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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문명을 유배시키는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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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베리아, 문명을 유배시키는 대지

김봉준의 '유라시아 문화기행' <7>

또다시 가슴 설레며 달려간다.
끝없는 대지 속으로
저 지평선 너머에 내님 계시랴
죽어도 못 잊을 기억
자기 땅에서 유배된 자들이 사는
내 뼈 속도 모르는 고향.
찾으러 찾으러
가슴 설레며 간다.

가서 나오지 않는 거다.
문명을 유배시키는 거다.
시베리아!
자기 땅 내 자궁 속에서 거듭날 때까지

시베리아는 내게 그런 곳입니다. 내 뼈 속도 모를 고향이지만 자꾸만 설레게 하는 낯선 애인입니다. 애인인데 낯설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나처럼 근원을 잃어버린 방랑자에게는 낯선 애인이 있습니다. 이 모자라기 짝이 없는 자, '근원을 잃어버린 자'가 꾸는 꿈 중의 하나는 전설의 아시아족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진1> 이제는 집만 남은 소비에트 집단마을@김봉준

소련시절의 시베리아는 유배지 아니면 콜호즈 집단마을을 먼저 생각나게 합니다. 슬라브 정치범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족 원주민들도 유배지였습니다. 자기가 사는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이 아시아족 원주민입니다. <샤먼의 코트>라는 책을 쓴 안나 레이드는 기나긴 유배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습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숙청도 끝났다. 후계자 흐루시초프는 수많은 굴라그를 폐쇄하고 8백만명에 달하는 수용자를 석방했다. 그러나 북부지역의 시베리아 원주민에게 있어 흐루시초프의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 스탈린주의만큼이나 파괴적이었다. 1957년부터 1980년 중반까지, 원주민은 집중화 정책의 대상이었다. 소규모의 낡은 전통마을에서 사는 원주민을 대규모의 새로운 소비에트 마을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게 정책의 함의였다. 정책의 골자는 상점과 러시아어 학교, 모피농장과 생선가공공장이 갖춰진 소비에트 마을인데 이주한 원주민이 새로운 소비에트 인민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책의 결과는 서서히 진행된 사회적 문화적 재앙이었다."

동아시아 원주민은 본래 살아온 전통방식이 있었습니다. 집중화한 마을이나 도시생활도 아니고 집단생산 집단소비식 분업사회도 아니었습니다. 산개한 씨족들이 소규모로 모여서 자급자족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새로 지은 소비에트 마을은 건설이 날림일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공무원들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은 고된 일을 하면서 욕을 얻어먹으면서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실업률, 문맹율, 자살율, 살인율이 치솟고 평균 수명도 곤두박질 쳤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현실과 똑같습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식민지 원주민를 지배한 결과는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1986년 미국 인디언촌을 찾아 갔을 때 대도시에 가까운 인디언촌일수록 문맹율과 자살율이 높고, 알콜과 마약 중독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깜작 놀란 적이 있습니다. 원주민이 원치 않는 근대주의, 국가주의 정책의 결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같은 근대주의 문명의 쌍생아입니다. 집중화된 도시를 건설하고 산업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력주의를 도모한다는 면에서도 같습니다. 원주민의 전통방식을 가치 없는 야만적 생활로 보고 개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뜻대로 근대화 됐습니까? 인간을 폐인으로 만들고 공동체 문화를 말살했습니다.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동시베리아의 폐허가 된 마을들을 보면 집중화 정책은 실패하였습니다. 시베리아는 도시로 집중화한 특별한 광산과 교통의 요지들 빼면 굳이 모여 살 필요를 못 느끼는 타고난 과소지역입니다. 아직 인간중심주의 문명, 산업문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땅처럼 보입니다. 멀리 흩어져 사는 주민 하나를 위해 전기를 가설할 수도 없고 우편을 배달하기도 힘듭니다.

