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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넓고 깊은 세상의 배꼽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제2부 <10> 문학동네 사장 강태형과 편집위원 신수정

80년대 초 갓 상경한 강태형(은 `형`이 아니라, 성이 `강`이고 이름이 `태형`이다)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프로필은 좀 어수선했다. 갓 데뷔한 시인이자 돼지 값이 폭락하여 호되고 쓴 맛을 본 정부 지정 영농후계자인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챔피언 직전에 턱을 다쳐 프로 생활을 접은 전직 권투선수인데다, 다소 민속적인 신기(神氣)의 세계에 달통해 있었던 것(수 년 전 내가 기가 세다나 어쨌다나, 하여 그에게 거의 속아서 끌려가 파주출판단지 <문학동네> 사옥 터를 `밟아준` 것은 매우 유쾌한 경험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70년대 `가난의 열광`과 연관된, 그러나 따로끼리는 아무 상관이 없는 요소들을 어설프게 걸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빈틈없이 잘 생긴 외모가 날라리 티를 허용하기는커녕 역시 빈틈없는 (촌놈의) 성실성을 집약-발산하는 형국이라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를 쥐락펴락하던 채광석(작고, 문학평론가)은 별로 부탁도 안 하던 그를 청탁한 것으로 치고 덜커덕 자실에 취직(이라기에는 `임금` 수준이 형편 없었지만)시켜버리는 덕에 나는 그를 엉겁결에 `직계`로 부리게 되었고, 그건 나같이 피곤한 팔자에 드문 횡재 중 하나였다. 그처럼 궂은 일을 날밤 새며 꾸준히, 그리고 정교하게 해내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은 사람을 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일이 없지만, 그 덕분에 나는 술 마시다 깨서 확인하고, 다시 술 마시다 깨서 확인하고, 그러는 식으로 `잠과 술` 밤만 새면 시인 노릇 활동가 노릇 만사형통이었지만(그래서 내가 `강`태형과 강`태형`을 혼동하는 모양이다), 정작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어영부영 출판사를 차리고 고전하고, 북한 책 내서 징역까지 살고 뭐 그런가보다 했더니 그가 후배들한테 `나 고생 할 때 니들 뭐했냐?`하는 운동권 촌티는 아예 벗어버리고 창비와 문지(훗날 문사) 이래 가장 강력한, 그리고 전혀 다른 `문학동네`(는 물론 출판사 및 잡지 이름이기도 하다)를 이뤄냈던 것. 그가, `자실` 어른들을 홀대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옛 선배 혹은 어른들, 혹은 동지들에 대한 그의 마음 씀씀이는 탄탄하고 자상하다. 어느날 강태형한테 `그냥 쓰세요`라는 말과 함께, 워드프로세서 한 대를 선물 받은 이문구(작고, 소설가)가 7년 후 소설 원고를 그에게 주며 `자네한테 받은 워드프로세서로 썼으니 자네가 내주게`했다는(그 원고가 바로 화제의 동인문학상 수상작이자 마지막 소설창작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다)는 얘기는 유명하지만, 숱한 사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문학동네> 출신, 혹은 <문학동네>를 통해 주로 활동하는 작가 수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중견 및 신예의 반을 훌쩍 뛰어 넘고, 그 흐름을 주도, 혹은 마련하는 평론가들 또한 그러하며, 그의 돈 씀씀이는 풍성하면서도 합리적이라, 그를 잘 나가는 출판사 사장치고도 잦은 술자리 물주에서 어언, 특히 `남북작가회담`을 계기로 일약 <작가회의>의 `딴주머니`로 격상시켰을 정도다. `딴주머니`란 어떤 지리하게 오래 걸리는, 그리고 까다로운 일을 준비할 때 이렇게 저렇게 드는 비용을, 아무리 공적이지만, 그때그때 청구하기 귀찮으므로 그냥저냥 개인 돈으로 해결케하고, 나중에 합산해 받아야 하지만, 뭐 궂이 따져 달라지도 않는, 그래서 이래저래 일하는 놈 편하고 단체로서는 요긴한, 가난했던 80년대는 물론 살 만해진 90년대 초에도 없다가 90년대 말 살 만해진 것을 뒤늦게 깨달으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한, 그리고 후배들한테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단체 재정 보조역으로, 이것도 그가 최초일 것 같다. 그의 <문학동네>를 기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가 너무 `노동적`이며, 그가 꾸린 편집위원들은 너무 문학-과학적이다. 어쨌거나, 그의 육성을 들어보고 싶은데, `상당한 권위`가 어른들한테도 통했는지, 그가 아주 중요한 역할(대변인)을 맡고 남북작가회담차 북한에 가 있으니, 그의 육성에 어울리는 시 한 편을 우선 읽을 밖에 없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그리고 강태형을 배경으로, 대타로, <문학동네> 편집위원 중 1인을 부를 밖에 없다. 내친 김에, 이왕이면, 여자로. 문학동네 편집위원 중 여자는 1인 밖에 없고, 그녀가 바로 신수정이며, 다행히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 평론가다. 그럴라고 보니, 특히 신수정은 `문학동네 11년 중 8년`을 편집위원 노릇을 해서가 아니라, , `문학동네 11년` 중 8년을, 강태형이 배경이 아니라 강태형의 배경 같기도 하다. 이거 잘 하면, 모처럼 북한 덕 보게 생겼네…신수정은 웃음이 싱그러움을 맘껏 발산하며 `킥킥`과 `쿡쿡`, 그리고 `와하하` 사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통에 미인이라는 사실이 얼핏 은폐되는 동시에 몸 전체로 발산 혹은 육화, 마냥 하늘거릴 듯한 몸짓이 돌연 맞바람에 몸을 흔들어주는 63빌딩을 연상시키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흔들림의 미학을 구현하는 스타일이다. 그것은 그(녀)의 평론도 그렇다. (그녀 남편 진정석 또한 평론가인데 외유내강이 너무 무르익어 바야흐로 달마선사화하기 직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다는 전언의 매력을 풍긴다. 그의 평론 또한 그렇다.)같은 평론가 편집위원인 류보선이 우직할 정도로 탄탄한 내용을 펼치고, 서영채가 `뼈대로서 윤`을 내고, 황종연이 `윤으로서 뼈대`를 세운다면 신수정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라는, 다소 기괴하지만 정확한 평론집 제목이 보여주듯, `핏덩이` 작품 혹은 작가의 생애를 다소의 전망과 기대를 갖고 지켜볼 뿐, 좀체 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어떤 날 것인 상태의 작품, 새로 나오는 작가들을 좀더 눈여겨 볼 뿐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형식을 기존의 입장이 아닌 그 작가, 그 작품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 이 방법론은 얼핏 겸손한 것 같지만, 천만에, 산파(産婆)의 방법론이 겸손할 리는 없다. 신수정이 강태형의 배경인지 강태형이 신수정의 배경인지 모르는 어느 사이 `문학동네 평론`은 리얼리즘을, 단지 겉돌거나 에두르기는커녕, 관통하고 그 너머를 지시해버린다. 그리고, 단단한 이론의 성채가 아니라 `지시하는 그물망`으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감각의 좋은 형성 방향을 낚아채고, 낚아챔으로써 좋은 형상화를 추동한다. `문학동네`의 힘의 근원이자, 문학활동의 근원이다. `리얼리즘 너머`란 무엇인가?

