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부부들이 예전보다 아이를 덜 낳는 한편 사람들이 예전보다 오래 살게 되면서 노인들이 많아진다는 이른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우리 사회의 논쟁거리가 돼 있다. 그러나 '왜 그것이 문제인가'에서부터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이 현상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는 아직 충분히 진전되지 못했다는 것이 <프레시안>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프레시안>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한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시민은 기자에게 투덜댔다. 또 저출산·고령화냐고. '저출산'과 '고령화'를 이어 붙여 '저출산, 고령화'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는 기업적 관점이자, 관료적 발상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기획 시리즈를 내보내려면 저출산 및 고령화 현상을 개인의 삶의 질 차원에서 다뤄달라"고 주문했다.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한국사회를 지향하는 보도태도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흔히 저출산 대책으로 보육시설의 확충 등 '여성의 일과 가족의 양립에 대한 지원'을 꼽는다. 그러나 여성들의 편의를 좀 봐주겠다는 접근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 이번 기획에서는 일과 가족의 양립이 필요한 사람은 왜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인지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해 보육의 사회화, 아버지의 육아휴직제 등 필요한 국가정책, 저출산을 강요하는 기업문화의 현실과 개선책 등을 다룬다.
고령화에 관한 후반부의 기획기사에서는 우선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가 갖게 된 하나의 잠재의식을 깨뜨리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노인은 젊은 세대의 행복을 앗아가는 사회의 짐이자 재앙'이라는 의식이다. 그 다음에 노인들 개개인의 품위 있고 활동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이 어떻게 '미래의 노인'인 젊은 세대에게도 이익인지를 살펴본다.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는 노년층과 비노년층이 윈-윈하는 방향으로 국가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돼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준비된 이번 <프레시안>의 기획 시리즈 '저출산고령화의 덫'은 전반부에서 '저출산 문제'에 대해 몇 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내는 데 이어 후반부에서 '고령화 문제'에 대해 다시 몇 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낸 다음 종합적인 토론과 결론도출을 시도할 예정이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논평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편집자>
[저출산고령화의 덫 -저출산 문제 1] 사냥꾼과 전사로 살아야 하는 한국사회
지난 10월 10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이른바 '임산부의 날'이 선포됐다. 국회의 '저출산고령화사회 대책특위'가 주최하고 의사협회가 주관한 행사였다.
평소 부른 배로 길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던 임신 여성들이 이날 행사에서는 주인공으로 따뜻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임산부 권리 선언문'도 낭독됐다. "임산부는 직장의 채용, 승진, 해고에 있어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 임산부와 그의 소속 직장은 국가 모성보호 정책의 배려대상이다. 국가는 임산부의 권리를 수호해 임신, 출산, 육아를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여자 책임"인 이유**
그러나 이 행사 소식에 임혜숙(40)씨는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 9년째에 접어든 노조 상근자인 그녀 부부는 아이가 없다.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둘 중 하나도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였다. 아이를 낳아 기를 돈도 없었고 형편도 안 됐다." 임씨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사실 결혼 후 3~4년 동안은 양가 부모와의 갈등에 시달렸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라는 질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안 낳는다고 욕을 먹고, 아이를 낳아도 직장 일을 계속하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며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다 '여자 책임'이라고 여성들을 옭아매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씨의 이런 말은 '성차별'이나 '인습적인 성역할'에 대한 항변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의 말 속에는 합계출산율(한 여성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이 불과 30년 만에 4명에 가까운 수준에서 1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까지 크게 떨어지게 된 원인을 파악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들어있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그동안 크게 확대돼 가정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됐음에도 아이를 기르는 일상적 책임이 압도적으로 여성에게 지워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돌봄노동(Care Work)의 공백' 현상이다. '돌봄노동'이란 '유아기, 성장기, 노인기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노동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성학자들이 '타인을 보살피는 일'을 개념화한 용어다. 따라서 '돌봄노동의 공백'이란 가족, 특히 보살핌이 필요한 노약자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는데 갈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 나가 일을 하게 되면서 가정에 그런 일을 할 인력이 부족해지거나 없어지게 됐다는 뜻이다.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최근 합계출산율이 1.16까지 떨어지자 인구의 관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하지만 합계출산율의 저하는 단순한 인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돌봄노동의 공백과 관련된 문제로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생계부양 책임자로서의 남성과 가사 전담자로서의 여성'이라는 가정의 모델을 떠받치던 토대가 계속 허물어져왔다. 다시 말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면서 부부가 둘 다 바깥일을 하게 됐음에도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이 주로 해야 하기에 여성에게 부과되는 불평등한 이중부담이 여성들로 하여금 혼인이나 출산을 기피하거나 지연시키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냥꾼과 전사의 사회에서는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남성이 돌봄노동을 충분히 분담하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생존조건상 실효성이 없다. 이재경 교수는 "남녀 모두 '일의 책임과 가정에서의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가정 친화형' 노동시장 및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순히 여성의 부담을 좀 덜어주겠다는 수준에서 접근하는 정책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힘들다"고 단언한다.
