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이 정치군인의 선의에 의해 좌우되는 격이었다. 정치군인의 권력욕이 발동하면 언제든 정권찬탈도 벌어지고 승진과 보직 면에서 만족하면 현상유지가 가능한 현실이었다. 객관적인 국가 위기보다도 주관적인 개인의 탐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반란이다. 사적인 권력욕을 그럴 듯한 공적인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이 후진국 군사쿠데타 주모자들의 특징이다. 이때 등장하는 '포장지'가 대체로 국가안보와 자유 수호니 도탄에 빠진 민생 구휼이니 하는 공작적 구호다.
반란군 주모자와 정부측 육참총장 간의 격의없는 대화
그러나 5.16 군사반란 당시 국가안보의 경우 세계적 냉전체제에서 자유진영의 전진기지 격인 남한을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사령부가 지켜주고 있었다. 6.25전쟁으로 그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배운 북한이 또 다시 전면전을 도발한다는 것은 '상상'에 불과했다. 박정희가 5.16 후 10년 만에 종신집권을 위해 다시 한 번의 유신쿠데타를 감행할 때도 북한의 남침위협론을 들고 나섰다. 그러자 미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권위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1971년 12월20일자 아시아면에서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대해 '상상적 비상(imaginative emergency)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5.16반란세력이 내세운 다른 하나의 명분인 경제개발은 이미 장면 정부 때 경제관료들에 의해 계획돼 있었다. 연구자들은 경제개발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로 유능한 개신 관료들의 역할을 꼽는다. 그것을 실천한 리더십으로 박정희의 공을 평가하는 것은 많은 논란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원동력이'강권통치자의 개발독재'인가, 아니면 '국민의 투지와 피땀'인가를 둘러싸고 앞으로도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5.16이 국민주권을 무시한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이라는 것은 후세의 역사 평가에 맡길 필요가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역사 평가에 남겨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이후 경제개발의 공과에 관한 부분일 뿐이다.
5.16 군사반란은 정상적인 군대 조직과 국정 관리 아래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반란군 수괴인 박정희와 그것을 막아야 할 정부 측 대리인격인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사이에 거사 예고와 반대 의견을 놓고 여러차례 대화가 오갔다는 점이 그렇다.
만일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어느 군 장성이 쿠데타를 꾀한다는 설이 나돈다고 상상해 본다면 그것은 어김없이 무서운 조사와 징벌의 대상이다. 따지고 보면 권력에 대한 도전이나 정부 전복 음모가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로 감시되고 단죄되는 것은 중앙정보부와 군 보안사령부를 창설한 박정희 정권 이후부터였다. 그것도 권위주의 정권의 특징 중 하나였다.
사회혼란상 보다도 박정희의 권력욕이 주범
박정희 정권 이전까지 군은 상하 계급 간 위계질서나 조직규율에 대한 존엄성이 그다지 엄정하지 않았다. 창군된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장교들의 임관 종류가 잡다했고 상급자가 하급자보다 나이가 적은 경우도 허다했다. 박정희도 육참총장 장도영보다 나이가 4살이나 위였다. 또 만주군과 일본군 시절의 상하계급이 해방 후 조선경비대 임관 순서에 따라 뒤바뀐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대드는 하극상 사건도 종종 일어났다. 군 기강이 확립되지 못한 것은 물론 군 통수권자인 정부 수반에 대해서도 경외심이 없었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도화되지 못했으며 그것을 이행할 장치도 없었다. 말하자면 무력을 보유한 군대가 정부의 통수권과 군내 지휘체계에 복종하지 않고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멋대로였다. 이럴 때 권력 야심을 가진 정치군인이 정권찬탈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군내부에서는 박정희가 주변에 쿠데타 계획을 얘기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것이 국방장관 현석호와 국무총리 장면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갔다. 장면은 육참총장 장도영을 서너 차례나 불러 군부 쿠데타설이 떠도는 배경에 대해 물었다. 그 때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부인하면서 군에 대해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안심시켰다.
그것은 장도영이 장면을 속이려 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평소 쿠데타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기 때문에 정말 일을 저지르리라고 믿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동기생으로 막역한 전우라 할 수 있는 이한림 1군사령관도 그에게서 쿠데타 언사를 수차 들었다. 그 때마다 이한림은 박정희에게 위험한 말을 삼가라고 충고하곤 했다.
5.16은 사회혼란상이나 민주당 정부의 무능보다는 박정희의 타고난 권력욕과 정치군인 기질 때문에 터진 정권찬탈이었다. 군사반란을 주도한 박정희와 육사8기 9명의 충무장 결의 집단은 4.19혁명 이후 학생시위가 격화되기를 기대했으며 그것을 거사 명분으로 삼으려 모의했다.
