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름다움을 서열화할 수 있나…삶도 마찬가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름다움을 서열화할 수 있나…삶도 마찬가지"

[인터뷰] '붓그림 편지' 김봉준 화백, 9월 1일부터 원주서 미술전시회

<프레시안>에 '붓그림 편지'를 연재하고 있는 김봉준 화백을 지난 16일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만났다. 김 화백은 지난 6월 서울에서 "유월의 노래"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오는 9월 1일부터 9일까지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라는 제목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민생, 생태, 신화, 평화의 주제전"을 가진다. 작품활동을 위해 원주 문막으로 낙향한 지 20년만의 첫 현지 전시회다.

70년대 민중문화운동을 시작으로 80년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지역생태문화운동까지. 김 화백의 이력이 말해주듯 서구적 근대주의에 물든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붓은 날카로웠다. 김 화백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과거 서구적인 근대 도시 미관을 그대로 베껴오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디자인 도시, 서울' 정책을 비난했다. "정책 결정에는 미적 기준과 판단이 동반"하는데 "준비 없이는 토건적 근대주의를 못 넘는다"는 것이다.

김 화백은 "정치나 경제는 정당이나 투표 행위를 통해 변화가 보이지만, 미술과 같은 문화예술 분야의 권력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숨은 권력이 되어 버렸다"며 "정치권력만 바꾼다고 문화권력을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본래 아름다움은 권력화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현장에는 늘 김 화백의 걸개그림이 걸렸다. 특히 1982년 '고(故) 김상진 열사 7주기 추모식'에 걸린 김 화백의 <김상진 열사도>는 '다시 살아난 걸개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 김상진 열사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거해 1975년 4월 11일 할복자살했다.

87년 민주화 바람이 불었지만 김 화백은 인사동보다는 현장을 택했다. 경기도 부천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서울 인사동 미술시장에서 생존하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현장 속에서 민중들과 문화 활동을 하면서 먹고 살겠다고 결심했다".

'예술가'보다 '현장 활동가'에 가깝던 김 화백은 90년대 초 노조가 정치의식을 키워가면서 자신이 꿈꾸던 '진보적 문예시장'이 무너졌다고 판단했다. 노동이 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정치를 중심으로만 움직였기 때문이다. '민족, 민중'을 키워드로 노동운동을 했던 김 화백은 1999년 림프선 암 진단을 받는다. 불안한 한국형 근대적 도시 질서에 면역력이 파괴된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강원도 원주로 들어간다.

"죽음의 그림자도 봤으니까 작업이 달라졌다."

기적에 가까운 김 화백의 소생은 원주에서 "민생, 생태, 신화, 평화"로 재현됐다. 그의 테라코타 작품에는 영적인 기운이 감돌았고, '리얼리즘을 넘어섰다'는 환희의 몸짓에 춤이 절로 나왔다. 다 죽어가는 체험에서 나온 '영적인 미형식', 그는 그곳에서 예술가로서의 근원에 눈을 떴다.

김 화백은 2005년 한러 수교 15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유라시아대륙 자동차 여행을 계기로 "과거 민속문화에서 민족, 민중, 저항의 측면만 봤던 것이 너무 협소한 시각이었구나를 깨닫게 됐다". 그에게 '동아시아의 보편성'이라는 화두는 그렇게 다가왔다. 2008년 그는 동아시아적 관점과 신화적 관점을 담은 '오랜미래미술관'을 원주에 세웠다.

일본은 김 화백의 작품세계를 먼저 알아봤다. <아사히신문>은 지난해 도쿄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에 대해 "그의 미술은 학생과 노동자의 민주화운동과 민예풍속과 농민생활 등 시대에 따라 미적 대상은 변했지만 인간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라고 비평했다.

