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어렸을 때 우리는 강대국 한국을 꿈꾸면서 자라왔다. 세계대전사의 화보를 보면서 우리는 강한 군사력과 당시의 첨단 무기를 가진 다른 강대국들을 부러워하면서, 상상 속에서, 아니면 만화나 소설 속에서 강대국 한국을 그리면서 위안을 삼았다. 사실 그때는 강대국이 되면 뭐가 좋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괜히 강한 것이 멋있고, 폼 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꿈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우리가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정말 순식간에 한국이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다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이렇게 순식간에, 어느덧 강대국이 되어 있는 한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렇게 강대국이 된 한국이 어떻게 새로운 외교환경 속에서 새로운 외교를 해야 하는지 그 비전을 필자 나름대로 제시하는 데 있다. 아마도 지금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북한이 외치는 "강성대국"에 남한이 먼저 도달하고 있다. 이제부터 강한 한국의 의미와 새로운 외교의 비전을 향한 여정을 떠나기로 한다.
***한국의 "약소국 현실주의" 외교의 관성**
한국의 외교를 논할 때 흔히 비유적으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19세기말 대한제국의 국제적 위상이다. 이 외교 담론의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당시 약소국 대한제국은 19세기말 강대국 국제정치를 몰랐기 때문에 강대국에 휘둘리다가 결국 일본이라는 강대국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사실 강대국 국제정치를 알았다 하더라도 별도리는 없었을 것이지만...) 따라서 21세기인 현재에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 앞에서 (특히 미국 앞에서) 멋모르고 자주를 외치고 까불다가는 19세기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교훈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교훈을 가장 잘 습득하여 해방 이후 한국의 독립과 생존, 그리고 번영을 이룩해낸 것이 지난 근대화 기간의 대한민국 외교다. 한국은 약소국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1950년대, 60년대 초까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가 안 되었고, 미국 CIA의 조사에 의하면 70년대 상당기간까지 북한에 비하여 경제, 군사적으로 열세였다), 강대국 미국에 의존하여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지켜내는 외교를 추진해 온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 경제적 부작용이 있었으나, 추상적인 의미의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지켜낸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은 19세기의 교훈을 가장 충실히 적용한 외교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의 경험이 잊혀지지 않았고, 6.25를 경험한 한국에게 있어서 미국 의존 약소국 외교는 어쩌면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외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교를 여기서는 "약소국 현실주의"라고 정의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러한 약소국 현실주의는 한 가지 논리적인 덫을 걸어놓고 있다. 그 덫은 다름 아닌 힘의 상대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힘의 강약은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에 약소국 현실주의를 취하는 국가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 되지 않는 한, 아니면 자기보다 월등히 강한 국가가 하나라도 존재하는 한, 약소국 현실주의라는 관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특히 기왕에 의존해 온 국가와의 관계에서 힘의 열세가 유지될 때 이러한 관성은 지속될 수 있다. (뒤에서 이러한 관성이 유지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을 밝힐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아무리 근대화에 성공하고, 경제적, 군사적 위상이 높아져도 미국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면 기왕의 약소국 현실주의를 지속해야 하는 국내적 관념의 관성은 지속되게 된다.
최근 이러한 관성과 그 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세력들 간에 논쟁과 싸움이 붙어 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싸움을 한미동맹파와 자주파의 싸움으로 담론화하고 있지만 이는 관성과 그 관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세력들 간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framing이다. (담론의 framing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의 지난 번 글에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리고 벗어난다면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보다 신중한 이론적, 현실적 분석과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즉 아직 우리는 19세기 교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어떠한 새로운 방향을 그려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분석적이고, 창조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제는 19세기적 교훈의 관성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여기서 19세기적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는 이제 약소국 현실주의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서 한국외교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획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세간에서 담론으로 유행하는 자주독립의 노선으로 방향을 급선회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는 그저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생활세계가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형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즉 국익을 추구하는 방식, 범위, 내용 등이 바뀌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하에서 변화가 필요하고, 또 가능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관성으로부터의 탈피**
우선, 한국의 약소국 현실주의를 규정하던 상대적 힘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가 생겼다. 19세기 말과 한국전쟁 이후, 그리고 냉전기의 상당기간 동안 한국은 변방의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주변국인 미국, 일본, 소련 (현재 러시아), 중국에 비교할 때 터무니없는 약소국이었고, 심지어 북한보다도 약한 국가였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국운을 의존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잘 한 선택이고, 또 운 좋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힘의 상대성에 서서히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한국의 자체적, 그리고 한미 동맹에 의거한 연합 국력의 증가이다. 즉 변방의 약소국이었던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하여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선진국의 클럽인 OECD의 회원국이 되었고(1996년), 현재는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우리의 소위 "주적"인 북한과의 상대적 국력의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이 벌어져서 우리의 국방비 예산 정도가 북한의 GDP규모와 맞먹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GDP규모로 보면 한국이 러시아보다도 크고, 중국보다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에 비해서는 혁신능력과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신산업기술, IT 및 정보화 등에 있어서 우리가 우월하다고 판단된다.