왜 그러냐면 한국은 '사냥꾼과 전사(戰士)들이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인 게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데, 이런 한국사회에서 표준적인 노동자 모델은 '돌봄노동의 책임'이 면제된 '남성 생계부양 책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재경 교수는 "여성들도 이 모델에 맞춰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집에 가서 애나 봐라'라는 말이 대변하듯 돌봄노동에 대한 저평가가 만연해 있는 게 한국사회"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고등교육과 직장생활을 통해 '개인으로서 자기이익에 충실한 합리주의 문화'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돌봄노동을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런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도 폭넓게 확산됐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사냥꾼과 전사의 사회'가 갖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은 '장시간 노동'이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의 유정미 연구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 또는 타인에 의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데, 오늘날의 노동은 누구든 집에 보살펴주는 이를 가진 '사냥꾼'이 하는 노동이라는 전제 아래 이뤄진다"며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이 갈수록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면서 남녀를 막론하고 전사가 되어가고 있거나 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돼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담과 압박은 고스란히 가정으로 전가되며, 이 점에서는 굳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의 장지연 연구위원은 "흔히 저출산 대책은 여성정책이라고 오해하는데, 남성들의 삶의 조건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있다는 전제 하에 저출산 문제에 접근하면 백발백중 실패"라며 "일과 가정의 양립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오히려 남성들"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박수미 연구위원도 "말로 아무리 모성을 찬양하고 캠페인을 벌여봤자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가정의 모델에 얽매어서는 오늘날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돌봄노동의 공백을 메울 방도가 찾아질 수 없다는 의견인 셈이다. 박 연구위원은 "고용의 불안정, 만혼의 증가와 이혼율의 상승 등은 서로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로 남녀 모두 경제력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므로 보육의 '사회화'와 '양성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돌봄노동의 공백이라는 문제가 저출산과 직결된다는 점은 국가 간 비교에서도 확인된다. 흔히 개발도상국 단계를 넘어선 나라들은 모두 다 저출산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간 비교를 해보면 나라마다 그 양상이 다소 다르다.
***성평등 수준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라들이 '출산율 세계 꼴찌'**
국가 간 비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노동시장과 가사분담에서 성평등의 수준이 아예 높거나 아예 낮은 나라들에서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지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나라들(한국, 일본, 싱가포르,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출산율이 낮다는 점이다. 이런 어중간한 나라들은 그 대부분이 부계혈통 중심의 보수적 가족문화 전통이 남아있는 유교문화권이나 가톨릭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표1: 유엔개발계획(UNDP)의 성평등 지수와 출산율 비교 그래프>
<표2: 스웨덴, 프랑스, 영국과 한국의 출산율(1960~2005) 비교 그래프>
<표3: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독일과 한국의 출산율(") 비교 그래프>
<표4: 여성의 경제참가율 비교 그래프>
- 출산율이 안정된 나라들의 경우는 역U자형, 한국은 아직도 경력단절을 나타내는 M자형
한국보다 일찍 '저출산 대책'을 실행한 유럽에서도 '남녀 간의 성별분업 유지'를 전제로 대책을 마련한 독일과 스페인의 출산율이 가장 낮다. 이들 국가의 저출산 대책은 부모휴가, 육아수당, 보육시설의 확충보다는 '여성에 대한 육아휴가 보장'을 중시해 여성들에게 육아의 책임을 맡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재경 교수는 "한국 여성들의 경우 이제 '결혼퇴직'은 거의 사라졌지만 IMF사태 때 여성이 해고 1순위였던 데서 보듯 여전히 여성의 취업은 선택일 뿐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며 "그러나 이제 여성에게 일은 점점 더 선택이 아닌 생존수단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고 남녀 모두에게 '일과 가정'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게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의 희망에 의해서건 사회경제적 압력에 떠밀려서건, 이제 한국사회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과 가정'을 둘 다 감당해야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그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돌봄노동의 공백'이고 '맞벌이 부부의 가사일 신경전'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가며 일하고 사는 일이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점점 더 힘겨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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