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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로서의 <민족개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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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민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로서의 <민족개조론>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4>

안녕하십니까, 박노자 선생님.

박 선생님께서는 「민족개조론」을 일제에 항복한 이광수가 총독부에 제출한 "반성문"으로 보시는군요.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민족개조론」은 안창호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진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수양동맹회의 창회 선언문이다"라고 본 진보적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이 더 제 귀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서중석, p. 151).

사실 이광수가 평생 존경한 사표는 도산 안창호(1878~1938)였으며, 1921년 2월 이광수가 귀국한 것도 안창호의 지령에 따라 흥사단운동을 국내에서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망명객들의 귀국 裏面 폭로」, 『第一線』1932년 9월호). 그가 「민족개조론」의 서두에 "이 글의 내용인 민족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야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이 글은 "이광수의 붓으로 쓰인 안창호의 저작"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백승종, p. 287).

"「민족개조론」은 도산의 구국이론으로 흥사단 이념을 처음으로 세상에 물은 것으로서 의미 깊은 것"이라는 흥사단의 공식 역사서인 『흥사단 50년사』와 『흥사단 70년사』의 서술만이 아니라, "민족개조론을 비롯하여 이광수 군의 모든 논지는 흥사단의 강령을 포연(布衍)한, 일종의 심적 개조를 주장함(「현대경제조직의 모순-어떤 다소간 교양 있는 실업한 숙련직공과의 대화-」, 『개벽』41, 1923년 11월호)"에 있다고 한 공산주의자 주종건(朱種建, 1895∼? )같이 이광수와 지향을 달리한 이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렇다면 박 선생님께서 오늘날에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도산의 민족개조 사상에서 뚝 떼어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시야를 너무 좁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소개되고 이에 대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의 반론이 팽팽하게 파열음을 내던 "거대담론의 격전장"은 『개벽』과 같은 잡지와 신문의 지면이었습니다. 십자포화가 작열하는 당시의 격전장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물질을 토대로 하야 진화하는 이 사회의 모든 불합리를 오직 심적 개조로 근절하겠다 함은 그야말로 연목구어식의 망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고 해 「민족개조론」의 논리를 공격한 주종건이나, 이광수를 먹물을 뿜어 남의 눈을 피하는 문어에 비유하며 그의 「민족개조론」을 "이론의 빈약함을 숨기기 위하여 화려한 문장, 값싼 눈물의 표현인 정열적 수사, 그 위에 이곳저곳 역사책권(歷史冊卷)에서 떼어온 아무 근거의 구명(究明)이 없는 단편적 사례(史例) 등을 제 비위에 맞는 대로 따다가 맞추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본 김명식(金明植, 1890~1943)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필봉에 맞서 이광수를 감싸고 지지하는 쪽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문단의 동료 박종화(朴鍾和, 1901∼1981)는 "춘원을 후욕(詬辱)하는 모든 인사에게 묻노니 도적질을 시키는,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도적놈이 되게 한 자가 그르냐.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 죽지 못하여 도적질 하는 놈이 죄가 더 크냐! 식자(識者) 있으면 그 분변함이 있을 것이다"(「문단의 1년을 추억하여 현상과 작품을 槪評하노라」, 『개벽』31, 1923년 1월)라고 해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식의 옹호론을 펼쳤으며, 백일장에서 "서적비평문"으로 이등상을 탄 간도에 있던 무순(撫順)중학교 4학년생 김경석(金景錫)은 "오직 이때에 우리 머리위에 광명한 서광이 빛나고 우리의 발 앞에 뚜렷한 나침반이 놓였으니 곧 이광수 선생의 「민족개조론」이 그것이다. …조선을 구하고 민족을 살리겠다는 젊은이거든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읽어야 하겠으며 이 사상을 가지고 이 계획대로 노력하기를 바라는 바이다(「民族改造論讀後感-李光洙 著「朝鮮의 現在와 將來」를 읽고」, 『동광』29, 1931년 12월호)"라고 찬탄했습니다. 기독교계 지식인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이나 이찬갑(1904~1974)도 이광수의 변절은 비난했지만 안창호의 사상을 받든 그의 「민족개조론」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백승종, p. 287).

