 대개 가라테를 약간씩 해보고, 중국 무술 영화를 즐겨보는, 즉 태권도를 "동아시아 무술"이라는 보편적 카테고리의 대표 격으로 보는 경향입니다. 바깥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잘 나가는" 문화현상들은, 캐 보면 "가장 세계적"이라서 잘 나간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국위선양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서구적 소비 경향을 대표할 만큼 "세계적" 작품들을 내서 팔 정도로 "세계화", - 즉 서구화 – 됐다고 자부해도 될 것인가?
자부할 만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 세계적인 경쟁의 장에서 모든 기존의 것에 식상해 뭔가 새로운 오락을 찾으려는 서구 소비자들의 시선을 남보다 더 잘 잡은 "코리안" 문화 상품의 그 "특별한 무엇인가"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따져볼 만도 합니다.
예컨대 "올도보이"가 아무라 "모범적 호로 액션"이라 해도, 요즘 같은 포화 상태의 시장에 호로 액션이 어디 박찬욱 작품 뿐이겠습니까? 매력적인 킬러가 칼을 아름답게(?) 휘날리면서 악인을 재미있게(?) 토막내는 장면을 즐김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와 콤플렉스를 풀자면 "킬빌" 류의 작품을 시장에서 무수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저들에게 최민식의 동작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가? 여러 팬들에게 물어보고 〈가디언〉과 같은 권위지 (http://film.guardian.co.uk/News_Story/Critic_Review/Guardian_Film_of_the_week/0,4267,1327302,00.html)를 비롯한 구미권의 여러 "올드보이" 평론들을 읽은 뒤에 나온 답은, 박찬욱 작품의 (서구인에게의) 매력이 그 폭력의 "극단성"과 "엽기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생체로 토막 내는 정도야 어디에서도 충분히 보고 즐길 수(?) 있는 장면이지만, 생낙지를 산 채로 먹는 장면쯤이라면 어디까지 "우리만의 특기"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한 번 안동의 어느 식당에서 생선을 살아 있는 채로 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거의 기절할 뻔했던 나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지만, 내 학생들 중에서는 "생낙지 신"을 "올드보이"의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뽑은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살인의 추억"이나 "취화선"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도 내가 아는 많은 노르웨이 관람객들에게는 "상습적 구타와 욕설", "가부장적 남성이 여성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이었습니다. 상업 영화의 성공의 비결이란 원래 관람객의 "숨겨진 욕망", 그 무의식적 "그늘"을 끄집어내 시각화함으로써 본인이 고백하기 어려운 무의식적 판타지들을 재현시키는 것인데, 한국 영화들의 "엽기적인 폭력성"이 서구의 소비주의적 대중의 아주 깊은 어떤 환상과 욕망을 "잘" 건드려준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권도 연습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사범에게의 깍듯한 예절 지키기, 그리고 규율의 분위기"라고 답하는 경우들이 꽤 있습니다. 돈을 내고 "절하고 체벌 맞고 복종하는 미지의 동양 왕국"에 한 번 재미있게 (?) 갔다오는 셈인 것이죠.
서구에서 잘 팔리는 한국 계통 대중 문화상품의 성공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무의식" – "동양"에서 엽기적이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폭력이나 초인간적 규율과 복종, 이질적인 의례 등을 기대하고 이 이질성을 소비하려는 저변의 심리 – 에 잘 부합됐다는 것이라 말한다면 화낼 사람들이 꽤 많을 겁니다. 나아가 한국 영화의 높은 기술적 수준이나 시나리오의 우수성, "취화선"과 같은 영화의 도가적 "미술" 해석의 독특성, 배우들의 열연(熱演), 그리고 태권도의 건강 효과 등을 나열할 것입니다.
