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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한 친일", 처단에 앞서 정밀한 이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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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족을 위한 친일", 처단에 앞서 정밀한 이해 필요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논쟁 3부<2> 이광수가 지닌 두 개의 얼굴

박노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춘원 이광수(1892~1950)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반백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평과 혹평의 십자포화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극과 극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가 남긴 글들이 읽는 사람의 지향과 시ㆍ공간에 따라 달리 읽힐 소지가 크기 때문이겠지요. 예를 들어 선생님께서 지금도 금기시되는 동성애를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평가하신 <사랑인가?>에 대해서도 "정치경제학적으로 읽으면 일본적 근대화 추구"(안태정), 즉 식민지적 근대화를 내비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광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게 잡혀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反民)법으로 잡혔고, 공산당은 반동이라고 잡아갔다."(<아버님 춘원>, 광영사, 1956)

이광수의 딸 이정화의 넋두리는 그가 '민족'과 '민중(계급)'을 내세우던 이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웅변합니다. '민족'을 앞세우는 쪽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반민족적 친일파"였고,'민중'을 중시하는 쪽의 눈에는 "반민중적 부르주아 세력"으로 비칠 뿐이었습니다.

박 선생님도 "국가와 자본이 존재하는 이상 종교가 설파하는 향기로운 섬기는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을 퇴치, 해체시켜야 한다"는 입장이기에 국가와 자본에 복무한 이광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박 선생님의 평가는 이광수가 겉으로 박애와 자비 같은 "화려한 종교적 수사"를 구사했지만 실제로는 국가나 자본의 "집단주의적 폭력을 찬양하는 비열하고 잔인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한 "극단적 반민중적인 친일 매문업자"나 "명실상부한 일본형 파시스트"였다고 파악하는 점에서 '민중'을 중시하는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모든 역사가 현재의 역사이자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라면, 오늘 우리의 지향이 썩지 않게 하는 성찰의 기억으로 역사는 쉼 없이 다시 쓰여야 하겠지요. 그때 거기를 산 이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오늘 여기를 사는 이들이 바라는 내일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니 말입니다.

이광수가 국민국가의 틀 안에 머문 자본들이 쟁패하던 제국주의의 시대를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자본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그물망을 형성한 제국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며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만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존재하는 자본과 국가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 도시민과 농민,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시민권자와 이주노동자처럼 지향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이는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집단이었지만, 오늘 제국에 맞서 우리의 양심을 지킬 이는 각성된 개체이자 주체로서 시민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민족'과 '민중(계급)' 같은 거대담론을 내세워 어느 쪽이 역사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정당한가를 다툰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역사평가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저는 이광수라는 사과를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커다란 칼로 두 쪽 내기보다는 각성된 주체로서의 시민의 입장에서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한다"는 실증적인 칼날로 사과껍질을 얇게 벗겨 드러난 과육을 고루 저며, 고운 체로 체질해 나가는 미시적 방법으로 그의 삶에 보이는 층위를 세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얇게 벗기기와 체질해 나가기를 통해 이광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다양한 편차를 보이는 그의 사상의 스펙트럼을 보다 잘 이해하게 해주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박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이광수는 1차 유학이 끝날 무렵인 1910년초에 톨스토이 사상에 빠졌고, 2차 유학시기인 1915~1918년 사이에 사회진화론의 지적 세례를 받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는 이광수의 기억이나 실증적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사실 이광수는 손병희의 지원으로 도일해 1905년 8월에서 명치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오산학교 선생으로 부임하는 1910년 3월까지, 그리고 김성수의 후원으로 1915년 9월 다시 도일하여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마치고 동 대학 철학과 3학년이던 1919년 2월 <2·8 독립선언서> 홍보를 위해 상해로 떠나기까지, 두 차례에 걸려 일본에 유학했습니다.

자! 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는 12살 나던 1903년 11월부터 정주 지역 동학당 책임자인 박찬명 밑에서 동학조직에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심부름꾼으로 활약하면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지대도(保國安民之大道)'를 도모하는 동학에서 "겸손과 친절의 정신, 평등의 정신, 그리고 민족주의 정신"을 배웠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손병희의 사상, 그 중에서도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인전(人戰, 사람의 싸움), 언전(言戰, 말의 싸움), 재전(財戰, 재물의 싸움) 삼전이 필요하다는 <삼전론(三戰論)>에 담긴 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더군요.

"평양과 진남포가 모두 일본 사람의 판이요, 배도 차도 다 일본 사람의 것임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의 운명을 슬퍼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일찍 일본 동경에 있는 도주님, 즉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국내 각 도인에게 보낸 <삼전론>이라는 글을 생각하였다. <삼전론>에 의하면, 지금 세계는 우승열패, 약육강식, 즉 잘난 놈은 이기고 못난 놈은 져서 약한 놈의 살을 강한 놈이 먹는 생존경쟁의 시대다. … 잘난 사람이 많고 말을 잘하고 재물이 많은 자는 이기고, 그것들이 없는 자는 진다. …교육과 산업으로 민족의 실력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나도 지금 공부하러 떠난 길이었다(<나의 고백>, 1948)."