시베리아 땅은 거꾸로 문명을 유배시킵니다. 권력이 인간을 유배시켰지만 시베리아는 다시 문명을 유배시켰습니다. 샤냥과 유목의 삶이란 동물이 흩어져 사는 만큼 따라가는 삶인데 모여 있으면 서로 손해를 봅니다. 사냥도 안 되고 유목할 초지도 적어집니다. 유목적 삶은 넓은 대지를 따라 들어가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목적 삶은 도시 문명적 삶의 반대적 성격입니다. 아시아 원주민은 이런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생활양식을 가졌던 것이고 샤마니즘이 생활양식의 정신적 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베리아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고속도로를 놓고 있으니 곳곳은 정거장 도시가 생길 것이고 물류유통은 활발해질 것입니다. 지금 부는 개발과 산업화는 사회주의의 집중화 정책보다 성공률이 높고 지속가능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너지와 자원에 목이 탄 자본은 시베리아를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다국적 기업의 지하자원개발 투자가 본격화 되고 있습니다.

지금 시베리아의 난개발을 막고 시베리아문화를 보존하는 길을 시급히 찾지 않으면 시베리아는 수억년을 지켜온 자연과 그 자연 속에 사는 삶의 문화는 이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다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시베리아 땅을 밟아갑니다.

2005년 유라시아대장팀은 하바로브스크를 7월 30일 오후 3시 출발했습니다. 떠나는 날도 비가 주룩 주룩 내렸습니다. 먼 길을 기약 없이 떠나는 길인데 비까지 내리니 착잡합니다. 비닐과 부삽 등 장비를 구입했습니다. 이 구간부터 이르쿠츠크까지는 답사도 보내지 않았던 곳입니다. 예상이 가지 않습니다. 우기에 찻길이 끊어지지는 않았는지, 대원 41명이 마땅히 잘 곳은 있는지, 밥은 해먹을 곳은 있는지, 지역경찰들은 안내를 맡은 지역마다 나와 있을지, 극악무도한 갱단이 있다는데 가다가 만나는 것은 아닌지... . 별별 생각이 다 스쳤습니다.

동시베리아 오지를 알 수 있는 정보는 모두 간접정보였습니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접하거나, 가 보았다는 러시아인에게 들었다고 전하는 이야기 정도가 전부입니다. 숙박지도 예정 돼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텐트로 야영하면서 가기로 한 구간입니다. 약 7일간 예정하는 이곳은 도로 사정도 안 좋습니다. 거의가 비포장도로이거나 포장이 망가진 도로였습니다. 보통 기차나 비행기로 여행을 하는 시베리아를 자동차로 떠나는 것부터 국내인은 물론 외국인은 더 큰 모험입니다. 대원들에게 주의를 상기시키고 먼 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길과는 다른 아주 오지로 가는 여행이니 여행전문가 대장, 랠리전문가 부대장의 말에 잘 따르라고 당부했습니다.

단장직을 맡았던 박계동, 유기흥 의원이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 부단장을 맡았던 내가 단장직을 승계했습니다. 김형주, 이광철 의원이 비행기로 날아와 합류했습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연해주에서 하바로브스크까지 안내를 맡은 동북아평화연대의 김현동 사무처장, 중국동포이면서 러시아여인과 결혼해서 우스리스크에서 사는 3개 국어에 능통한 사업가 유게나, 러시아어 통역사 3인, 연합뉴스와 한겨레신문, MBC의 취재 제작진, 러시아의 우스리스크신문 기자와 카레이서, 현대자동차의 차정비사, 야영전문가, 오프로드 차 랠리 전문가, 그리고 평화맞이 의례풍물굿을 주관하는 풍물패 김원호, 이정표, 백은희 등 4명, 신화학자 고혜경, 영문기록을 맡은 미국동포 하나 슈나이더, 동화작가 등 모두 41명으로 11대 차 중 각 차에 3~4명이 탔습니다.