저도 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한국 영화 산업이 국내 시장의 국산영화 점유율을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쾌거에 대해 마음 속으로 대단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물론이거니와 유럽의 대국이라 할 독일만 해도 할리우드의 코를 이렇게 납작하게 만들 수 없었는데, 한국이 해냈으니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끝없이 다양한 한국영화 중에서는 유독 "폭력적 엽기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마을 공동체의 정(情)을 나누는 마당이 될 수 있었던 씨름보다 가라테와 흡사한 공격성을 지닌 태권도를 각각 골라 편애하는 주체가 우리가 아닌 저들이기에 우리 문제라 하기보다는 저쪽 시각의 문제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오리엔탈리즘적 무의식"에 호소하여 서구 시장에서 승부를 잘 겨루는 경우는 꼭 폭력물이나 호러물, 폭력적 스포츠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서편제"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그 비길 것 없이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풍경들이나 판소리 가락들도 대도시 아닌 곳이라면 지중해안의 리조트 쯤만을 상상할 수 있는 서구 중산층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극찬한 한 노르웨이 영화비평가처럼 (http://www.dagsavisen.no/kultur/nye_filmer/article1384179.ece) 한국적 산 풍경이나 산사 등을 "시간이 갈 줄 모르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으로 이질화시켜 본다는 것도, 넓은 범주의 "오리엔탈리즘"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서편제"나 "취화선" 정도라면 산세 뿐만 아니고 "신묘하기 짝이 없는 동양적인 음악, 화법"에의 강조도 "시간 갈 줄 모르는 동양의 신비"에 온 몸과 마음을 맡겨 "마음의 휴식"을 취하려 하는, "구도자"의 폼을 잡는 서구 소비자를 거의 일부러 겨냥하는 듯한 느낌까지 줍니다. 또한 구한말의 그 수많은 기인과 외톨이, 이단아들을 영화화하자면 장승업보다 종교의 일가를 이룬 최제우나 철학의 일가를 이룬 최한기가 어쩌면 더 극적이며 심오할 터인데, 종교가나 철학자 아닌 화가를 선택한 것도 서구인 고객을 생각한다면 정확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울님 신앙도 기철학도 분명히 신비해보이지만 그것까지 충분히 이해하려면 유럽의 회사원으로서 너무 버거운 공부를 좀 해야 할 터인데, 신비화된 화법(畵法)이라면 "누구나 쉽게" 다 매료되어서 "신묘한 이질성"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요.
하여튼, 한국학을 가르치면서 사는 저로서는 "서구의 한류"는 분명히 반가운 현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의 한 구석에서 억울함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아니, 식민지와 전쟁, 독재의 암흑을 거쳐 자기 손으로 최소한의 번영과 민주를 쟁취한 한국이 서구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 정도뿐인가? 서구인들로서는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유산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은, 고작해봐야 끔찍한 살인 장면이나 "신묘한 동양성(性)"을 소비함으로써 그 존재의 무한한 허무함을 달래는, 탈(脫)인간화된 배부른 세계 착취자들을 폭력물이나 "신비물"로, 그리고 "찌르기", "부수기", "치기" 등으로 재미있게 해주는 노릇에 국한돼야 되는 것인가? 우리가 차라리 저들의 양심과 양식에 호소해 저들이 알 수 없는 이 불평등한 지옥적 세계의 현실의 일부라도 저들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 안되는가?
사실,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45년 전의 그 전설적인 "하녀", "오발탄"부터 최근 10년 사이에 나온 "박하사탕"과 "아름다운 시절", 뛰어난 다큐 "송환"까지 그 역사가 길고 발군의 걸작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 걸작들이 외국 영화제에서 아무리 훌륭한 수상 기록을 세워도 대중적 흥행은 물론이거니와 진지한 관심을 가질 만한 진보적 소수 사이에서까지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와 연결된 또 하나의 질문은, 이미 영어로 잘 번역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무기의 그늘" 등의 1970-80년대의 진보 문학의 "꽃"이라 할 명작들이 외국 평론가, 작가로부터 숱한 찬사를 들어도 외국의 진보적인 소수자들에게마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무기의 그늘" 같으면 작가 황석영이 강렬한 민족의식을 가지면서도, 제3세계의 모든 피압박 민족에 대한 연대의식과 대량살육에다가 잉여 물자를 풀어 베트남 경제까지 파괴시키는 미제의 악랄함에 대한 제3세계인으로서의 진정한 분노를 잘 표현했음에도 과연 왜 그런가?