만약에 세계 경제규모를 계산할 때 우리보다 윗 순위에 있는 유럽국가를 EU로 묶어 버린다면 한국은 당연히 세계 10위 안으로 진입하게 되고, 그리고 한미동맹을 통하여 다져진 군사력까지 더하여 국가의 세계 국력 순위를 계산한다면 현재 한국은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국력을 갖는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최근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력, 우수한 인적자원, 민주화 등 역사적 성장 곡선 등을 고려한다면 명실 공히 세계에서 상위 10위에 들어가는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문제는 상대적인 국력의 차이인데 우리의 우방국인 미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아직 상대적 국력의 차이가 벌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적 국력의 차이가 바로 19세기의 교훈을 다시 적용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세기와 다르게, 그리고 냉전기와 다르게 지금은 미국이라는 유일 초강대국이 정점에서 세계를 관리하는 일극체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극체제는 세계화라는 세계 자본주의 단일시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일극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여타 선진국들이 미국과 같은 편에서 일극체제 세계화를 관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선진국들은 세계자본주의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 것이지, 상호 제국주의적으로 타국의 영토를 놓고 제로섬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강한 국가들은 모두 민주국가라는 점이다. (중국은 예외, 그러나 이전에 비해 상당히 민주화의 과정으로 들어서고 있다고 보임).
여기서 한국을 세계 10위권 안의 국가라고 상정하면, 한국도 여타 선진국과 함께 세계자본주의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위치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국과 여타 선진국과는 제국주의적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안정을 위하여 분업을 하게 되고, 분업의 과정에서 갈등과 분쟁이 생기면, 이는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과 분쟁이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기 어렵다. 이것은 바로 미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의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즉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무력보다는 협의를 통하여 갈등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사실 WTO에서 국가간 무역 분쟁 해결 절차를 보게 되면 분쟁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제도적 절차에 따라 해결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민주주의 국가간에 맘에 안 든다고 무조건 보복을 하거나 강압적으로 본때를 보여주는 일은 매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극체제 세계화와 민주평화론에 의거해 보면, 한국이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국가가 되었을 때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에 대해서 19세기와 냉전기의 약소국 현실주의를 고수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그들 국가와 함께 일극체제 세계화를 관리하고, 그 관리의 과정에서 이들 민주국가와 이슈 별로 이견을 노정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견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국가들 간의 이견이기 때문에 미국-프랑스, 혹은 미국-독일 관계에서 보듯이 전쟁이나 치명적인 무역보복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19세기적 세력균형 (balance of power)보다는 사안별로 국가간의 연합이 바뀌면서 상호간에 균형을 취하는 외교의 패턴(issue-oriented balancing)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제문제에서 같은 연합에 속했던 국가가 환경문제에서는 다른 연합에 속하고, 같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농산물 개방에서는 같은 연합에 속해 있으나 금융시장 개방에는 다른 연합에 속하는 그러한 사안별 균형을 취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안별 균형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도 하나의 정형화된 추세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자의 다른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일극체제 세계화는 아무리 미국이 초강대국이라고 하여도 혼자서 관리할 수 없고, 공통의 이익을 공유하는 다른 선진국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19세기적인 세력균형이 나타나기 힘들다. 한국은 이미 다른 선진국과 함께 그러한 협력을 줄 수 있는 국가로 올라갔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기 때문에 이제는 19세기의 교훈에서 벗어나서 한국 외교의 새로운 비전을 그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한국외교의 비전을 말하기 전에, 약소국 현실주의라는 외교의 관성이 이어지는 다른 이유를 또 하나 들자면 그것은 우리의 관념이 현실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 있다. 지면 관계상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은 너무나도 경제성장을 빨리하여, 순식간에 극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성장하였고, 따라서 대부분 성인들의 머리 속에는 한국이 아직 "개도국"이라는 관념이 남아있다. 보릿고개와 새마을 운동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약소국을 벗어났다는 것을 관념적으로 믿을 수가 없다.
