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 번의 이벤트나 남들에게 보여지는 상징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난 10년간 꾸준히 북한에 대한 지원사업을 해 온 구호단체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유진벨 재단 〉입니다. 유진벨 재단은 특히, 북한에 결핵퇴치 약품과 장비 등을 전달해온 단체로, 현재 평안남북도와 평양 시내 45개 의료기관을 1년에 두 차례씩 방문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진 벨 재단의 스티븐 린튼 회장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고, 최근에도 대북 의료 지원 물품들을 전달하고 돌아 왔는데, 북한이 최근 많이 달라졌고,특히 남한 사람들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의식이 많이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집중인터뷰 오늘은, 유진벨 재단의 린튼 회장과 함께, 북한주민들의 의식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고, 대북지원 사업,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옳은가 이런 이야기, 함께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유진벨 재단, 스티븐 린튼 회장입니다.
스티븐 린튼 회장은 린튼 회장의 아버지의 외조부인, 유진 벨 목사가 1895년, 선교사로 처음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이래 할아버지, 아버지와 여섯 살 난 아들에 이르기까지, 5대 째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해온" 집안 내력을 갖고 있습니다. 린튼 회장은 유진벨 재단을 통해 지난 79년 평양을 처음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유진벨 재단을 통해서 꾸준히 대북 의료지원 사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박인규 : 안녕하십니까?
린튼 회장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사업을 10년째 계속 해오고 계시는데 유진벨 재단을 아시는 분은 많이 아시지만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죠?
린튼 회장 : 우리 기관은 다른 기관과 다른 차이점이 몇 가지 있어요. 첫째는 북한에서만 사업을 하고요…대북의료지원만 하고, 첫 2년동안은 식량지원을 했다가 97년부터는 결핵퇴치에 중심을 두었다가…올해부터는 일반병원지원으로 확장을 했습니다.
박인규 : 린튼 회장님의 한국 이름이 인세반이시라고 들었고, 동생분도 인요한이시라고…의사이신가요?
린튼 회장 : 네. 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 소장입니다. 우리 동생은…
박인규 : 모두 형제분이나 할아버지, 아버님이 한국에 사신 겁니까?
린튼 회장 : 주로 전라도에서 컸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목포에서 태어나시고, 아버지는 군산,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동생은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인규 : 전라도 사투리를 굉장히 잘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린튼 회장 : 잘 하죠. 알게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웃음)
박인규 : 동생되시는 분이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이시고, 이분께서도 93년도에 한국형 엠뷸런스를 개발하셨고, 그 동안 유진벨 재단과 함께 모으신 액수가 350억원을 모으셔서 북한의 결핵환자 250만명을 고치셨다고 하는데…
린튼 회장 : 우리가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은, 우리 기관에서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주로 후원자들이 한국인들이고 동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서는 상당히 뜨겁죠. 그래서 또 한가지의 특징 있다면, 우리 기관 이름으로 일을 하기 보다는 후원자의 명단을 앞세우고 일을 하기 때문에 사실 남의 심부름하는 기관에 불과합니다.
박인규 : 아주 겸손하게 말씀을 하시는데…후원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미국분들이 많으십니까?
린튼 회장 : 통계를 내보니까 한국 민간인이 한 3분의 1정도이고요. 정부에서 받는 통일기금도 한 3분의 1이고, 그리고 미국에서 모금하는 것도 역시 약 3분의 1인데…거의 동포들이 모금해준 금액이고, 나머지는 미국기관들이 지원하는 것이지요.
박인규 : 저희 프로그램에 평양의 어깨동무를 만들고 돌아 온 이기범사무총장이 한 번 나오신 적이 있는데 북한어린이들의 사망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이 설사와 폐렴이라고 하더라고요. 유진벨재단에서 결핵환자돕기를 하는 것도 그런 보편적인 병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어떻습니까?
린튼 회장 : 그렇죠. 지금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북한의 의료당국에 의하면 결핵이 가장 큰 보건에 문제라고 봅니다. 한국도 50년말기 60대초기에는 결핵에 걸리지 않는 가족이 거의 없었다시피 거기도 식량문제가 심해지면서 결핵이 많이 번졌습니다.
박인규 : 결핵이라는 병이 잘 먹고 잘 쉬면 낫는 병이라고 하는데…북한도 여러 가지 어려워서 생기는 겁니까?
린튼 회장 : 그렇죠. 우리가 결핵퇴치를 하려고 했을 때는…오로지 약만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진단기구와 약과 요양소 환자들의 식생활을 더 높이기 위해서 농업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10년 가까이 결핵퇴치를 중심으로 의료지원사업을 하시면서 주로 평안도쪽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잘 된 부분과 지원하시면서 어려웠던 부분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성과와 한계랄까?