다음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편집자>

▲ 김봉준 화백 ⓒ프레시안(김봉규)


프레시안
: 강원도 원주 지역으로 내려가 작품활동을 한 지 20년쯤 됐고, 이번에 원주에서첫 전시회를 연다. 다음달 1일부터 9일까지 진행되는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민생, 생태, 신화, 평화 주제전"은 어떻게 열리게 된 건가?

김봉준 : 이번에 강원민주미술인협회에서 수여하는 2012 강원민족미술인상을 받게 됐다. 그래서 지금쯤 중간 점검을 해야겠다. 기회는 이때다라는 생각으로 전시회를 열게 됐다.

미술전 주제가 "민생, 생태, 신화, 평화의 주제전"이다. 평상시 작품의 양이 많고 주제가 방대하기 때문에 전시도 주제별로 하려고 한다. 주제를 일상적 이미지에 담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다. 평상시에도 주제와 내용을 중시한다. 형식주의 작가가 아니고, 스타일 하나만을 밀고 나가는 스타일리스트도 아니다.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작품 주제에 맞는 장르를 개발해왔기 때문에 형식이 다양하다. 유화, 붓그림(한국화), 목판화, 조각, 서예(글씨 작업) 등 장르만 대여섯 가지다.


▲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민생, 생태, 신화, 평화의 주제전" 포스터 ⓒ김봉준
프레시안 :
전시회 제목에 풍요가 들어간다. 지금 시대의 풍요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김봉준 : 여기서 풍요는 본성의 질서를 얘기하는 것이다. 숲에서 얘기하는, 생명의 싱그러운 에너지에 의해 충만한 행복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만 아니다. 풍요(豊饒)의 뜻에는 푸짐하고 넉넉하다라는 게 있다. 푸지다가 내 미학의 기준이다.

프레시안 : 작품은 몇 점이나 전시하나?

김봉준 : 회화, 조각, 판화, 유화 등 네 개 장르에 100점 정도 생각하고 있다. 장소는 원주 역사박물관에서 무료로 후원해주고, 시민단체들이 후원에 나섰다. 홍보도 원주시, 원주 시민단체, 원주민예총에서 같이 해주고 있다.

원주는 문화예술 시장이 거의 없는 척박한 예술생존환경이다. 다만 마을문화와 생태주의를 공부해보겠다고 서울 생활 포기하고 내려갔기 때문에 하나를 얻으려고 아홉 개를 포기한 경우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20년간 버틴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한다. 사람들은 오지 시골에서 미술관(오랜미래신화미술관)도 세우고 미술 활동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한다. (☞ 바로 가기 '오랜미래신화미술관')

남과는 다른 행보를 걸어온 만큼 이번 전시로 작품 활동을 통한 시대의 문화적 역할이 무엇인지 객관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도록도 만들었는데, 인문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제2의 삶, 원주에서 동물적 본성으로 시작하다

프레시안 : 원주에서의 작품 활동을 총 정리하는 개념인데, 미술전 주제를 "민생, 생태, 신화, 평화"로 한 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들인가.

김봉준 : 그렇다. 원주로 상징되는 지역에 대한 개념은 민생에 포함했다. 도록도 이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판화, 붓그림, 유화 작품을 소개하고 해설을 담았다. 이번 도록 <우리가 확보해야 할 풍요>와 전시에 많은 인문학자들이 참여했다. 참으로 감사한다. 글을 기고한 철학의 최종덕 상지대 교수(전시 준비위원장)를 비롯하여 신화학의 심재관 상지대 외래교수, 문학평론가 정현기(전 연세대 교수), 미술비평가 김종길, 미술사가 유혜종 등이 전시 기간 중 인문 강좌도 연다. 전시 첫 날인 9월 1일에는 이애주 교수가 축무로 "빈 산"을 공연한다.

프레시안 : 현재 강원도 원주시 문막에 살고 있는데, 원주로 가게 된 계기가 있나?

김봉준 : 1993년 여름에 원주로 갔으니, 햇수로 20년째다.