또 다른 관념의 느린 변화는 한국인들이 갖는 냉전인식 때문이다. 한국인은 냉전을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구도로 인식하긴 하였지만 사실 체험적으로 인식한 것은 북한과의 대결구도라는 우리만의 소우주 속에서였다. 그래서 사실상 지구상의 냉전구도가 사라졌지만 남북관계라는 우리의 소우주 속에서 냉전구도가 남아있기 때문에 아직도 한국인, 특히 성인 한국인의 관념 속에는 냉전의 관념이 남아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념의 관성을 합하면 이들은 한국은 아직도 약소국 현실주의를 외교의 기조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이 세계 10위권에 드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냉전이 끝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환경적 변화를 더한다면, 이제 약소국 현실주의는 어느 정도 폐기처분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외교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제부터 그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한국외교의 비전**
***관리를 받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는 국가로**
***가. 관리의 범위(scope of governance or sphere of interests)**
한국은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 아니므로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안을 관리할 수 없다. 이러한 세계관리(global governance)의 범위를 갖는 국가는 현재 미국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은 미국을 정점으로 하여 관리의 분업체계를 형성하여 한국이 관리할 지역 및 사안의 범위를 설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사안별 균형을 하며 한국이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는 형태의 외교가 필요할 것이다. 유럽이 미국을 정점으로 하여 동구, 아프리카, 중동의 불안정 요인을 사안별 균형을 통하여 관리하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으며, 일본이 미국을 정점으로 하여 중동과 아시아의 불안정 요인을 관리하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아시아의 불안정 요인을 비교적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시도도 미국의 하위 체제에서 생겨나는 사안별 관리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관리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여야 할 것인가? 현재 참여정부에서는 이 범위를 동북아시아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동북아시아는 한국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할 지역이다. 그러나 한국의 국익과 관련된 지역은 동북아시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지역에 퍼져있어 관리의 범위를 좀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미래지향적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는 강대국들의 경쟁의 장이기 때문에 한국의 관리의 범위를 동북아시아에 국한하게 되면 관리를 하는 국가이기보다는 관리를 받는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의 외교적 역량은 타 지역에서 형성한 관리연합의 도움과 성과를 가지고 더욱 높일 수 있으므로 관리의 범위를 동북아를 넘어서는 범위로 설정하여야 한국에게 유리한 동북아시아 구도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이 관리해야 할 범위는 현재 한국에게 우호적인, 그리고 그러한 잠재력을 가진 국가의 범위이고, 그 국가들이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관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한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이 많아지면 이 국가들은 한국의 안보를 위하여 협력할 수 있는 잠재적인 국가가 되는 것이며, 또한 한국의 수출상품과 주요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시장이 된다. 한국경제의 대외무역의존도가 70%가 넘는 상황에서 이러한 우호적인 국가들과 시장을 확보한다는 것은 한국의 국익에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된다.
이러한 국가들은 현재 한류가 유행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고 있다. 일본, 중국, (극동)러시아,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가 그 지역이며 최근에는 아프리카 일부지역과 라틴아메리카의 일부지역으로도 한류 유행지역이 서서히 넓어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유행하는 한류의 특징을 보면 초기에는 한류가 부분적으로 유행하다가 최근에는 한국문화가 상당히 보편화되는 현상을 보여 한국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친근성, 호감이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한국과 비슷한 정서와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깔려있어 한국의 주요 협력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관리대상 지역은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문화산업과 그로 인한 다른 한국 상품의 주요 소비시장이 될 것이며 주요한 에너지 및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한류를 통한 우호관계의 형성은 한국의 국익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 지역을 한국과 비슷한 정서와 사고방식을 공유한 지역으로서 형성, 관리할 필요가 있다.
***나. 한국적 연성권력의 투사(Soft Power Projection)**
세계화와 탈냉전 시대의 한국의 관리대상 지역을 관리하는 수단으로는 19세기, 20세기, 냉전형의 군사력 투사 (military power projection)보다는 한국에 우호적인 여론과 정서를 형성하게 하는 연성권력의 투사가 효과적이다. 즉 이들 지역에 한국과의 문화적 친화성 (cultural affinity)을 높이고, 이 지역과의 경제협력, 교육협력, 문화 및 인적 교류, 인권신장 및 민주주의의 발전, 갈등관리, 평화창출, 유지 등에 기여하는 연성권력의 투사를 한다. 특히 갈등관리와 근대화, 민주화, 선진화 등의 한국적 경험을 이 지역에 수출하여 한국이 이 지역을 앞에서 이끄는 문화적, 근대화의 경험적 안행모델 (flying geese model)을 창출한다.