***비러비잔**

하바로브스크에서 유태인 자치주 비러비잔까지 174km를 가는 동안 마을들이 썰렁합니다. 연해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한여름 농가는 물론 한적한 것이 당연하지만 빈 농가가 너무 많이 보입니다. 사회주의 집단 농장 콜호즈가 실패로 끝난 현장을 보면서 지나갑니다. 텅 빈 목장 막사가 많습니다. 유태인 자치주라는데 유태인이 별로 없습니다. 자치주 19만 인구중 2만명 남짓. 유태인 자치주는 스탈린의 민족이주정책의 산물입니다. 1934년 형성되었답니다. 비러비잔은 유태인 자치주 수도입니다. 레닌광장을 지나고 광장에 모인 젊은이들 힐끗 처다만 보고 달렸습니다. 검은 레닌상이 어디가나 보입니다. 주립 박물관이 있다는데 쫓기는 일정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이 도시는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4~5층짜리 회색 벽돌 아파트만 즐비합니다.

7월 30일 비러비잔 근교에서 대장정 시작 첫 야영을 했습니다. 도시를 지나 비러비잔 강가에서 탠트를 쳤습니다. 밤 10시에 도착해서 입니다. 아직도 하늘은 환합니다. 백야 덕분에 늦은 야영준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모기가 무척 많습니다. 대원들 모두 여기저기 물려서 벌겋습니다. 강 물살은 지류인데도 세찹니다. 브레야강은 흥안령산맥즉 아무라쿠라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아무르강 지류입니다. 비로비잔의 젖줄로 수질 보호구역이랍니다. 강물로 밥을 덥혀서 먹고 텐트를 치고 화장실도 만들었습니다. 첫 야영을 하는 젊은이들은 밤 늦도록 보드카로 취하게 마셨습니다. 밤 11시가 되니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이제야 무사히 야영을 마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강에서 농부들이 소떼를 몰고 지나갑니다. 우리들은 강가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햇반으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9시30분 출발했습니다. 어느 때는 기찻길과 나란히 달렸습니다. 기차에는 한국에서 싣고 온 포크레인과 버스와 자동차가 보입니다. 97칸이 달린 긴 화물열차입니다.

***아부루치예**

비러비잔에서 156km 지점 아부르치예 가는 길에 점심을 작은 개울가에서 주차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햇반, 카레, 짜장, 카레, 햄 스팸, 미역국, 육개장 등의 즉석 식품으로 해결을 했습니다. 개울 폭 2~3미터 얕은 물인데 수량이 많은 편입니다. 러시아 경찰이 데리고 온 딸 6살짜리가 내게도 꽃을 주었습니다. 호감의 표현입니다. 내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전기로 동요를 불러주는 등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예쁜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경찰차에서 내내 러시아 말을 하는 이광식씨와 덧셈 뺄셈 놀이를 하며 왔답니다. 이곳에는 정비소가 곁에 있는데 오히려 폐차장 같습니다. 웃통은 아예 벗고 사는 러시아 노무자들이 많습니다. 여름 한철 일광욕을 하는 습관 같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도시 여인은 아래를 벗고 농촌의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다닙니다. 여행하는 남녀에게는 각각 보기 즐거운 풍경입니다.

아부르치예를 지나면 유태자치주 끝, 아부루치예 가는 길 러시아인으로부터 차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까발라라 지역, 아부루치예에서 약 100km 떨어진 숲에서 원시족처럼 살아가는 부족을 발견했답니다. 1980년도에 군인이 헬기를 타고 가다가 연기가 솟는 것을 보고 발견했답니다. 슬라브족이라는데 19세기 이곳으로 출전을 했다가 숨어든 이들이 한 부족을 이루고 살아왔답니다. 러시아의 동진정책으로 차출된 군인들이었겠지요. 그들이 어디서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으며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했으며 문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갑자기 궁금한 게 산더미같이 부풉니다. 일정과 대규모 대오만 아니면 차머리를 돌려 찾아가자고 우기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전쟁을 피해서 사회주의 시대도 숨어서 보낸 세월, 그들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살았을지 무척 궁굼합니다. 약 100여명이 산다고 합니다. 지금도 문명을 거부하고 장날에 물물교환 하러 장터에 이따금씩 들린답니다.

아무르주로 넘어갑니다. 브레야에서 기념촬영 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개통할 고속도로 건설 목표를 미리 기념하는 탑입니다. 러시아기 선명한 기념탑. 오후 4시, 브레야에서 174km 가면 베라고라스크입니다. 주마간산보다 더 빠바르게 스쳐가는 차창 밖 풍경을 인상기로나마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이마저 또다시 오기 힘든 기행일 터이니 여기서부터는 숨가뿐 기록문이라도 버리지 않고 남기렵니다.