80년대 서울에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활동을 했다. 당시 민문협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단체로 1983년 김근태 전 장관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과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1985년 3월 재야 민주운동단체들이 연합해 발족)에서 민주전선운동-문화운동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87년 양김(김영삼-김대중)이 분열하는 것을 보고 절망했다. 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된 민주화운동에 부응해 1988년 11월 26일 예술·영화·연극·음악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이 참여) 흐름도 마뜩잖아 민중 속으로 하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87년 대선이 끝나고 이듬해에 경기도 부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부천·인천 노동조합과 함께 노동문화운동과 주문 제작 미술공방을 시작했다. 노조의 문화행사나 파업 때 선전물, 노조 기념품 등을 제작했다. 울산 현대 노조원들에서 카드 만장을 팔기도 하고, 지하철 노조 티셔츠를 만벌을 만들기도 했다. 서울 인사동 미술시장에서 생존하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현장 속에서 민중들과 문화 활동을 하면서 먹고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민문협 전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기독교농민회, 1982년 3월에 창립된 그리스도교 계통의 전국적인 농민운동 조직)에 있었고, 애오개 문화마당, 대학 때 야학 활동도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 했다. 나는 당시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소위 현장문화운동을 하였다. 그래서 서울서 미술동인 두렁 활동을 정리한 이후, 1988년부터는 소문도 안 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 <해방의 십자가>(1981년 작, 3x5m) ⓒ김봉준
프레시안
: 민주사회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유랑을 떠난 셈이다.

김봉준 : 그렇다. 문예활동을 민중적 삶의 한 복판에서 하고 싶었다. 판화를 팔아 부천에 노동자들의 풍물마당인 복사골 마당(경기 부천시 원미구 심곡2동 소재)을 만들었다. 그때 병원 원장이었던 강영석 씨가 작품을 산 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강 원장은 YMCA에서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인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선배였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노동조합 상위단체로, 1990년에 결성돼 1995년에 민주노총 설립으로 이어진다)에서 전국민주노동총연맹(민노총)으로의 전환기였다. 전체적으로 강성노조였다. 그때 점점 공방 운영도 쉽지 않아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노운협, 1987년 이후 발전된 노동자 대중운동을 토대로 새롭게 결성된 자주적 노동운동단체들의 전국적인 상설 공동투쟁체)와 부천 노동상담소를 만들기도 했다. 김영곤, 김승호 등이 주축이었던 노운협은 NL은 너무 민족 모순에 치우쳐 있고, PD는 또 너무 계급 모순에 치우쳐 있어 양자를 비판하고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보았다. 비교적 어른스러웠다. 이들은 노조가 정치의식을 키워나가면서 곳곳에서 노동조합운동을 강화하는 게 우선이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한 2년 부천 노동상담소를 미술 공방과 함께 운영했는데, 마음에 병이 생긴 듯 활동이 어려웠다. 또 부천 부노협 소속 민주노조들도 거의 무너졌다. 한 편에서는 중소기업들은 망하거나 해외로 공장을 이전했다. 결국 노조를 상대로 미술 공방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꿈꾸던 진보적 문예시장은 무너진 셈이었다.

또 다른 절망은 노동이 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들 정치 중심으로만 움직였다. 노조가 문화 서클 등을 권장해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 교육만 시키려고 했다. 노동자들만의 문화가 없어진 셈이었다. 노동자의 문화정체성 상실이 안타까웠다. 70년대 대학 시절부터 공장 노동자들에게 탈춤과 풍물, 미술을 가르치며 문화 야학을 했다. 파업 때면 이런 문화 서클들이 빛을 낸다. 투쟁도 덩달아 윤택해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활동을 중시하지 않고 노동운동 지도부는 그냥 문화 선전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천 노운협이 임금투쟁을 할 때 문화 서클로 결합해 활동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직접 느낀 것이다.

프레시안 : 정치 과잉이고 문화 서클은 소외됐다고 본 것인가.