이승우 소설집 <심인광고>는 끈질기게, 신성을 문학화하는 식으로 현실화하고 현재화하므로, `性=죽음=聖`의 등식이 자못 후기낭만주의적임에도 불구하고 작품현실이 태어나는 정황이 `민족적`이고 `현대적`이다. 조경란 소설집 <국자이야기>는 정신분열적인 문체가 이야기의 감동을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면서 멀쩡해지는 과정의 정황이 `민족적`이고 `현대적`이다. 강영숙 소설집 <날마다 축제>는 난무하는 문체와 절망적인 현실이 상호 쟁투 혹은 상호 상승을 난무하는 문체가 더욱 난무하고 절망적인 현실이 절망의 현실로 `악몽 판타지`하는 과정의 정황이 `민족적`이고 `현대적`이다. 정영문은 끊임없이 현실을 의미 없는 문장으로 거의 해체하지만, 그 와중, 이를테면 과수원 일일 노동자의, 스스로 의미를 해체하는 독백이 전태일 일기 내용을 그대로 닮아가는 과정의 정황이 `민족적`이고 `현대적`이다. 천운영 소설집 <명랑>은 다소 주변적이고 엽기적인 야야기를 단단한 문체 자체의 힘으로 `문학=일상`화하는 과정의 정황이 `그렇고, 윤성희 소설집 < 거기, 당신?>은 `모래 씹는 느낌의 문체`와 무책임한 천진성 만으로 일상을 두겹 끔찍하게 만드는 과정의 정황이 그렇고, 권지예 소설집 <꽃게 무덤>은 음식이 죽음을 먹이는 과정의 정황이 그렇고, 전성태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은 이미 사라진 과거가 현재를, 현재가 이미 사라진 과거를 숨기는 듯 돋을새김하는 과정과 글쓰기 과정이 겹쳐지는 정황이 그렇다. 김영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는 치열하고 일관된 `싸가지 없음`이 똑같이 치열하고 일관된 미학을 거느리는 과정의 정황이 그렇고, 박민규 소설집 <카스텔라>가 김영하보다 온건한 윤리와 김영하보다 화려한 판타지로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는 과정의 정황이 그렇다. 그리고 이혜경 소설집 <꽃 그늘 아래>의 문장이 얼핏 멀쩡해보이는 일상을 깊이 깊이 파고 들다가 어언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예측이 불가능한, 그리고 혹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극미세계 법칙을 닮고 그것이 불가해한 이야기를 낳는 과정의 정황이 또한 그렇다.