1905년 1월경 일본 유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일본사람들이 판치는 평양과 진남포를 보면서 손병희의 <삼전론>을 되새겼다는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사회진화론을 접한 것은 1903~1904년 무렵이 되겠지요. 그는 1차 일본유학 시절인 1907년경에 기독교와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에, 그리고 2차 일본유학 시절인 1917년 무렵에 비폭력(Ahimsa)을 통한 진리파지(Shata Graha)를 외친 간디의 무저항 민족운동에 심취했지만, 이를 받아들인"정신의 터"는 민족종교인 동학이었다고 술회합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적에 성경을 배웠고, 또 톨스토이의 저서를 애독하여 그의 무저항주의에 공명하였고, 또 그로부터 십년쯤 지나서는 간디의 진리파지(眞理把持)와 무저항 운동에 심취하였거니와, 이것은 아마 내가 동학에서 배운 정신이 터가 된 것일 것이다(「나의 고백」)."

격동기를 산 이광수는 10대 이전에는 무속신앙을 믿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유학의 마지막 끝자락을 놓지 않고 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10대에 들어와서는 동학사상, 톨스토이의 박애주의, 기독교, 불교, 그리고 사회진화론과 같은 다양한 사조의 지적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일관되게 꿰뚫은 것은 '민족'이나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에 올 '국가'였습니다.

그는 박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1915~1918년 사이가 아니라 1910년에 이미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애국주의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 … 나는 이름만일 망정 극단의 크리스천으로, 대동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본능만족주의자로 드디어 애국주의에 정박하였노라." 이광수가 1910년에 쓴 <나(余)의 자각한 인생>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가 힘을 앞세우는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선 짐승(獸)이 되고 연후에 사람(人)이 되라>(1917)를 쓰기 훨씬 전부터, 관념적 '민족'이나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지요. 제 판단으로는 이광수가 한 얼굴로는 종교적 사랑을 예찬하고 다른 얼굴로는 일그러진 근대를 찬양한 두 얼굴의 야누스적 존재이기보다는 '민족'이란 실에 그가 삶의 궤적에서 만난 다양한 사조라는 구슬들을 꿴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1910년대 초반에는 톨스토이의 박애주의에, 1915~1918년 사이에는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이래 서로 다른 두 사상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박 선생님의 진단과는 달리,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가치는 국가주의 내지 민족주의였고,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들은 민족과 국가에 유익한지 여부에 따라 취사선택했던 종속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1910년 명치학원을 졸업한 그는 오산학교의 교사로서 민족운동의 첫 실천에 나섰다고 합니다.

"내가 민족운동의 첫 실천으로 나선 것은 교사로였다. 열아홉 살 먹은 중학교 졸업생이 교사가 된다는 것이 지금에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으나 그 때에는 애국지사의 행동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버린다는 것은 평생의 개인적 영화의 야심을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고주(孤舟)'라는 호를 가졌었으나 교사가 되어서는 '올보리'라고 자칭하였다. 올보리란 맛있는 곡식은 아니나, 다른 것이 아직 나기 전에 굶주림을 면하는 양식이다. 나도 좋은 양식이 되려는 야심을 버리고 급한 데 임시로 쓰이는 올보리가 되자는 것이었다."(<나의 고백>)

민족의 '올보리'로서 살려던 그의 꿈은 톨스토이 사상과 다윈의 생물진화론을 학생들에게 전파해 신앙심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오산학교를 운영하던 교회의 배척을 받아 3년만인 1913년 학교를 떠나게 됨으로써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중국과 러시아 여행(1913~1914)과 2차 일본 유학(1915~1919)을 거쳐 1921년 귀국한 후 3.1운동 이후 일제가 취한 소위 문화통치에 타협해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쓰루미 슌스케가 쓴 전시 일본(1931~1945)의 정신사인 <전향>이란 책을 읽다보니 당시 전향은 투옥과 고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당시 사상경찰이 급진파 대학생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즐겨 쓰던 기술의 하나가 '오야꼬 돔부리(親子丼, 닭고기덮밥, 달걀과 닭고기가 그릇 안에 있는 밥 위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부모(親)와 자식(子)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를 사주며 전향을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미 1921년 귀국 시에 신의주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려 구치되어 있을 때 "오야꼬 돔부리"를 먹었더군요. 그 때 이미 그는 당시 말로 소위 '전향'을 한 것일까요?