김봉준 : 그렇다. 지금까지 노조 운동에 자기 문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도부들도 회의가 끝나면 술을 먹으며 술집 여성들과 어울리다가 언론에 의해 사회문제가 된 것도 보았다. 정치만 거창하게 얘기하고, 자기 문화를 안 키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본 것이다. 결국 부천에서도 좌절했다. 떠나야겠다. 도시와 안 맞는다라는 생각뿐이었다. 되돌아보니, 기독교농민회에서 농민들과 활동했던 그때 민중 활동이 더 좋았다. 그래서 농민들의 문화도 다시 보고, 공부했던 민속 문화도 연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영석 원장이 친척 편에 사 놓은 땅이 있다며 가보자고 권했다. 그곳이 지금 살고 있는 문막이다. 보자마자 나한테는 더 이상 이런 터가 없겠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숲 속 외진 오지로 보일지 몰라도 여기 오면 숨 쉬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형, 나 이거 줘요하고 졸랐다. 그가 알았어, 가져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20년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척박한 두메산골 집도 절도 안 보이는 언덕에 집을 한 채, 두 채 짓기 시작해서 지금은 세 채가 됐다.

'자립적 생존형' 작가 김봉준, 문막을 바꾸다

프레시안 : 문막이 고향이라던가, 연고가 있던 것도 아니었나.

김봉준 : 아무 인연도 없는 곳이다. 원주에 마당극을 하는 후배 몇 사람을 알 뿐이었다. 시작은 산천이 좋아서 내려 간 것이다. 그렇게 산골 생활은 상처받은 짐승이 숲 속에서 웅크리고 자기 상처 핥으면서 살던 동물적 본성으로 시작했다. 정착 10년째인 2006년부터는 원주민예총, 원주민미협 등 회장직도 맡으며 지역문화 봉사 일도 했다.

프레시안 : 인근 마을 주민들과의 교류는?

김봉준 : 스무 가구 정도의 작은 산골 마을이니까 주민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화가라고 하니까 TV에서 본 대로 돈도 많고 빵모자 쓰고, 멋진 옷 입고, 예쁜 아가씨 데리고 다니는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허름한 작업복에 집은 혼자 짓겠다며 망치질이나 하고 있으니까 도깨비 같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실망하더라. 마을에도 안 오고, 산만 타고 다녀서 수상하다고 신고해야겠다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프레시안 : 부천에서 공방을 하며 생활을 유지하기도 했는데, 원주로 이동한 후 물질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김봉준 : 난 자립적 생존형 작가이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 아홉 개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다. 스스로 기특하다고 생각한다. 예술로 생존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작품 중 효자 종목은 목판화이다. 나름의 대중성이 있다. 또 한 5년 동안은 신문 삽화를 고정적으로 기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 고마운 후원자 몇 명이 있었다. 이 양반들이 아주 어려울 때 날 건져 준 귀인들이다. 사회적 기업을 운영한 적도 있지만, 요즘에는 오랜미래신화미술관경영과 전국적인 전방위 작품전시와 페이스북에서 예술유통과 주문제작으로 벌이를 한다. 나는 농산물 직거래처럼 시민과의 예술직거래 길을 개척해 온 샘이다. 정부 프로젝트나 상업주의 화랑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온 비결을 오늘 공개한 것이다. 빠듯하지만 부지런히 살면 생존할 수 있다.

신화미술관이 있는 문막 취병리 진밭마을이 문화관광마을로 변신하고 있다. 우리마을에는에 천연염색체험장과 고서를 모아놓은 옛책고을박물관이 있어서 나름대로 원주의 관광 명소가 됐다. 또 암 투병 후인 2000년부터 숲과 마을 미술축전이라는 축제를 2년 연속하면서 마을문화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축산업 등 근대식 관행농과 공존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갈등도 있으나 작은 마을에서 서로 공존 공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현주소와 같다.