한 가지로만 답하기 어렵고, 제3세계와의 연대를 관념적으로 지향하면서도 바로 그 제3세계의 색다른 문화적 표현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의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질문을 던져볼 만한 부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한데, 서구 독자나 영화 애호가의 눈을 빌려 보자면 한국의 "민중 예술"의 도식성이나 인간의 복잡다단하고 상호 모순적인 욕망 읽기를 외면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간소하고 단순한 이해의 관습, 폭로성에 가려진 작가적인 개인 정신 등이 문제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비판적인 사회 의식으로 무장한 진정한 작가들의 민중의 서사시보다 자본들이 노련한 솜씨로 가다듬어 만든 포장 좋은 폭력물과 "신비물"이 외국에 훨씬 더 강력하게 진출하여 "코리아" 이미지 형성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정은 한없이 아쉽기만 할 뿐입니다. 무산 대중이 세계적으로 뭉치는 것이 역사 진보의 정통 코스가 돼야 되지만, 지금의 "서구의 한류"는 "환상의 폭력과 신비의 나라 코리아"를 소비하려는 유럽의 "배부르고 고독한 우중 (愚衆)"들과 국내 상업적 예술계의 똑똑한 장사꾼들의 "뭉침"을 의미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깥 세계"를 이질화시켜 "미지의 오리엔트"로 만드는 유럽인의 세계의식이, 우리가 "올드보이"와 태권도를 저쪽에다 잘 팔 수 있는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불리한 점들도 많습니다.
예컨대 국내의 대북 의식과 서구 언론들과 대중들의 대북 인식을 비교해 보지요. 국내 같으면 북한을 "내재적으로"만 접근하여 북한 사회의 모든 부조리한 모습들을 다 "미제의 봉쇄 정책으로 인한 사회적 긴장"만으로 설명하려는 좌파적 민족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유일 사상"에 별다른 동감을 느끼지 않고 북한의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역겹고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라 해도 북한의 "수령주의"가 유교적 "군신유의" (君臣有義)와 일제시대의 천황 숭배, 스탈린과 모택동의 "개인숭배" 등 여러 가지 정치문화적 요소들의 매우 복합적인 합성물이며 북한의 사정으로서 어쩌면 거의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할 것이고, "장군님의 초상화가 비에 젖었다"고 울어대는 북한 아가씨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면 조상의 신주부터 건져야 한다는 의식이 조선인의 "상식"이었던 시대가 과연 지나간 지 얼마 됐던가? 자유주의자라면 북한 왕조에 대한 "절대적 충성" 관념의 보편성을 아주 아쉽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현상인 만큼 이를 보고 낄낄 웃고 북한을 무조건 배제하기보다는 북한을 "껴안아" 함께 보다 나은 시대로 가는 방안을 선호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서구, 미국 지식인이라면 과연 어떻겠습니까? 언젠가 "무식쟁이 부시"를 대단히 혐오하는 미국의 한 진보적인 일본 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는데, 나에게 "한국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저 포악한 폭군 김정일을 성토하여 북한 인민을 구출하도록 노력하는 대신에 왜 김정일에게 아부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왔을 때 정말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다수 북한인에게 김정일이란 인물이 "태조" 김일성의 유업을 이은, 즉 그 정통성을 의심할 수 없는 임금인 이상 이를 무조건 배제한다는 것이 반(反)김정일이 아닌 반북, 즉 북한인 모두를 향한 적대 행위가 될 것이라는 걸 애써 설명했지만, 그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이라 해도 북한인들을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광적인 추종자들과 똑 같은 눈으로 본다는 것도, 북한을 "전체주의의 생지옥" 밖에 안되는, 하루 빨리 없어졌으면 하는 사회로 보는 것도 보수주의자들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고, 북한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무력을 써서 다수의 희생을 감수해도 되는가에 대해서만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생낙지를 먹는 장면의 "엽기성", 산사 풍경의 "시간 밖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긍정적인 오리엔탈리즘이라면, 김일성 작고의 소식에 팍팍 우는 북한인들의 사진을 보면서 낄낄 웃는 것이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비열한 형태에 속할 것입니다.