***아무르강을 따라서**

베라고라스크 가는 길은 대평원이다. 거의 다 농작하지 않는 들이지만 간혹 농사가 보인다. 콩밭이 수십킬로 뻗어있거나, 소 사료로 쓰이는 귀리농사가 펼쳐진다. 농부들은 소 목축을 하는데 사회주의 때처럼 대규모 농장은 사라지고 가족노동으로 농사 지은 사료로 겨울에 먹을 만큼만 한 소들이다. 러시아는 축산을 장려하기 위해 소 한 마리를 키우면 3정보의 초지를 준단다. 밭농사를 지을 땅은 드넓지만 기계영농을 할 형편이 못 돼 놀리는 땅이 대부분이다. 이런 밭을 갈려면 아침에 트랙터로 밭을 갈러 나가서 도시락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오는 왕복이 하루 농사란다.

베라고라스크에서 아래로 131킬로를 달리면 중국과 접경도시 블라고비베센스크를 만난다. 그곳이 아무르주의 수도이다. 한때 중국인들이 사금 채취로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몰려온 땅이다. 1900년 중국인과 슬라브인이 충돌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곳이다. 중국인과 슬라브인이 서로 보복의 악순환을 벌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분쟁의 앙금이 깊은 곳이다. 지금은 러·중이 합작하여 아무르강을 넘는 긴 철도와 차도를 건설 중이다. 2008년 완공 예정인데 이곳이 열리면 러·중 교역 규모가 훨씬 커진단다. 기차 길과 차도가 같이 가는 2층 다리인데 이 다리가 건설되면 러·중간 물류유통에 큰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동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의 산업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아무르주는 충청북도와 자매주이기도 하다.

베라고라스크 시내를 그냥 통과했다. 우리는 베라고라스크 근교의 똠미강 가에서 야영을 했다. 다행히 아직 하늘은 어둡지 않았다. 똠미강은 브레야강의 지류이고 브레야는 아무르강의 지류이다. 따뜻한 강, 낮은 수심이다. 광활한 대륙을 길게 누워서 흐르는 여름 강은 풍요와 평화의 상징이다. 이미 와 있는 러시아 청년들 곁에 야영을 했다. 경찰과 함께 가서 양해를 미리 구했다. 오늘도 밤 9시에 도착 했는데 밤 같지 않아서 텐트 치기 좋다. 여성들도 야심한 밤이 되자 똠미강에서 목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다음날 아침이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에서 세수를 하고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아침 식사 중 환담이 오간다. 시베리아의 똠미강이 간밤에 선녀탕이 되었다고, 김원호 풍물잡이는 "아이고, 내가 나뭇꾼이 되었어야 했는데."

우리민족에게는 선녀 신화가 내려온다. 우린 나무꾼과 선녀지만 여긴 사냥꾼과 선녀신화다. 이곳에 가까운 지역 신화를 하나 소개한다.

하루는 부족들이 모여서 부족연맹의 왕을 추대하려고 회의를 한다. 그런데 몇날 몇일을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단다. 그러던 중 강가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그 소년은 내력을 말한다. 어느 날 하늘에서 선녀가 셋이 내려와 강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려 하는데 막내 선녀의 옷에 빨간 열매 하나가 놓여 있더란다. 기이한 이 열매를 막내 선녀는 입에 물고 옷을 입었다. 그런데 입에 물고 있던 빨간 열매를 그만 실수로 삼키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아프고 태기가 생겼다. 이렇게 되면 하늘로 못 올라간다. 하늘에서는 불륜을 저지른 선녀를 받아주지 않는데 이 점도 금강산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똑같다. 그렇게 낳은 아이를 혼자서 길러 소년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어머니가 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소년은 말한다. 부족장들은 이 말을 다 듣고 비범한 이 소년을 무등을 태워서 마을로 데려온다. 부족연맹의 시조로 모셨다. 이것은 만주족 시조신화이다. 우리 신화와 같다. 왜 같을까. 같은 원형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는 동류의 북방유목문화이고 유전자인류학적으로는 서로 혈친족이다.