▲ 김봉준 화백 ⓒ프레시안(김봉규)


'민족, 민중'의 좌표가 '민생, 생태, 신화, 평화'로 이동

프레시안 : 70년대부터 민중문화운동을 했고, 87년까지를 민중시대라고 하면 그때까지의 키워드는 민족, 민중이었을 것 같다. 88년부터는 노동자 운동도 했다. 그러나 원주 이후로는 생태, 신화 등으로 바뀐 것 같다. 원주 문막에서의 생활이 영향을 끼친 것인가.

김봉준 : 90년대 초에 현장에서 시대가 변하는 것도 봤고, 노동운동 자체가 대중성을 잃어가는 것도 봤다. 그리고 노태우라는 직선제 대통령 나왔지만, 이미 민주화 과정은 왜곡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내부에서는 지자체에 조응하는 시민운동이 생겨났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내가 궁금하고 추구하는 화두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의식적 선택도 있지만, 본성이다. 서양 짝퉁(흉내내기)인 한국형 근대적 도시 질서라는 것 자체가 아주 불안하고 부실하지 않은가. 특히 부천 같은 위성 도시에서 내 역할이 이제는 별로 없어 보였다는 생각에 부천을 떠났다.

▲ <건널목>(199년 작, 유화15호) ⓒ김봉준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안 좋았다. 나중에 보니, 그게 암이었다. 암이 발견된 것이 1999년이었데, 림프선 암 3기 말이었다. 의사들이 이 정도면 한 10년 이상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전에도 몸이 이상하면 병원에 갔었는데, 발견이 안 됐다.

일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잠을 못 잘 정도로, 누가 위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림프선은 목, 배, 겨드랑이 등 림프절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면역력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기능이 고장 난 것이다. 1999년, 발견된 그해 1년을 치료받았다.

프레시안 : 현대 도시문명과 화해하지 못한, 그 결과 몸의 질병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줬나.

김봉준 : 큰 영향을 끼쳤다. 암 진단 3기 말이면 거의 노인 의식을 가지게 된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장년기 초기에 노인 의식이 생겼다. 계단을 올라갈 때도 붙잡고 가야 했고 내려갈 때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삶의 의욕을 놓고 자기 정리를 해야 하는 상태였다. 노경을 가졌으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프레시안 : 죽음 비슷한 단계까지 갔었던 것?

김봉준 : 죽음의 그림자도 봤으니까 작업이 달라졌다.

프레시안 : 그러면서 작품 주제가 민생, 생태, 신화, 평화 등 근원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인가.

김봉준 : 치료를 받으면서 1년은 근처 아파트에서 생활했는데, 그곳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문막 산골 작업실로 들어가 흙 조각을 했는데, 그때 나온 작품들이 신화미술관 주요 작품, 테라코타(terracotta, 점토를 구운 것)들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볼 수 있는 작품들인데, 영적인 느낌이 있다고들 한다.

조각들을 보면서 조각이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리얼리즘을 넘어서야겠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혼자 춤추며 좋아했다. 아, 드디어 나왔다라는 환희의 몸짓이었다. 70년대 대학 조각실에서 시작한 조각예술 30년 만의 환희였다. 영적인 미 형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다 죽어가는 체험에서 나왔다.

유라시아 대륙 여행, 동아시아적 관점에 눈뜨다

프레시안 : 2000년대 중반부터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여행을 하는 등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는 작업도 했는데, 그때의 창작 활동과 연관된 것이었나.