비열한 것이야 저들의 문제이지만, 미국이나 일본 극우들의 반북 책동에 유럽 진보주의자들마저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것은 북한을 껴안아 북한과의 동반자 관계를 도모하려는 남한의 중도 우파 정권이나 민중 세력으로서 결코 반가운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 있어서는 우리로서도 반추해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유럽인의 오리엔탈리즘도 북한의 경직된 "왕조 사회"도 지금 우리가 당장에 힘써서 개혁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북한 "수령제"의 상하관계 모델을 닮기도 하는 한국 기업체들이 외국의 고급 인력을 받아들이고 한국 대학교들이 외국 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을 보다 큰 규모로 받아들이려면 역시 보다 평등 지향적인 구조로 가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국내로서는 아직도 당연시되는 부분들이 "바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기억해두어야 할 현실입니다.
한국을 이질화하려는 경향의 또 하나의 피해자는 한국의 인문학입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원효도 퇴계도 중국에서 잘 알려지고 일본에서는 아예 "종교계/지성계의 스타"가 되는 등 한국 철학이 동아시아 지역 안에서는 "수출 품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본인들을 "가르치는" 시대가 종식되고 일본에서 "가공"된 서구의 인문학적 지식을 "진리"의 최고 권위로 인정하기 시작한 시대는 개화기이지만, 아직까지는 서구 이론의 수입이 서구와의 평등한 교류로 대체되지 못하는 것은 현재의 아쉬운 현실입니다.
물론 인문학이라는 고급 문화가 전혀 수출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민중신학이 독일이나 미국의 일부 신학 대학에서 제3세계 신학의 하나의 본보기로 가르쳐지고 함석헌의 종교 이해가 소수의 구미 종교가들에게 상당한 흥미를 일으키는 등 한국 인문학이 "바깥"에서 알려진 부분도 있지만 민중신학도 함석한의 독특한 융합적 종교관도 어디까지나 서구인들에게 이질시되는 한국적 "특수성"이 중핵이 되는 것이지, 서구에서 이야기되는 "보편이론"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 유학생으로 미국이나 서구에 가서 서양사나 서양철학, 문화이론 등으로 학위를 받고, 서구 언어로 쓰인 그 학위논문으로 구미권에서 정식 단행본으로 출판까지 한 사람들이 천 여명을 넘지만, 과연 그것이 서구의 지적인 흐름에 어떤 가시적인 영향을 미쳤을까요?
한국사나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따온 "팩트"들이 담겨져 있는 책이라면 적어도 구미의 지역학자들에 의해서라도 용케 사용될 수 있지만 한국 유학파의 그 수없이 많은 "헤겔 박사"와 "칸트 박사", "비판이론 박사", "미국 혁명사 박사" 등이 결국 "국내용"의 딱지 떼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선진 이론을 성실히 배우겠다"는 애당초의 "제자"로서의 자세가 결국 서구학자들이 생각하는 "참신함"의 부족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지만, "한국인"이라면 "이질적인 한국적 특수"와만 무조건 연결시키려는 구미 학계의 고질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습성이야말로 주범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왜 그러한 생각이 강하게 드는가 하면, 저 자신이 속하는 한국학이라는 분야만 해도 국내 학계의 "민족주의"에 대한 "때리기"를 쉴 사이 없이 오랜 기간 동안 해왔지만 한국사나 한국문학을 "특수" 아닌 "보편"으로 해석하려는 최근의 국내 학계 일각의 탈민족주의적 경향을 거의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한국학자"라면 서구학자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는 개념들을 쓰는 "포스트모던" 연구자보다는, 지도교수의 "말씀"을 달달 외우는 구태의연한 "민족주의자"여야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물론 국내의 탈민족적 흐름이 아직까지 비교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편견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일본인이나 화교 출신의 탈식민주의적 학자들이 구미학계에서 그 자리를 굳혀감에 따라 한국 학계의 새로운 흐름들에 대한 인식도 넓어져 가고 있습니다.