린튼 회장 : 우리가 시작했을 때는 전국으로 했는데 세계 보건기구가 약을 공급할 때는 역할 분담을 해서 서북쪽으로 집중하게 됐는데요. 잘 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북한의료지원은.. 근면하고 자기 직분에 대해 성실하고 교육수준이 높으니까…시스템을 제대로 구성해서 이해만 시키면 일을 잘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일반 병원을 지원했을 때는 다른 기관과, 나라에서 하는 경험과 비교하면 고장률이 없습니다. 기계를 잘 다루고 책임적으로 잘 하는데, 항상 어려운 것은 방문입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빨리 가서 정리를 할 수 있지만, 북한은 시골까지 방문을 허용하지만 마음대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지원조를 구성할 때는 아주 세밀하게 설계를 해야만 그 의료기능을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박인규 : 현장의 접근이 자유롭지 않은 측면…이번에도 갔다 오시면서 원하시는 곳을 다 못 갔다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린튼 회장 : 네. 원래 평안남도 남포를 다니고, 가을에는 평안북도 평양시에 다니고 해서 사실은 일년에 적어도 관계되는 기관들은 다 다녀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책임적으로 일을 못합니다. 거의 다 다니기는 했지만 몇 개가 빠졌지요. 요즘 특히 NGO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도 있고, 6자회담도 잘 안 풀리고 해서 항상 약간은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14군데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박인규 : 19군데 중에서 14군데를 다녀오셨다…최근에 유럽쪽에 모니터링하는 식량지원을 하는데 그 쪽 요원들을 철수시켰단 말이죠. 그러면서 북한이 식량지원을 개발지원으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그런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린튼 회장 : 사실 그것은 사람들이 놀라워할 필요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북한은 절대로 영구적으로 식량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선포를 하고 95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영구적으로 외부에 의지하게 되면 안 좋다…국가적으로 문화적으로 좋지 않다…해서 꼭 필요할 때만 지원을 받다가 자신들의 힘으로 가능할 때는 끊겠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을 했었어요. 장기적인 계획 중에서도 그런 안이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갈수록 UN식량지원기구 모니터링에 강조를 하면서 사실 북한이 불쾌하게 생각한 것도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그 나라에 많이 다니지도 않는데 시골에 깊숙히 침투하면서 만약 지나가면서 무엇인가 좋아지면…그건 이해할 수 있지만 오로지 도착했는지 안했는지만 확인하러 간다는 것은 좀 자존심이 상하는…원치 않다고 해서…우리도 우리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러니까 식량지원을 하면서 현장을 가서 보면, 현장의 식량자급력을 키우기 위한 방안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보다는 식량이 왔느냐 오지 않았느냐,제대로 갔느냐…그것만 보고 하니까 북한쪽에서는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죠?
린튼 회장 : 그렇죠. 그리고 큰 기관들은 모금하는 부서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과가 다르기 때문에 모금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가야지만 모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것과 달리 순전히 사실은 감시하러 가기 때문에 그것을 북한이 견디기가 힘들죠.
박인규 : 유진벨재단은 아직은 접근하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겁니까?
린튼 회장 : 아직은 걱정은 없습니다. 다만 대체로 개발지원하는 기관들은 2~3자리밖에 관여를 안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일이 커져서 40개 이상을 하니까 그것에 항상 접근이 신중한…말하자면 토론이 필요하죠.
박인규 : 주로 평안도에 40여개의 의료기관을 다니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랫동안 다녀보셨으니까 북한의 의료실태가 어느 정도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린튼 회장 : 식량은 많이 좋아졌어요.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은 좋아졌지만, 의료시설은 아직 산 너머 산이에요. 왜냐하면, 현대적인 의료라는 것은 명의가 있어서, 건물이 있어서, 좋은 기계가 있어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인 소모품, 부품의 흐름이 있어야 유지가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시스템이 아직 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힘듭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면 의사도 간호사들도 있고 시설도 있지만 많은 기계들이 낙후됐고, 약도 부족하고,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으니까 실험실도 가동하기가 힘들고..이런 문제점들을 보편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박인규 : 제가 듣기로는 특히 의약품 부족을 많이 호소한다고 하는데 의약품을 많이 보내는 것으로는 부족한 건가요?
린튼 회장 : 그렇죠. 아무리 자선사업기관들이 약을 보낸다고 해도 한나라의 의료 필요를 다 채울 수는없죠.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후에도 6개월 단위로 계속 보내는 시스템을 설립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죠. 스티븐 린튼회장은 목사생활은 안 하시구요?
린튼 회장 : 아닙니다. 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2년만 하면 어느 정도 일이 자리가 잡혀서 제가 손을떼어도 될 줄 알았는데…10년이 흘렀죠.
박인규 : 지난 92년도와 94년도 사이에 빌리 그레이엄목사의 평양방문을 위해서 상당히 여러 차례 열전을 가졌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김일성 주석을 만나셨던가요?