김봉준 : 투병 중에 홍익대 탈춤반과 민주 동문회 사람들이 4.19 기념탑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지금 홍대 정문 안쪽에 있는 5층 탑이 그것인데, 역사 탑으로 한국 민주 운동사를 부조로 조각했다. 학교에 세운 민주 기념탑으로는 우람하고 작품성도 있다. 2000년부터 2년간 작업해 2003년에 세웠다. 다 죽어가는 체험의 예술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강영석 원장이 동북아평화연대 2대 이사장이 됐다. 부천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하던 사람들(김현동 등)이 중국 연변의 우리민족 서로 돕기 활동을 하다 동아시아 동포 중심의 평화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동북아평화연대를 세웠다. 강 이사장이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고, 문화위원장 역할을 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 시에 있는 아리랑 가무단과 <연해주 길마중>이라는 총체극을 직접 쓰고, 감독했다. 고려인 소녀 무용수들과 북한 인민 배우 출신의 수석 무용수와 같이 만든 역사서사 총체극으로, 연해주 강제 이주사를 소재로 한 대서사무용극이다. 2004년에 전국을 돌며 공연했다.

▲ 바이칼 호수 가는 길 ⓒ김봉준


프레시안
: 동시베리아에서 바이칼 호수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 자동차여행은 언제 한 것인가.

김봉준 : 2005년 한국-러시아 수교 15주년 행사로 한·러 국회의원들이 기획한 여행이었다. 그해 7월 22일 출발해 1만 5000km의 유라시아 길을 스무날 동안 달렸다. 그때 경험을 정리해 "김봉준의 유라시아 문화기행"이라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기고했다. (☞관련 기사 "열자! 유라시아의 시대를, 만나자! 바이칼에서")

그 이후에도 연해주 말갈족 등 소수민족 주거지역, 몽골 홉스골 지역 등를 답사했다. 지금도 동북아평화연대 이사로 있으면서 문화와 예술과 신화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홍산 문화권도 답사하면서 동북아와 시베리아 쪽의 고대 문화 흔적을 감지하면서 동아시아를 새롭게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동북아에 형성되어 있는 현재의 문화 기류라는 것은 아주 짧은 국가주의 산물이다. 동아시아는 근대국가가 생긴 지 100년에서 200년밖에 안 되는데, 그 역사를 가지고 수 천 년에 이르는 동북아 문화 전체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것처럼 주장들하고 있다. 국가 이념과 교육에 의해 훈련된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 문화는 국경이 없었던 신화시대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때는 대동소이의 문화였다. 말갈족과 여진족 모두 우리 근친족이었다. 한번은 우스리스크 시에서 10시간을 달려 하바로브스크 근처 시우테알렌 산맥의 깊숙한 산골 오롤마을에 사는 말갈족 사람들을 만났다. 건배를 하는데, 보드카를 손끝에 묻혀 주변에 세 번 뿌리는 고스레를 하더라. 그래서 물었더니, 오래전부터 했다는 것이다.

동북아 지역을 다니다 보면, 의례나 상징 등 고대 문화로부터 내려온 공통된 것들이 참 많았다. 과거 민속 문화에서 민족, 민중, 저항의 측면만 봤던 것이 너무 협소한 시각이었구나를 깨닫게 됐다. 70, 80년대 민속 문화 관점이라는 틀에 박힌 시각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전통문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재신화적 사람'들의 뉴에이지 운동

프레시안 : 동아시아 문화를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반란으로만 바라보는 19-20세기적 시각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김봉준 : 탈근대적 관점 또는 탈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봐야 하는 부분들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갇혀 있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와 같은 낮은 수준의 민속 문화였다. 그 당시 민속 문화가 저항적 예술 행위의 역할이 요긴 하긴 했지만, 사회가 국제화·세계화되는 과정에서 정체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게 동북아를 여행하면서 생긴 동아시아적 관점, 신화적 관점을 가지고 2008년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을 세우게 됐다. 특히 2007년에 문화관광부 주최로 동아시아 여신신화와 상징 비연구 프로젝트(정재서 이화여대교수-중국신화, 이지영 이화여대 교수-한국신화, 박전열 중앙대교수-일본신화, 강인욱 경상대 교수-시베리아신화, 이선형-동양미술사학, 김봉준-상징 이미지)를 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오누이>(1998년 작, 채색목판화) ⓒ김봉준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신화를 이야기해준다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동화 형태로, 노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명 설화를 바탕으로 설명해줬다. 설화라는 것은 신화시대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전설의 시대, 민담의 시대, 소설의 시대로 오면서 오늘날에는 믿거나 말거나라며 미신이다라는 식으로 여긴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국가주의적 이성주의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고대부터 내려 온 설화는 땅과 생명을 신성하게 보면서 나온 텍스트이다.