<사진2> 시베리아의 숲과 그 숲을 헤치고 내는 고속도로 공사길

시마노브스크,
베라고르스크에서 200km를 달리면 시마노보스크에 도착한다. 아부르치예부터 계속 북북서로 위도 3도를 올라 시마노브스크는 북위 52도에 위치한다.

8월1일 2시 시마노 호수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구역에 오니 침엽수림으로 수종이 완연히 바뀌었다. 전나무 숲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기념품도 주고 또 달렸다. 우리는 북북서로 올라가고 있음을 찬 공기와 나무 종에서 알 수 있었다. 산은 안 보이고 나무 크기가 작아졌다. 참나무 군락 많고 자작나무는 웃자라지 못하고 줄기도 가늘어진다.

공사 중 지방도로로 우회해야 한다. 우리를 안내하던 경찰도 헷갈려 갈팡질팡이다. 경찰차도 펑크가 났다. 이곳은 도로포장을 하다 말았는지 하는 건지 방치된 길이 많다. 파쇄석으로 칼돌이 많아 바퀴 펑크가 더 많다. 비포장에 펑크 난 바퀴 가는 시간까지 있어야 하니 주행속도가 느리다. 시속 4~5키로. 시베리아 오지답게 거친 길, 아스팔트를 해 놔도 긴 겨울 얼었다가 녹으면서 길이 잘 터진다.

그래서 아스팔트를 해도 성한 길이 별로 없다. 도시도 농촌도 제 기능을 하지 않은 채 차라리 버려진 것만 못한 어둑어둑한 농가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마을 사람 간혹 거리에 나와 꿀 병, 버섯, 야채 등을 놓고 판다. 허름한 벽돌건물 시바보드노이라고 쓰여 있다. 자유롭다는 뜻이라는데 우주연구소란다.

우수무.
거의 페허가된 마을 같다. 탄식이 절로 나온다.
우수무여, 너 거기 사람 사는가.
시커먼 창 버려진 마을,
사회주의 기치는 간데없고 소비에트 마을 이정표만 흔들거리는 곳.
아무도 지나는 사람 보이지 않고 목조 집 떨어진 문짝만 입 벌린 채 말이 없다.

도시가 시베리아에 유배당했다!
유배자에게 면회를 신청한다. 나를 차에서 내려다오.
경찰은 보지도 쉬지도 못하게 앞서서 달린다.
아, 우스무여 안녕!

디그다, 마그다가치.
자작나무 간데 없고 소나무 군락을 이룬다.
끝도 없는 숲길이다. 8월 1일 밤 11시에 도착하다. 야영 3일째에 접어든다.
인구 3만의 목재, 금광, 철도수송도시이다. 조용한 산사처럼 차분한 도시, 낡을 대로 낡은 목조주택, 간식거리를 구하는 텃밭들, 간간히 지나가는 웃통 벗은 남자, 짧은 치마 여인.
대장정 11대의 차량이 어두운 도시 마그다가치를 지나 검은 호숫가에 텐트를 쳤다.
시마노 호수에서 265km를 달려온 거리다. 도시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피고 놀다가 피해준다. 경찰의 지시다. 미안하다.
우린 긴 여정에 파김치가 되어 어두운 밤 차 불빛으로 자리를 밝히며 텐트를 치고 식사를 했다.
고려인 4세 김율리야가 생일을 맞이했다. 대학 1학년 전공과목은 영어다.
텐트를 치다 말고 모여 축하 노래를 해주었다.
고려인 소녀는 초코파이에 촛불 켜고 생일을 맞이했다.
감사하단다. 잊지 못할 추억이다.
이젠 알아서 잘들 한다. 야영에 익숙한 캠핑 전문가들 덕분에 훈련 돼간다.
백야도 지나고 호수가 풀밭도 짙은 어둠에 빠져들었다 나도 슬리핑 빽에 몸을 누인다.
시마노 호수여, 버려진 도시 마그다가치의 밤이여, 안녕
밤이 되면 모두가 사색의 별을 덮고 침묵하는 마그다가치의 시민이여, 안녕