김현주라는 연구자에 의하면, 1920년대 들어 "『개벽』에 등장한 거시적 쟁점은 '조선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였다. '개조' 즉 '세계는 새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기대가 정치적 상상력을 촉발했으며, 낙관적이고 공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토피아니즘이 투영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출되었다"고 하더군요(김현주, p. 113).

왜 민족주의 우파계열의 안창호는 이광수를 도구로 해 「민족개조론」이란 담론을 제기했으며, 이에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논객들은 반론의 집중포화를 쏟아 부었을까요? 「민족개조론」이 『개벽』에 활자로 박혀 세상에 선보인 것은 1922년 5월이었지만, 이광수가 이 글을 탈고한 때는 그 보다 앞선 1921년 11월 "태평양회의" 즉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는 왜 이 글의 탈고 날짜를 서두에 밝혔을까요? 아마 그가 "민족개조론"을 쓴 이유는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비롯된 위기의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 그럼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쓰던 시기의 국제정세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움직임을 개관해 봅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막을 내린 후 식민지 약소민족들은 독립에의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전후 식민지문제 처리에 미·소 양국은 모두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내세웠지만,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원함으로써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촉진시키려한 레닌(V. I. Lenin)과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라는 점진적 방법을 통한 자유무역체제의 구축을 꾀한 윌슨(Woodrow Wilson)의 해법은 서로 달랐지요.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 한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고,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1919)와 워싱턴 군축회의(1921. 11~1922. 2)에서 한국의 독립을 이루려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두 회의에서 미국은 3.1운동을 통해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요구를 묵살하고 말았지요.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로 돌아가서 후일을 기약했고, 서재필은 독립운동 전선에서 물러나 미국에서 본업인 의사로 복귀함으로써 외교독립론은 시들해졌습니다.

이처럼 독립의 가능성이 기약도 없이 사라져 버린 국제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 「민족개조론」인 것이지요. 즉 1907년 신민회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 준비를 지론으로 갖고 있던 안창호가 이광수의 입을 빌려 국내에서 "민족 개조", 즉 국민국가 만들기를 위한 준비를 외친 것이지요.

이에 반해 사회주의 진영은 참가 24개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의 독립보장을 결의한 1919년 8월 9일 제2인터내셔널과 1920년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약속한 소비에트 러시아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나아가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극동노력자회의 참석자들은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서구 열강이 한국의 독립 요구에 대해 외면한 것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발전시킬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립무원의 한국인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믿음직한 한국 독립의 후원자로 다가왔던 것이지요.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도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1917)을 본 떠 자본주의에 입각한 국민국가라는 역사단계를 건너 뛰어 바로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개조론」은 "좌우익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대립 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초입단계에 하나의 쐐기 같은 역할"(김윤식, p. 728 )을 한 것으로도, 그리고 박 선생님 지적처럼 "사회주의 운동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주아 세력들이 매문업자 이광수를 도구로 중간 유식층들에게 놓은 예방주사"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민족개조론」을 둘러싼 공방은 민족주의 진영이 품은 국민국가 만들기를 예비하는 꿈과 사회주의 진영이 품은 사회주의 계급혁명에의 열망이 마주친 데서 나온 담론 대결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족개조론」에 담긴 공중성·위생·교양·단결력·풍속 개량 운운 등에 주목해 볼 때 일종의 국민국가 만들기를 예비하는 기획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국민국가의 원조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어를 말하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에 불과했으며, 프랑스어가 국민의 언어를 정착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또한 유럽에서도 국민국가 만들기가 한창 진행될 때 민족성 즉 국민성 개조론이 홍수를 이뤘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서양보다 뒤늦게 국민국가 만들기에 뛰어든 일본의 경우도 서구인의 도덕 기준에 어긋나는 남녀 혼욕의 금지나 쇠고기 먹기 운동 전개 등 서구인의 기준에 맞춘 민족성 개량 작업에 착수한 바 있으며, 심지어 국민국가를 꿈꾸던 시기의 사상가 중 하나는 왜소한 일본인의 체격을 키우기 위해 서양인과의 혼혈을 제기한 이도 있다더군요.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듯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이란 왕조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조형물"이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공동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근대의 산물인 민족이란 영국 민족의 형성을 풍자한 아래 시에서 보이듯이 본래 순결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모든 것들의 혼합에서
한 영국인(Englishman)이라는 이질적인 것이 시작되었다.
갈망하는 강간들에서, 격렬한 욕정에서,
허식적인 브리튼인(Briton)과 스코트인(Scot)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낳은 자손은 곧 고개 숙이고 그들의 암염소 새끼를
로마의 쟁기에 끌어매는 것을 배웠다.
거기에서부터 이름도, 민족도, 언어도, 명성도 없는,
잡다한 혼혈인종이 나왔다.
색슨인(Saxon)과 덴마크인(Dane) 사이에 주입된
그들의 뜨거운 정맥에서는 새로 섞인 피가 흘렀다.
그들의 음탕한 딸들은 부모들처럼
모든 민족을 무차별한 욕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구역질나는 종족은
영국인이라는 추출된 혈통을 직접 담고 있었다.
-- 다니엘 데포우(Daniel Defoe), 「진짜영국인(The Ture-Born Englishman)」(베네딕트 앤더슨, p. 6에서 재인용)