린튼 회장 : 세 번 만났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의 느낌이랄까? 상당히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요?
린튼 회장 : 상당히 어려웠죠. 이것이 참 간단하지 않아요. 굉장히 좋은 음식도 먹게 되지만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그 맛을 모르고도 먹을 때도 있죠. 그런데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을 느꼈는데.. 김일성 주석은 정말로 낙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하면 된다 라는 분이셨고, 그리고 확실히 북한 사람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한다는 것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 빌리 그레이엄목사가 방북을 하셨던가요?
린튼 회장 : 네. 그레이엄 목사님이 두 번 방문하시고, 아들이 방문했을 때 한 번 더 뵙고 그랬습니다.
박인규 : 지금 현재 6자회담 북한 대표를 맡고 있는 김계관 북한외무성 부상과는 친구라고 말을 할 정도로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린튼 회장 : 그 당시 북한측 고문이었고, 저는 이제 미국 빌리 그레이엄목사님과 같이 일을 했죠. 그 때부터…
박인규 : 지금도 가시면 가끔 만나십니까?
린튼 회장 : 네. 이번에도 우연히 들어가는 길에 같은 비행기를 타서 공항에서 잠깐 인사 드릴 수 있었습니다. 미군대사와도 오래 전부터 관계가 있었죠.
박인규 : 잠깐이라도 이런 말씀 여쭤보기 그렇습니다만, 최근에 6자회담이 잘 안되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시던가요?
린튼 회장 : 저는 지원사업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부분까지는 관계를 하고 있지 않죠.
박인규 : 가급적…말하자면 정치문제를 말씀 안하시는 거군요? 그 분들과는?
린튼 회장 : 그렇죠. 이 6자회담이 안되는 이유는, 물론 정치도 있지만 문화차이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박인규 : 어떤 문화적인 차원입니까?
린튼 회장 : 미국 문화에서는 만남 자체가 일종의 양보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사람 만나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문화에서는 오히려 이론적으로 높을수록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강한 사람이 만나주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린튼 회장 : 그렇죠. 양보가 아니고 도리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양보이고, 한쪽은 도리에 불과하니까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죠.
박인규 : 미국은 자신들이 상당히 양보했다고 생각하는데 북한 입장에서는 만나 준 것을 가지고…
린튼 회장 : 그렇죠. 미국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는 계약을 중심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동시에, 한국인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전통적인 사회…사람들이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군요. 대북지원이라고 하지만 가장 큰 것이 식량지원과 의료지원, 인권문제의 생존권차원이니까요. 대북의료지원사업을 유진벨재단말고도 다른 단체들도 하고 있는데 10년동안 해오시면서 무엇인가 이런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말하자면 대북의료지원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것이고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라는 것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린튼 회장 : 저는 물론 10년동안 학교생활을 그만두고 지원사업을 했기 때문에..먹는 것과 의료치료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적어도 북한사람들이 굶지 않고, 필요 없이 병으로 죽지 않게끔 그 기초를 마련해 주면 상당한 정신적인 관계도 두터워 질 수 있고, 여러 가지의 좋은 점이 있습니다. 북한도 한국처럼 수출문화를 도입해서, 말하자면 자기 힘으로 외화를 벌여 들여서…그 쪽으로만 나갈 수 없습니다. 물론 농사도 더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는 방안도 있지만…결국은 한반도에서는 기후도 비교적 춥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자체에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한국이 택했던 수출문화에 빨리 도입하고, 자선사업가들 말고도 실업인들이 가서 정말로 세계의 무대에서 내세우고 팔 수 있는 그런 생산품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보다 더 근본적인 말씀을 해 주셨네요. 북한이 식량이나 에너지 작업을 하려면, 결국은 수출을 해서 외화를 벌어 들일 수 밖에 없다…북한을 처음 방문하셨을 때가 79년에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인데요. 결국은 95년부터 기아가 생기면서 식량지원, 대북지원으로 계속…
린튼 회장 : 학술교류와 다른 목적으로 89년부터 자주 다니게 됐습니다. 지금 50번이 넘습니다.(웃음)
박인규 : 그래서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79년 처음에 들어 가셨을 때와 최근까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씀해 주시죠?
린튼 회장 : 79년에 갔을 때는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들어 갔는데요. 중국보다 더 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자리가 바뀌었죠. 그러나 95년부터 지금까지 많은 변화 중에 하나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는 거죠. 95년에는 정말 원수 사이였지만, 이제는 한국의 발전에 대해서 알기도 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고…그렇습니다. 북한에서는…
박인규 : 남한에서는 한류 얘기들이 많은데…북한사람들도 제가 듣기로는 한류에 대해 많이 안다고는 하는데…한류는 많이 알고 계시던가요?