최북단 마고차 가는 길
네베르, 스코보로지노, 마고차, 우리가 가는 최북단 지역이다.
산간지역을 지났다. 여기도 어제처럼 비포장도로이다.
점심을 먹고 또 달린다. 흙길이다. 시속 40킬로 이상 달리기 힘든 길이다.
마고차로 가는 길 밤은 8월 2일 밤 12시가 넘어 깜깜하다. 목표로 한 마고차까지
비는 오고 가로등 없는 밤길이다. 무전기로 계속 길 상태를 선두차가 노면 상태를 알려 주면서 달렸다.
최악의 여행이다. 악전고투다. 가면서 우리 자동차가 3번 펑크가 났다.
예비 타이어도 이제 얼마 없다. 경찰들도 고생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마침내 밤 3시에야 도착 했다.
이제 비로소 아무르주에서 치타주로 넘어온 것이다. 치타주는 북쪽은 사하공화국, 서쪽은 브랴티야공화국, 서북쪽은 이르쿠츠크주, 동쪽으로는 아무르주, 남동쪽으로는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몽골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우리는 접경지 스타노보이 산맥이 펼쳐진 산악지역을 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산맥을 흥안령 산맥이라고 부를 것이다. 큰 산과 큰 강이 러·중 국경을 만들고 자치주 경계가 되고 있다.

칠흑 같은 밤 지금은 안 쓰는 비행장 활주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기껏 데려다 준 곳이 마을과 격리된 야영장이다. 미리 봐둔 야영장은 다른 사람들이 야영한단다.
최악의 밤이다. 나는 단장으로 책임감이 생겨서 텐트 치기를 독려했다. 텐트 치고 편히 자라고 외치지만 차에서 나오기 싫은 듯 밖에 텐트를 치는 조는 다섯 조도 안 된다.
차에서 쭈그리고 자느니 텐트 잠이 그래도 나은데 말을 안 듣는다. 오죽 피곤하면 그러랴.
아침 10시에 부스스 한 모습으로 하나 둘 일어난다.
미역국으로 찬 속을 달래고 마고차 시내로 나가 기름 넣기로 했다.

장터에서 이것저것 구경 했다. 중국산 생필품이 이곳에도 많이 들어 왔다. 그 시골에서 나오는 농산물은 적어 보인다. 마고차 시장은 오랜만에 향기로운 인심을 느낀다. 해바라기씨, 과일을 사는데 덤으로 더 준다. 시골 할아버지들의 인심이다. 어디를 가나 시골 촌로들은 순박하다. 군청에서 맞이한 대표자들은 지금은 휴가철이고 갑자기 소식을 알아서 환영준비도 못했단다. 말이라도 고맙다. 군청까지 초대한 곳은 공식 행사들이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빼고 마고차 뿐이었으니. 다음 목적지 치타에서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무엇을 도와줄까 묻는다. 할 수 있는 것은 돕겠고 할 수 없는 것은 못 돕는단다. 우선 시장구경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차 11대가 주차할 공간도 마땅치 않고 외지인과 현지인이 시비가 붙을 염려가 있다고 허락하지 않는다. 일부는 이미 시장 나들이를 했지만 나머지 사람은 아쉽게 좋은 구경 못했다. 마고차에서 아마자르산 산맥 해발 8~9백 고지를 넘어가는 길은 험하다 못해 기어갈 지경이다. 60km를 가는데 2시간 반이 걸렸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 경치가 절경이다.

<사진3> 뗀의 언덕에서 노래하는 노동자들

뗀의 길
마고차에서 스비야로 가는 길, 고려인 사업가가 맡아서 길을 닦고 있는 현장을 지나다. 뗀유리 언덕이다. 러시아에서 고려인의 이름이 붙은 유일한 길이다. 뗀유리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러시아 연방 하원의원이 된 사람이다. 유리 뗀 2세, 2년 전 사망하고 아들 29살 청년이 사업을 계승했다. 이 산길을 아버지 이름을 따서 뗀의 길이라 명명했단다.