▲ 5.16 군사반란 후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반란군에 동원된 부대 장병들에게 훈시하는 장도영 당시 최고회의의장. |
황군 장교 박정희의 금의환향과 첫 위세 과시
박정희의 권력욕은 일제 때 비교적 봉급도 괜찮았고 사회적 지위도 좋았던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충성혈서를 쓴 뒤 입교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일제하 면서기도 유지노릇을 했다. 그런데 면서기 월급이 20원일 때 사범학교 학생은 그 두 배의 수당을 받았으니 교사가 되면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박정희는 그런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황군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고향 방문 길에 오른다. 20대 젊은 장교의 금의환향인 셈이었다. 자신이 교사로 근무하던 문경보통학교가 있는 읍내로 간 그는 군수와 경찰서장, 그리고 교장을 불러모았다.
그는 군 장교의 위풍재와도 같은 긴 칼을 빼어 방의 문턱에 꼽고는 지방 관리들에게 4년여 전의 옛 유감을 따졌다. 세 사람의 문관은 황군 소위 박정희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군군주의 체제 아래서 황군 장교의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다. 박정희가 교사직을 버리고 어렵게 군관학교에 간 것은 군국주의 체제에서 바로 이처럼 권력의 소재가 어디인지를 잘 알았으며 그것에 따른 출세욕의 발로였다.
4.19 혁명을 보면서 더욱 군사반란에 의한 정권찬탈 의지를 다진 박정희는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자신이 군관학교 시절부터 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을 포섭했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거사가 성공을 거두기 위한 관건은 육참총장인 장도영을 끌어들이는 일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반란에 대한 진압군 동원을 막을 수 있다.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동기이며 친구이지만 군인의 정치개입과 군사반란에 극력 반대의사를 피력해 온 1군사령관 이한림이 마음에 걸렸다. 전투력과 조직이 강한 야전군이 반란군 진압에 나설 경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사전에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육군 총수인 장도영를 포섭하는 일이었다. 4.19 혁명이 나기 전 장도영이 대구에서 2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는 이미 그에게 정권찬탈을 위한 거사의 뜻을 얘기한 바 있었다.
그 때 장도영은 "군사혁명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생각을 밝히면서도 "박 장군이 잘 해 보시오"라고 응대했다.
장도영, 일본군 동지의식과 육참총장 권능 사이에서 혼란
박정희는 그런 장도영이 육참총장에 올랐으니 그를 포섭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61년 4월10일 박정희는 대구 2군사령부에서 상경해 육참총장실로 장도영을 찾아간다.
"각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시지요."
"박 장군이 웬 일이요. 이거 반갑습니다."
"최경록 사령관이 미국에 출장 중이니 박 장군이 좀 바쁘겠소 그려."
"아닙니다. 사령관 대리도 와 계시고 하니 저는 그저 한가합니다."
육참총장에서 정군파동 때문에 2군사령관으로 좌천당한 최경록이 미국 방문길에 오르자 육본은 부사령관 박정희가 있음에도 김용배 중장을 사령관 대리로 내려보냈다. 그만큼 군 수뇌들이 박정희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지 않았다. 박정희는 더 이상 진급할 가능성도 없어서 5월말이면 예편이 예정돼 있었다.
"대구에서 언제 상경했소?"
"어제 올라왔습니다."
"비둘기작전은 잘 준비돼 갑니까. 그것 때문에 좀 바쁘겠구려."
비둘기작전이란 4.19혁명 1주년 때 학생시위 사태가 다시 터질 것에 대비한 진압계획을 뜻한다. 정부와 군은 또 다시 큰 시위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사8기 9명의 충무장 결의 그룹은 거사 날짜를 바로 이 4.19혁명 1주년 기념일로 잡았다.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혼란상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선다는 음모였다. 정부와 군 수뇌부는 시위사태가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진압계획을 준비했고 반란 음모세력은 혼란이 불거질 것을 기대하는 동상이몽이었다.
"각하, 좀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2군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각하, 지금 이 나라 꼴이 그냥 놔둬도 되겠습니까? 나라를 구할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뭐, 뭐요? 혁명이라니 …"
장도영은 놀랐다. 박정희가 전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거사를 논의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어안이 벙벙한 장도영에게 몸을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학생들이 남북교류를 하자고 하질 않나, 용공적인 구호도 나오고요, 정부는 무능하고 혼란이 더 짙어지고 민생은 먹고살기조차 더 어려워지고 있잖습니까. 이대로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다간 나라가 절단나게 생겼습니다. 뜻있는 군 장교들이 나서서 혁명을 해야 합니다."
"박 장군, 지금 혁명을 해 갖고 성공할 수 있겠소?
"결과는 하늘에 맡기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잘못되는 날이면 그만한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각하께 결로 누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 영도자로 나서 주십시오."
지금까지 박정희에게는 장도영이 상관으로서 여러 차례 은덕을 베풀었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두루뭉수리로 포용력을 보여 온 장도영도 여기서는 무언가 분명하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군사반란을 함께 하자는 박정희에 대해 일본군 출신으로서 동지의식과 육군 총수의 권능 사이에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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