사실 저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국민국가 만들기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해서 이를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개화기 이래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국민국가 만들기 프로젝트, 갑신정변(1884)·갑오경장(1894-1895)·독립협회 운동(1896-1898)·민족개조론(1922)은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댄 것이었고 이승만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에 이르는 해방 이후의 모든 정권도 미국이라는 외세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19세기에서 오늘에 이르는 한국의 국민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와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는 외세 의존이라는 공통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보입니다. 또한 이러한 외세 의존은 사회주의 쪽이라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방 직후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朴憲永, 1900~1955) "만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 쎄쎄쎄르(소련) 만세!, 세계혁명운동의 수령 스탈린동무 만세!"를 외친 것처럼 일제하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기획한 쪽도 소련이라는 외세에 기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사실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대표격으로 이광수에 대한 심판의 철퇴가 내려지는 오늘날에도 이광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립니다. 일례로 어두운 권위주의 시절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 진보학자 김용준도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회고 글에서 이광수에 대해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의 스승인 함석헌의 이광수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면서 "춘원 이광수를 친일문인 운운하며 매도하는 신문기사를 대할 때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이광수를 감싸더군요(『동아일보』2005년 9월 8일자).

이러한 평가는 박 선생님이 내린 이광수나 김성수에 대한 심판――"이광수의 일제에 대한 반성문인 「민족개조론」은 자신을 팔고 외세에 빌붙는 그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계급의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며, 그가 지적 사기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예속자본가 김성수가 경영하는『동아일보』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광수 개인보다 그 계급 자체를 혐오 경멸하는 것이 더 옳다"는――과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이처럼 군국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에서 냉전 시절에 이르는 시기에 대한 우리의 역사 기억은 합쳐지지 않는 철로처럼 평행선을 달립니다.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국민국가의 시대를 맞아 국민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1919년 3.1운동 이후 그들은 아직 생기지 않은 나라의 모습을 놓고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족독립운동과 민족 해방운동. 역사가의 경우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쪽을 꿈꾸느냐에 따라 역사책에 다른 이름이 올라가지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공격하는 쪽이건 옹호하는 편이건 간에 모두 타자와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다원적 시민사회를 사는 우리의 현재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철이 지나버린 냉전시대의 민족이나 계급 같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거대 담론의 포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 지나칠까요?