신성을 가시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하면서 종교는 제도화하고, 제도화는 신성의 전망마저 가시화하려 들므로, 위험하다(자칫 `밀교적`이거나 `광신적`이다). 철학을 가시화(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하면서 정치는 제도화하고,철학의 전망마저 가시화하려들므로 위험하다(`혁명적`인 동시에 `유토피아적`이다.) 이것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전망의 제도화`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것이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그의 `과학적 학문`이 철학의 가시화로서 정치화 문제를 이미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학자 마르크스`와 `혁명가` 레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학과 예술은, 다르다. 가시화 그 자체로 시작하며, 완벽한 형상화의 실패가 오히려 추동력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전망 자체를 가시화하지 않는다. 그럴 겨를이 없거나, 필요가 없다. 문학과 예술 작품은 태어나는 순간 세계며 권력이며, `제도화`를 모르므로, 전망의 가시화를 모른다. 현실에 자극 받아 떠오른 영감, 즉 형상화 욕구를 따르는 것만도 벅찰 뿐이다. 창작이 기쁨이고 고통인 까닭이다.

문학평론은 문학의 제도화가 물론 아니지만, 처음부터 문학을 위한 제도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문학평론은, 반복하거니와, 걸작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성채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좋은 작품의 가능성을 낚아채는 그물에 가깝다. (사실 비유도 가시화 욕망의 산물인지 모르지만.) 평론이 완성된 작품은 물론 미래의 작품에 대해서도, `창조적`인 까닭이다. 제도이면서 `창조적`이므로, 문학평론은 언제나 그릴 수 없는 전망을 그려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 모순은, `미완적`인 형상화가 문학 창작을 더욱 `창조적`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만큼, 문학평론을 더욱 `창조적`으로 만든다. 민족문학의 위기`는 `민족문학론`이라는 `평론=제도`가 성채화했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제도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평론의 제도화는, `문학권력`을 낳기 때문이 아니라, `그릴 수 없는 전망을 그려야 하는 모순으로 창조적인` `평론=제도`의 권위를 스스로 붕괴시키므로, 위험하다.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반영하고 좋은 작품은 충격과 감동의 변증법으로, 혹은 `충격=감동`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며, 그 방식으로 `현실 너머`까지 현실화한다. 이 모든 것이 작품 현실이며, 현실로부터 작품 현실이 생겨가는 과정이야말로 민족문학론이, 현실주의문학론이므로 더욱, 마주쳐야할 현실이다.(미학주의자들이 작품 현실만을 현실로 보므로, 그것은 더욱 그렇다.) 위에 언급한 작가들, 그리고 이미 리얼리즘의 성채에 든 작가들만 보아도 한국 소설문학은 70년대 이래 최대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고 있으며, 70년대보다 더욱 찬란한 미래를 예감케하고 이미 가능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만 보더라도, ``민족적`이 아닌 `현대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반면, `현대적`이 아닌 `민족적`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을 `민족문학 위기론`으로 받아들이는 민족문학론은 제도화한 문학론이다. 이들의 숱한 `현대적=민족적`을 수렴하면서 `민족문학론`은 `문학론`을 향해 끊임없이 미분-적분해가야 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리얼리즘문확 성과와 함께 종합 재구성, 더 거대하고 질높은, 그러므로 더욱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그리는, 더욱 거대하고 깊은 모순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좋은 문학은 리얼리즘문학이다`라는 명제가 소용없거나 필요없어질 때까지 그렇다. 리얼리즘문학론은 대중문학론이었던 적도 없고, 비주류문학론이었던 적도 없다. 그것은, 앞으로도 그렇고, 모든 문학론이 그렇다. `평론가이자 편집자 신수정`의 육성으로 듣는 윤성희 (뒷)이야기는 그래서 재밌다.