린튼 회장 : 그럼요. 중국에 왔다갔다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한류를 그 곳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고, 그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가서도 한국의 가요라든가, 영화를 아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박인규 :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것은 교류가 많아져서 일까요?
린튼 회장 : 교류가 많아져서 그렇죠. 물론 남쪽과의 교류도 있지만, 민간 차원에서 아마 중국 만주를 통해서 들어오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겁니다.
박인규 : 최근에 북한에 가서 아기를 낳고 돌아온 황선이라는 통일운동가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그런 지적을 하더라고요. 남한사람에 대한 북한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라고도 했고…문제는 북한이 수출입국으로 자급자족을 하려면, 고립상태를 깨야 하고 북핵 문제가 풀려야 하는데…지금 이번에 유럽 연합소속 NGO들이 북한에서 많이 철수 된 것이, 사실은 UN에 대한 북한인권결의안 제출에 대한 불쾌감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미국에서도 작년에 북한인권법이라는 것을 만들고, 이런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북한 문제를 푸는데 어떤 좋은 점도 있을 것 같고, 나쁜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린튼 회장 : 그렇죠. 저는 선교사의 후손으로서 지금 한국에 몸 담은 지도 110년이 되는데 남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남북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이 선교사업도 약간은 달리 했습니다. 이제 선교의 목적, 뚜렷한 목적으로는 분명히 왔지만 가능하면 내부간섭은 피했습니다. 북쪽 선교사들보다…그래서 저는 어깨너머로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그 쪽이 우리를 초청해서 식량을 하다가 지금은 의료를 하는데…말하자면 110년 여기에 살아도 아직까지는 손님이예요. 그래서 손님처신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그래서 외국인으로서는 과연 어디까지 예민한 부분을 관계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조금 다르고,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면 분명히 한국과 접근하면서 다른 문제들도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한국민족에 대한 신뢰가…믿음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의료를 관여하는 것도 일종의 인권과 밀접한 것이 아니냐…거기에서 만족을 찾고 있습니다.
박인규 : 실질적인 일을 할 뿐이지 남의 일에 배 놔라 감 놔라는 가급적 안 하시려고 노력하신다…문제는 이번에 UN에서도 인권결의안이 발의가 됐고, 미국에서도 북한인권법이 작년에 만들어졌고, 국내에서는 진보단체와 보수단체간의 북한문제에 왜 침묵하느냐, 제일 큰 문제다…아니다…북핵문제가 풀려야 한다…이런 식의 논란이 많은데 크게 봐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진벨재단의 접근 방법이 그렇다 하더라도 외부에 있는 외국의 단체일수도, 남한의 단체일수도 있는데 북한인권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다뤄가야 하는 게 남북교류랄지 북핵문제에 도움이 되는 건지 생각해 보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린튼 회장 : 네. 이것도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서양문명에서는 도전적이고 상대자와 부딪치기를 원하고 그리고 말하자면, 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공식상에서 인정하면서 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바꾸는 방식을 취하는데요. 그런데 사실상 중국과의 인권문제를 나누는 그런 방식대로 했을 때는 성과가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동아시아의 문화는 사람에게 망신을 주게 되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그 망신을 주는 자체가 죄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자기 실수로 오히려 조그마한 일로 왜 그러느냐는 식으로 나온다는 저죠. 공식상에서 망신을 주면서 뜯어 고치려고 하는 방식자체가 서구적인 문화에서 나온 것이고, 오히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용히 가서 사람의 체면을 건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말로 토론도 좀 하고…인간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차차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북한에 인권을 고치려면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또는 문화적 차이를 알고 접근해라. 그런 말씀이시군요? 지금까지 110년간 사시면서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 남한에서 특히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약간은 막연한 말씀일지 모르지만 마무리 말씀으로 어떤 식으로 북한 주민을 대하는 것이 좋을지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린튼 회장 : 저는 한민족처럼 통일을 원하는 민족은 세상에 없고, 그리고 열심도 있고, 아이디어도 많은 민족은 본 적이 없습니다. 또 자원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제일 부족한 것은 신뢰입니다. 한국사람들이 북한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나라가 된다면 더 쉽습니다. 아무리 무엇을 갖다 주거나, 쥐어 준다고 해서 신뢰가 쌓여지는 것이 아니고, 작은 일부터 신뢰를 하고, 신뢰를 쌓으면 그 쪽에 안심감을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너무 많은 경우에는 한국사회가 이런 경쟁이 많은 사회로서 항상 신뢰를 앞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그것부터 고의적으로 실천에 옮기려고 했으면 좋겠어요.
박인규 : 신뢰를 쌓기 위한 노력을 해라..우리의 100년째 손님이시기는 하지만 앞으로 남북간의 신뢰에도 많이 보탬이 되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 드립니다.
린튼 회장 : 감사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