그 시대를 산 이들의 머릿속에는 제방에 난 구멍을 고사리 손으로 막아 마을을 구한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가 담겨있지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이 땅의 사람들은 민족의 중흥을 위해 살아야만 했습니다. 전체의 이름으로 낱낱의 희생을 강요하던 시절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신화일 뿐, 아이의 손바닥 하나로 둑에 난 구멍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허나 이에 맞서 민중의 이름으로 새 세상을 꿈꾼 이들의 눈에도 개인은 비치지 않았습니다. 민족과 민중 같은 거대담론이 횡행할 때 개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때를 산 여성들은 남성보다 큰 희생을 강요받았지요. 국가권력과 가부장권 두 개의 족쇄가 여성을 속박했습니다. 현모양처라는 말이 웅변하듯 여성은 민족과 민중의 이름으로 남성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서로 생각과 지향과 이해를 달리 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꿈꾸는 입장에서 「민족개조론」을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저는 이광수 개인보다는 그가 속한 계급과 그를 밀어준 자본 전체를 악으로 보며,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를 착취하는 오늘의 "천민자본"을 소작농의 "피땀을 빤" 일제하의 "예속자본"의 충실한 계승자이기에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은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민족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심판하는 박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주의자들과 자본가 전체를 악으로 단죄하며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은 선한 세력으로 옹호하는 이분법적인 이항대립의 평가는 너무 도식적이고 균형을 잃은 좌편향의 역사 해석이 아닐까요?

박 선생님은 일제하의 "사회주의 경향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과 세계의 개조를 계획"했고, "개인적 안락을 희생할 수 있는 의지력의 차원"이 부르주아 계급과 "천양지차"가 있었으며, 오늘날도 "자타의 경험" 즉 부르주아나 사회주의자의 지난 경험 모두에서 "잘 배우는 좋은 특징을 갖는 혁명가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변질과 패배나 북한의 '현대형 왕조국가'로의 퇴행"을 넘어 "혁명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고 긍정합니다.

허나 약소국의 독립을 도와주겠다던 러시아 적군의 손에 우리 독립군이 무참히 학살당한 1921년의 자유시 참변이나 냉전 시대 소련과 중국 북한과 미얀마에서 벌어진 폭력과 대량학살에 대한 기억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박 선생님의 호평을 마냥 긍정할 수 없게 합니다.

며칠 전 한겨레에 실렸던 공산주의 논객 김명식(1890~1943)의 생애와 사상을 평한 박 선생님의 기고문이 생각납니다. 그 글에서 이광수의 파시즘을 맹렬하게 공격하던 그도 말년에 지조를 굽히고 말았지만 이를 광기의 시대를 산 지식인의 아픔으로 보아 따뜻하게 감싸시더군요.

"물론 김명식에게도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소련이 파시스트 독일과 야합해 그가 유럽의 조선이라고 여겼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실망시키는 등 암흑의 상황에서 일제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리던 말년의 김명식이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창씨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氏制度 창설과 鮮滿一如」, 『삼천리』, 1940년 3월) 등 쓰지 말아야 할 글을 쓴 일이다. 자신을 끝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부르고 개인적으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죽으면서도 '해방될 때까지 내 사망신고는 하지 말라'고 하는 등 나름대로 지조를 지킨 그가 이와 같은 종류의 타협으로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상상이 간다."

사실 이광수를 공격하던 김명식도 일본군국주의의 광기가 몰아치던 시대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허나 이광수와 김명식에 대한 박 선생님의 평가는 혹독함과 감싸안음의 차이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가치와 신념을 고집하고 자기와 지향을 달리하는 쪽을 배척하는 것은 증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키기에 결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경험이 아닐까요? 우리 근현대사는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몬타규와 캐퓰렛 집안 사이의 해묵은 원한에서 놓여나 또 다시 우리의 로미오와 줄리엣들이 비극적 죽음을 맞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다원적 시민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타자와 더불어 살기라는 현재적 목표를 갖고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남긴 공(功)과 과(過)를 균형있게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 이 세상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힘은 나와 다른 꿈을 꾸는 타자들을 배제하고 부정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하고 관용하는 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자신과 다른 꿈을 꾸던 적대세력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도 정파적 이해를 넘어 가치중립적인 평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도움 받은 글들**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3, 한길사, 1986.
김현주, 「논쟁의 정치와 민족 개조론의 글쓰기」. 『역사와 현실』57, 2005.
박노자, 「잊혀진 공산주의자의 향기」, 『한겨레』 2005년 10월 19일자
베네딕트 앤더슨 저,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출판, 2002.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궁리, 2002.
서중석,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 연구』,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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