결국 민족주의의 구각을 벗은 새 시대의 한국 인문학자들이 "보편이론"의 장에서도 서구인들에게 "보편"으로 인식되는 뭔가를 미구에 가르칠 수 있을 것을 나는 믿고 의심하지 않지만, 서구의 자기중심주의적 "보편" 의식의 극복이란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국위선양"과 같은 용어는 이미 구시대적으로 들릴 것이지만, "한국 이미지 제고" 정도라면 "민족적 사명"으로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일단 현실적인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불가피한 부분이라 오늘날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사회에서 한국이 "신비한 산사와 환상적인 격파 시범"의 "신기한 나라"로서 아니고 서구인들과 동등하게 대화하면서 저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또 하나의 민주, 인권 사회로 인식되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일차적으로 국가보안법이나 학교에서의 두발 제한, 군대에서의 구타와 욕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야만적인 인간 사냥 등 한국 사회의 국내외인들이 공히 "보편"으로 인정할 수 없는 특징들이 속히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바로 알리기"는 기존의 "외국 교과서 오류 바로잡기"나 문학 작품 번역 지원, 재외 한국학 지원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과서와 같은 권위적 해외 텍스트의 한국 관련 서술에서의 오류도 바로잡아야 되고, 해외 한국학자, 한국어 번역 능통자와 같은 "우리"와 "바깥" 사이의 매개자도 양성해야겠지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지요. 한국이 외국 교과서의 한국 관련 서술 "바로잡기"에 쏟아 부어 온 돈과 에너지 만큼, 외국의 어느 한 나라라도 한국 교과서를 문제 삼은 적이 있었던가? 사실, 베트남 같으면 미제의 베트남 침략에 부역행위를 저질러 한국군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자", "미제의 용병"이라는 오명을 입힌 박정희 관련 서술에 상당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외국의 서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그 서술의 권위를 은근히 인정하는 숭외적(崇外的) 측면을 내포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서구 한국학의 재정적 후원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는 자세는, 결국 한국 정부의 의도와 한국학 전공자의 객관성 유지 능력에 대한 현지 지식인 사회의 회의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국내 인문학자와 사회학자, 소장파 작가나 수필가 저서, 논문의 서구 언어 번역을 지원한다든가, 국내에서 질적인 측면에서 세계적 수준에 달하는 인문, 사회학 영문 학술지나 문예 잡지를 키우는 것이 이미 상당부분 구시대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한국의 "젊은 목소리"들을 서구에 알리는 차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질는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각 대학과 각 학회, 각 문인협회 차원에서도 구미 지역 동료들과의 정기간행물의 공동 발행 등의 합작 사업의 가능성들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듯 합니다.
한국 진보 운동의 입장에서는, 구미 지역의 "세계적인" 인권 단체나 노동운동 단체 등의 도움만 주로 받는 기존의 형태를 벗어나 어려운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의 민주화, 노동운동이나 구미 지역 내에서의 반전, 평화, 소수자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중국의 노동운동이나 버마의 민주화 운동 등이 한국의 민중운동사를 공부하고 한국을 일종의 모델로 삼는 측면도 있는데, 국내 운동가들이 이들 이웃의 아픔을 보다 적극적으로 나누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결국, 동등한 대우를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 우리가 서구의 권위에 굴복하지도 말고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멸시적으로 보지도 말고 누구와도 반전, 반자본 운동의 차원에서 연대할 뜻을 확고하게 가진다면 세계적 변혁 흐름 속에서 궁극적으로 차지해야 할 마땅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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