한국 이름 정홍식. 조부가 안동 태생으로 사할린 동포다. 이루쿠츠크에서 채광기사로 취직 와서 어렵게 대학을 나온 그는 산업협동조합 '트루드'를 1988년 창설, 기업가가 된다. 고려인 최초의 고려인 듀마의원이다. 3선까지 한 두먀의원이었으나 암으로 죽었다. 종업원 4500명이란다. 우리가 간 건설 현장은 유르트(몽고식 이동형 집)이다. 두 동 쳐져 있는 건설현장기지이다. 우리를 위해 진수성찬을 베풀었다. 고기와 전과 빵과 밥과 양고기스프, 보드카, 샤샤 까지... . 우리는 그간 피로를 음식과 인심으로 풀었다.

"잘 자란 고려인 하나가 1000명 러시아인 안 부럽다."는 속담까지 지어내면서 좋아라고 먹어댔다. 얼마만이냐. 이 진수성찬이. 햇반에 인스탄트 국으로 때우며 달려오다가 허기진 배를 채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다 먹고 산천 구경하며 연신 사진들을 찍는다.
그런데 저 동쪽 하늘에서 무지개가 떴다. 그것도 쌍무지개가 떴다.
속으로 "그래, 21세기는 시베리아 동쪽에서 서광이 비출 것이라는 좋은 징후!"
모두들 입가에 절로 웃음꽃이다. 환호성이다.
환대에 대한 답례로 풍물을 치고 러시아 노동자들과 노래 대항을 하며 놀았다.
역시 민족성이 그대로 보인다. 우리 풍물이 국제적인 놀이판에 걸맞게 더 개발 되었으면 좋겠다.
슬라브와 대륙풍 동아시아인들의 축제 기분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욕심인가.
러시아노동자는 유행가를 해도 군가풍이고 우리는 다정다감한 유행가다. 드넓은 대륙에 사는 그들은 노래풍도 담대하다. 우리 음악도 더 담대하기를 바란다. 슬라족 특유의 기개가 있다. 대장정의 여성 대원들 러시아 청년의 야성미에 반했단다. 오랜 여행으로 이국적인 이성에 끌릴 때다. 남자대원들도 러시아 여성들에 끌린 지 오래다. 잠은 유르트에서 청했다. 하루 열두 시간 이상씩 달려온 우리, 8월 3일 밤은 그렇게 환희와 포만감에 젖어 넘어갔다.

8월4일 목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9시에 떠났다. 오후3시 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제 우리를 환대한 고려인 유리뗀을 다시 만났다. 먼저 일어나 현장에 와 있었던 것이다.
유리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를 환대해 주어서 감사한다."
"당신들은 왜 바이칼로 가는가?"
"거기는 우리 조상들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그게 언제인가?"
"아주 먼 옛날, 기원전 1~2만년전 후빙기에 아시아족들은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하며 한쪽은 만주와 극동지역, 캄차카로 또 한쪽은 한반도와 일본으로, 또 한쪽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갔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나?"
"유전자 인류학으로 서로 친족 혈통임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
나는 그러면서 내 엉덩이를 두드려 보였다.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도 아주 옛날 조상은 이 러시아 땅에 살았겠네?"
"그렇다. 고려인은 고대 고향에 사는 것이다.!"
옆에 사람이 거든다. "그럼 우리가 먼저 살았네"

우리는 뜨겁게 이별의 포옹을 했다.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들은 한국에서 이민 온 4세·5세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에 뿌리를 둔 동아시아족의 후손들이다.

아마자르 산을 넘어 리레겐을 지나 체르니세브스크로 오는 길도 고속도로 공사 중이다.
해발 800~900미터 높이로 길 게 펼쳐진 산 체르니 준령을 넘어서 대초원으로 바뀐다. 허연 초원지대가 펼쳐지는데 이곳부터 몽골 초원지대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단청색을 보면 뇌록색이라고 있다. 녹색에 흰색을 탄 듯 한 허연 풀빛이 끝없이 펼쳐진다. 스탭지역이다. 시르가에서 치타로 가는길, 우리는 쉬지 않고 달린 샘이다. 점심도 차에서 때우며 달리고 달렸다. 여기서 380키로를 달렸다. 펑크 몇 번 난 것 말고는 무사히 도착 했다. 단원들 41명이 모두 무사하니 하늘에 감사한다.