"갑갑한 몇 시간이 지나서 시장함을 느낄 때에 나는 다시 사범 주임실에 불려 나갔다. 거기는 박주임이 있고 '오야꼬 돔부리' 한 그릇이 있었다. 나는 맛있게 먹었다. …오후 네시나 되어서 나는 서장실로 불려갔다. 그는 '야마구치'라고 쓰인 전보 한 장을 들고 앉아서 나더러 밤차로 서울로 가라고 하였다. 뒤에 알고 보니 '야마구치'는 그 때 경무국 고등경찰 과장이었다. 징역을 각오한 아로도 제 발로 서울까지 가라는 것이 기뻤다. … 그 때는 소위 재등(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책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자가 들어오면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나의 고백>)

어쨌건 이광수는 귀국 후 민족성을 바꿔 민족산업을 키우고 근대 시민으로 거듭나라고 주장하는 <민족개조론>(1922)과 자치론을 설파한 <민족적 경륜>(1924)과 같은 글을 세상에 내놓는 등 민족주의 우파 실력양성운동 계열의 대표적 논객으로 활동하였지요. 당시 그는 문인, 사상가, 교육자로서 자신이 펼친 모든 활동은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하는 봉사 의무의 이행"(<여(余)의 작가적 태도>, 1931)에 있었다고 자부했으며, 장편소설 <흙>(1932)에서도 주인공 허숭의 입을 빌려 "차라리 이태리의 파시스트를 배우고 싶다"고 할 만큼 '국가'를 하나의 절대적 귀의처로 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묘비에 "이광수는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다"(<나의 묘지명>, 1936)라고 쓰이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후세에 '민족주의자'로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사상적 지주였던 '비폭력 민족운동'의 대부 안창호가 병사(1938)한 이후 '민족을 위한 친일'의 대표적 논객("친일 내셔날리스트")이 되어 "자손의 행복이라는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인'이 되고자" 했습니다(조관자). 따라서 그는 실력양성을 이야기하며 몸을 움츠리던 과거의 자세에서 벗어나 '내선일체'로 상징되는 제국 일본의 하늘 아래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의 '하나됨'이라는 대의를 깨닫지 못하는 '일본인'의 미욱함을 질타하고 훈계하기까지 하였습니다.(<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1940), <그들의 사랑>(1941))

나아가 "징용에서는 생산 기술을 배우고 징병에서는 군사 훈련을 배울 것이다.… 산업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은 동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민족의 실력은 커질 것"이라 하여, 조선인이 제국 일본의 성장에 공헌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는 "그대들이 피를 흘린 뒤에도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거든, 내가 내 피를 흘려 싸우마(<나의 고백>)"라며, 조선 청년들에게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의 신문을 받으며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확신범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의 친일을 '훼절' 내지 '변절'의 문제로 파악하거나, '문학적 공(功), 정치적 과(過)'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김철의 지적과, "강자의 문명과 패권을 욕망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적'인가, '친일적'인가, '친미적'인가 하는 문제는 상황변수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친일이라는 죄과를 기준으로 그들을 심판하는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파시즘의 망령을 경계하는 조관자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남북분단 이후 진정 하나되는 민족을 가져보지 못한 우리들이 실재하지도 않은 민족의 이름으로 이광수와 같은 "친일 내셔널리스트"를 처단한다고 해서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가 사라지지는 아닐 터이니 말입니다.

사실 박 선생님이 "'나눔의 윤리'에 입각한 새 사회를 건설하려고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다"고 본 공산주의자들조차도 대다수가 '오야꼬 돔부리'를 먹고 전향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니 말입니다. 쓰루미 슌스케의 책에 의하면, 유명한 공산주의자로 일본 공산당의 위원장 사노 마나부(佐野學)와 그와 함께 최고지도자로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貞親)가 감옥에서 공동성명을 내고 전향을 발표한 것이 1933년이었습니다. 자본과 국가의 지배에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도 그때까지 주장해 왔던 천황제 폐지나 식민지 민족들의 자치 등 제국 일본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철회하였습니다. 이들이 전향한 후 투옥 중이던 공산주의자의 74%가 3년 내에 그들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슌스케에 의하면 그들의 사상 변화가 국가권력이 행사한 물리력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대중들의 보여준 만주사변에 대한 열렬한 환영에서 받은 충격 ― "스스로의 몸을 소모시켜가며 헌신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민들이 그들의 신념과는 전혀 반대되는 목표를 지지하는 데서 온 인민으로부터의 고립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파시즘이 지배하던 시절에 공산주의자조차도 시대의 광기에서 자유롭기란 지난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는 신화화된 '민족'이나 '민중'의 이름으로 이광수 같은 친일세력을 심판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신념처럼 여겼던 '민족을 위한 친일'의 논리구조를 파헤치고, 필경 시민적 자유의 적이 될 '우리 안의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이 풀어야 할 우선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가을의 중반을 넘어서는 수원의 연구실에서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한길사, 1986.
김철, <친일문학론: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 관련하여, 이광수와 백철의 경우>, 민족문학사연구 8, 1995.
안태정, <이광수, 부르주아지의 욕망을 대변한 식민지 근대화론자>, 내일을 여는 역사 8, 2002.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기억과 역사의 투쟁, 삼인, 2002.
쓰루미 슌스케 저, 최영호 역, <전향>, 논형,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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