신화학적으로 볼 때 사람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원(原)신화적 사람은 원래 옛날부터 믿고 있는 종교 신앙으로 예배당, 법당에 열심히 나가거나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는 세대이고, 두 번째 비(非)신화적 사람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그냥 사는 것을 좋아하는 소시민들이며, 세 번째는 유물주의자인 탈(脫)신화적 사람으로 신이나 정신세계에 기대지 않는 사회과학파들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재(再)신화적 사람인데 이들은 신화시대를 다시 갈망하는 사람으로, 지식정보화 사회를 넘어서서 영성의 시대의 도래를 꿈꾸는 미래적 시민상이다. 선진 유럽에서는 이미 뉴에이지(New Age) 운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프레시안 : 뉴에이지 운동은 60년대부터 나온 것 아닌가.

김봉준 : 그렇다. 68혁명 또는 5월 혁명(1968년 5월, 프랑스 드골 정부의 실정과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 총파업투쟁이다. 당시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 사건으로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혁명이 구시대를 뒤바꿀 기회라고 생각했다. 비록 저항자들에게 68혁명은 실패였으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에 좌절하고, 신좌파운동에 절망한 세대들 사이에서 뉴에이지 운동이 태동했다. 이들보다 앞선 기성세대는 전범 세대였기 때문에 저항 의식은 강했지만, 해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우리보다 먼저 뉴에이지 운동 바람이 분 일본도 흡사했다. 유럽의 68혁명 후 젊은이들이 대륙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이스탄불에서 네팔까지 정기 운항 버스가 생겼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했다고 한다. 60년대 말 젊은이들이 마르크스 책 한 권을 들고 떠났는데, 새로운 유랑족들이 생겼다. 후에 이들이 통기타 매고, 통이 넓고 긴 바지를 입은 장발의 히피족으로 점점 변했다. 그때 분위기에 휩쓸려 유럽을 떠돌던 일본 좌파 운동가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지금 일본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이다.

김봉준의 작품 세계, 일본이 먼저 알아보다

프레시안 : 일본에서 몇 번 전시회를 열지 않았는지.

김봉준 : 소규모로는 몇 번 했다가 본격적인 전시는 도쿄의 '갤러리 마키'라는 곳에서 지난해에 진행했다. 대안 전시공간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의 미술은 1980년대 학생과 노동자의 민주화운동과 민예풍속과 농민생활 등 시대에 따라 미적 대상은 변했지만 인간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 2011년 11월 <아사히 신문>, '갤러리 마키' 초대전 관련 보도

프레시안 : 일본에 김 화백의 작업 활동이 어떻게 알려지게 됐나?

김봉준 : 일본에서 진보미술미학을 하는 평론가들이 나를 알고 있었다. 동경에서는 이미 정평이 난 대안갤러리 마키에서 초대한 것이다. 판화 70점 정도를 전시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전시회를 찾아왔다. "한국 민주화 운동과 민중문화"를 주제로 시민 강연을 하기도 했다. 세 시간을 꼬박 진지하게 듣더니, 감동했다고 말했다.

후쿠오카에서 동경까지 와서 강연을 듣던 아시아미술관 학예연구원이 있었다. 전시회 후에 그 사람이 작품 열여덟 점을 구매했는데 대부분 강렬한 개성과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일본에 민주화 운동은 있었지만 민중미술은 없었다며 이웃 나라에 이런 예술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 자료로도 소중하게 본다는 것이다. 후쿠오카의 아시아미술관은 올 가을에 아시아판화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지금껏 현대미술관 등 국내 미술관에서 내 판화작품 구입 요청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역시 나는 아직도 비주류가 맞다.