치타시, 8월 4일 저녁 7시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30만 대도시로 드디어 도시문명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진4> 체르니 준령을 넘으면 여기부터 스텝지역이다.

치타.
치타는 달랐습니다. 아스팔트도 매끄럽게 포장돼 있고 거리에 예쁜 아가씨도 많고 먹을 만한 식당도, 무엇보다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푹 잘 수 있는 침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시 문명인, 야성을 갈망하면서도 돌아서면 도시의 편리함이 익숙한 이중성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이 이중성이야말로 문명의 모순을 극복하게 하는 동력일 수도 있겠지요.

지금 우리가 달려온 길은 동아시아인들 중에 한국인이 처음입니다. 선천적으로 유목적인 피가 흐르나 봅니다. 정주와 유목의 역동성이 한국적 다이나미즘의 원천인지도 모릅니다. 몽고에 여행을 하면 한·중·일 민족을 상대로 말 타는 관광 체험을 시켜보면 그중 겁 없이 말을 잘 타는 민족은 한국인이더랍니다. 처음 말 타는 한국인이 주저하지 않고 덥썩 말안장에 오른답니다.

한국인은 달려가는데 뭔가 있습니다. 동시베리아도 그런 식으로 빨리빨리 달렸습니다. 한국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속초까지 약1100킬로를, 자로비노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46키로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브스크까지 743키로를, 하바에서 치타까지 2200키로를 사고 없이 달려온 것입니다. 하루 평균 300km씩 14일 동안에 약 4,300km를 달렸습니다. 최악의 난코스라고 할 탐험 길 동시베리아 구간을 이제 거의 다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습니다. 나의 관심은 더 느리게 찬찬히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살피는 여행인데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지역 도시마다 작은 박물관을 놓치고 지나 온 곳도 있고 더 머물러 민간인 생활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경찰이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리랑 쓰리랑 노래를 부른다는 에벤키족도 찾고 싶었지만 에벤키족을 만나기는커녕 비러비쟌에서 치타까지 오는 동안 아시아 원주민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애시 당초 목적할 수 없는 욕심이겠지요. 대중적인 랠리여행이 되다보니 모든 삶의 취향을 다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을 기약해 봅니다. 다음에는 더 소규모로 더 작은 주제를 가지고 오고 싶습니다.

<사진 5> 치타 시내까지 무사히 도착한 유라시아대장정 대원들

숲에서 초원으로 바뀌면서 나타난 대도시 치타. 평생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여행지에 저는 또다시 가슴 설레며 서있습니다. 나는 왜 자꾸 새 여행지를 만날 때마다 가슴 설레는가. 가서 나오지 않는다던 저 시베리아 숲을 주마간산으로 달려오고 이제 또 다른 유혹 앞에서 가슴 설레는 것이냐. 아무래도 시베리아 숲은 문명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차도와 철도를 이어서 사람을 강제 이주시키고 강제노동을 시켜서 도시를 송두리 채 강제했다. 이 짧은 도시의 역사들은 슬라브주의의 문명 컴플랙스가 만들어 놓은 부자연스러운 '집중화'입니다. 유럽의 도시들을 흉내 내어 날림으로 지은 도시의 짧은 역사는 분명히 강제이식의 역사입니다.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보호하고 호혜시장을 옹호하는 근대국가주의는 없는것 같습니다. 다민족 다문화가 자연과 공생하는 독특한 동시베리아공동체가 시베리아 주민자치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요. 근대문명마저 유배시켰던 저 깊은 시베리아의 침묵은 또 다시 창조적 재생을 모색하라고 기다리고 있는 암시일지도 모릅니다. 문화종 다원성이 인정되는 평화, 생명계의 우주적 질서가 존중되는 평화, 모든 영혼의 평화 세상은 '시베리아의 자궁' 속에서 유배된 자의 거듭남처럼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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