이러한 연성권력의 투사를 위해서는 투사에 필요한 인프라가 있어야 하고, 또 투사를 상대지역에서 연계해 줄 수 있는 거점 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동맹을 한국적 연성권력의 투사를 위한 동맹으로 재조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세계화 인력 양성과 현지 동포 네트워크의 활용이 필요하다 (동포 네트워크의 활용과 관련한 서동만 교수의 지적에 감사를 표한다). 따라서 한미동맹은 한미 간의 세계관리(global governance)의 분업구조로 재편되고, 여기서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대신 (veto power를 보유한 형태의), 미국은 한국의 연성권력투사를 위한 해외 동맹인프라를 한국이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형태로 발전하여야 한다. 또한 해외동포정책을 한국적 연성권력투사를 위한 거점 인력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조정하여, 이를 위한 체제의 개편과 수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 외교기법: Issue-oriented Balancing (Governance)**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탈냉전기 국제정치는 19세기와 냉전기의 총력전에 대비한 세력균형이 핵심적인 외교안보 정책의 기법이 되기보다는 냉전기 경제, 문화 사안과 같은 하위정치 (Low Politics)의 외교기법에 유사한 사안별 균형정책이 안보라는 상위정치 (High Politics)로 확산되는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즉 상위정치가 하위정치를 규정하는 규정력이 약해지고 세계화와 탈냉전의 추세에 힘입어 안보이슈를 포함한 다양한 이슈가 사안별 균형정책으로 관리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패턴은 이미 경험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으며, 이 패턴에서는 관리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가치에 맞추어 매우 유동적인 국가간 연합 (governing coalition)을 형성하고, 이들 연합끼리 경쟁하는 구도가 생겨난다.
한국은 이러한 사안별 균형외교에 대비하여 두 가지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나는 한국이 세계관리에서 추구하는 국가이익과 가치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사안별로 어떠한 국가와 국가간 연합을 해 나갈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한국이 추구하는 국가이익은 한국의 안보와 성장동력의 시장으로서 중요한 우호적 국가를 만드는 것이고, 한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인류보편적 가치의 틀 안에서 이들 지역을 공동체로 설정하여 공동체의 평화와 복지의 수립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적 연성권력의 투사를 통하여 평화와 근대화, 번영, 그리고 복지를 달성하고, 그렇게 안정된 지역에서 한국의 외교 및 시장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평화를 위하여 각 사안별로 우리와 공통의 가치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국가를 선정하여 사안별로 유연한 연합의 교체를 이루어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에 국한하여 이 곳의 4강과 연합을 교환하기 보다는 유럽의 국가들을 연합의 파트너로 끌어들여 연합 교환의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따라서 한국은 동북아시아에 국한하는 다자협력체제보다는 동북아시아 + EU가 함께 하는 보다 넓은 Global Concert의 체제를 지향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국의 극우적, 팽창적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즉 한국외교가 세계무대에서 보다 적극적 역할을 하고, 한국이 세계의 Global Concert(세계 관리주도 국가군)의 일원이 되면 한국 내부에서 극우적 민족주의 세력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영토의 복원이나 군사력과 같은 경성권력의 투사 등을 외치게 되면 한국은 중장기적 목표와 달리 우호국가를 잃게 되고, 관리국가로서의 자격요건을 잃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이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고 보다 민주적이고 인류보편적인 가치에 기반한 외교노선과 대민 홍보외교에 힘을 써야 한다. 한국내부에서의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역량의 확립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므로 이를 위한 국내적 노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가면서**
이러한 외교의 비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중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서 끝내기로 하고, 중장기 전략과 관련해서는 다음 기회에, 혹은 다른 기회나 장소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기로 한다. 다만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이제 관성적 관념의 포로에서 벗어나서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한국의 국익과, 위치에 걸 맞는 새로운 외교의 비전을 그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제시하는 비전은 앞으로 나올 수 있는 많은 비전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이 글을 계기로 이러한 비전의 담론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면 필자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앞으로 많은 경쟁적인 비전의 담론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특히 뉴라이트나, 뉴레프트, 기존의 정치세력 들이 그들의 철학과 콘텐츠가 담긴 비전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