요즘 공모작품 혹은 신춘문예 심사를 해보면 거의 1/3이 윤성희 소설 아류작들이다. 윤성희 작품은 기초공사가 잘 되어있고 공법이 탄탄하다. 윤성희는 같은 작품을 다섯 번 쓴다 하는데, 쓸 때마다 깎아낸다니, 100매짜리 단편이면 500매에서 시작한다는 얘기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지나치게 깎아내서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다. 아자 경제적인, 최소한의 요건 만으로 어떻게 서사를 만들어내느냐, 이런 점이 윤성희 소설의 매력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윤성희는, 역시 역량이 뛰어난 천운영, 천운영도 이름이 알려진 것에 비해 독자가 적은 편인데, 그런 천운영보다 독자가 더 적다. <레고로 만든 집>은 초판 3천부를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그리고 절판까지 되었다는 소문인데, 최근 나온 <거기, 당신?>은 지금 한 만 부 정도 나갔지만, 참 아쉬운 대목이다. 그보다는 더 나가야 하는데…요즘은 1쇄를 한 3천 부 찍으니까 만 부라면 4쇄까지 찍었다는 얘기고, 그래서 윤성희 본인은 몹시 기뻐하면서 `나를 4쇄작가라 불러 달라`고 한다지만, 내가 보기에 만 부라면 아주 좋은 작가한테 너무 박절한 대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요즘 그야말로 종횡무진 외계인처럼, 혹은 팀버튼 감독영화 <혹성탈출>의 정반대 방향으로 뜨고 있는 박민규 (뒷)이야기는 더 재밌다. 독자와 작가지망생은 물론, 작가에게도. 신수정의 `박민규 이야기`는, 본인 표현대로, 오늘날 평론 일과 잡지 일 전반을 유쾌하게 건드린다.

박민규 사진을 본 사람은 모두 짐작하겠지만 아주 재밌는 사람이고, 작품도 아주 좋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원래 문학동네소설상(은희경이 1차, 전경린이 2차 수상자다)에 응모했던 작품으로 최종심에 올라갔다. 제목은 좀 달랐다. 문학동네소설상은 예심을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이 하고 본심을 다른 분들한테 위촉하는 형태로 하는데, 본심 심사위원들이 박민규소설에 대해 몹시 흥분을 했다. 안된다. 이런 소설은…물론 당시 작품이 훗날 출판된 것에 비해 덜 정제된 면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장난 같은 부분이 많아 저항감이 컸던 듯 하다. 하여간, 그래서, 그 해 문학동네소설상은, 편집위원들이 여러 경로로 그 작품을 뽑았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지만, 결국 `당선작 없음`으로 끝냈고, 박민규는 너무도 분하여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까지 났는데, 어쨌든 두문불출 칩거를 하면서, 1부를 좀더 손 보고 3부를 새로 집어 넣고 제목을 <삼미슈퍼스타즈…>로 고쳤다. 그리고, 문학동네 너희들한테는 새 소설을 보여주마, 나한테 <삼미…>만 있는게 아니라구,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지, 문학동네작가상에 또다른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을 응모했고, <삼미…>는 한겨레문학상에 냈다. <지구영웅전설>은, 다행히도, 심사위원 중 이인성(소설가)이 적극적으로 민 덕에 문학동네가 챙길 수 있었지만, 이미 <삼미…>가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된 뒤였으므로, 문학동네는 박민규를 `데뷔`시키는 행운을 갖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나는, <지구영웅전설>보다 현실 이야기를 판타지로 만들어낸 <삼미…>쪽이 <지구영웅전설>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단편소설을 청탁하면서, 장편이야 장난 같은 것이 섞여들 틈이 있지만, 과연 박민규가 천운영이나 윤성희처럼 잘 짜여진 작품을 쓸 수 있을까, 기대 만큼이나 걱정도 많았는데, 처음 받은 작품 <카스텔라>는 놀라웠고, 그 뒤 2년 동안 청탁이 쏟아지면서 발표한 약 10편을 모아 같은 제목으로 소설집을 펴냈는데, 편집자로서 굉장히 행복한 결과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 박민규가, <창작과 비평>에 소설 연재를 시작했는데, 연재를 시작하는 말이 정말 박민규답다.

옛날에 `학생, 학생도 문창과라매, 그런데 왜 학생은 안 사?`하며 나를 귀찮게 하던 창비 영인본 판매 아저씨가 있었다, 연재 청탁을 받은 느낌이 꼭 그렇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의 박민규 `연재 시작 말`은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어수선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즉 슬슬 흔들고 흔들리면서도, 아니 그럴수록, 평론가 신수정은 `고전적`을 향한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은 이제껏 가꿔왔던 정교한 형식과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합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풀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봉천동이라는 동네, 30대 중반을 지나면서 독신으로 살며 소설을 쓰는 여자의 슬픔이랄까 비애랄까 하는 것이 좀더 개인화하는 바로 그만큼 보편화하고, 울림이 더 커진달까. 작가의 성숙과 작품의 성숙이 나란히 간다 할까. 꽤 의미있는 작품이었는데, 평단이 너무 조용히 지나간 면이 있고…아, 이 여자가 정말. 정말, 강태형이 신수정의 배경이 아니라 신수정의 강태형의 배경, 아니 배후조종자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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