프레시안 : 김봉준 작품의 가치를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알아봤다는 것인데, 이번 전시회 안내서에 미술평론가인 후루카와 미카 씨가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를 연결한 민예풍이다. 판화, 시서화, 테라코타 등에서 어딘가 일본의 민예와도 통하는 것이 있다. 김 화백의 작품에서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

김봉준 : 아직까지도 우리 민예미(民藝美)에 대한 미학적 비평은 아무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의 민예미를 발견한 미술평론가. 1924년 서울에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 1936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를 뛰어넘지 못한다. 일본 관람자들은 나의 미술이 동아시아 보편성을 가지고 이렇게 근대를 표현하고 탈근대를 얘기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쉽게 말하면 동아시아풍의 시서화형식으로 현대를 얼마든지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 <유월의 노래>(2012년 작, 유화) ⓒ김봉준


원주에서 동아시아를 보다

프레시안 : 동아시아적 보편성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나.

김봉준 : 동아시아에는 시서화(詩書畵) 문화의 전통이 있다. 한지에 붓으로 글씨인 한문과 그림을 같이 그렸다. 이런 시서화 가무악 풍류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굉장히 중요한 동아시아적 자산이다.

프레시안 : 신화적 공통성도 있나?

김봉준 : 국가적인 장벽이 너무 커서 나라별로 소유하고 있어서 그렇지, 지금 말하는 시서화의 전통과 신화적 공통성은 국가 이전의 문화다. 예를 들면,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나 홍수 신화라고 해서 홍수에 모든 것이 떠내려갔지만 남매만 남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등은 광범위로 공유하고 있다. 또 땅, 대지의 어머니·아버지 신화, 우리로 보면 산신 할아버지·산신 할머니 같은 신선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최지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도교, 불교를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풍류도를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 난랑비서(鸞郞碑序) 중


고구려 벽화가 바로 풍류도이다. 모두 뫼 산자에 사람인 변인 신선 선(仙)을 쓰는 선인, 선녀, 신선의 문화이고, 이게 동아시아 원시문화이고 샤머니즘이다. 신선문화는 샤머니즘의 문명화이다. 동아시아적인 독특한 생태·지리적 토양 위에서 생긴 문화권이 있다. 거기에 신화나 풍류도의 문예 흐름이 공유해서 내려온다고 본다.

프레시안 : 이번 전시에서는 동아시아적 보편성이 제일 큰 주제의식인가.

김봉준 : 동아시아적 주제는 너무 방대해서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 작은 범주인 지역으로 내려간다. 그야말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다.에 이번 전시의 주제의식이 있다. 왜 아름다움을 권력이 서열화하려 하나라는 기본적인 문제제기가 있다.

프레시안 : 원주시 문막에서 20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동아시아적 보편성과의 연결이 어렵지는 않았는지?

김봉준 : 산골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마을주의자나, 주민자치 민주주의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외 동북아를 다녔으니까 두 가지를 같이 보면서 인터내셔널리즘(inter-nationalism)이 아닌 인터 로컬리즘(inter-localism), 인터 휴머니즘(inter-humanism) 쪽 사고가 많이 생겼다.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을 가끔씩 여행했다.

프레시안 : 원주에서 동아시아를 보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봉준 : 그렇다.(웃음) 사람들은 왜 자꾸 국가를 대표해서 교류한다는 사고를 하는지 모르겠다. 평화 교류나 시민 간 진정한 깊은 교류를 하는데 오히려 국가가 사고의 장애가 될 때가 많다.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실제 이런 화두를 놓고 일본에 가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오는 12월에 후쿠오카로 신화기행을 하러 간다. 두 달 전쯤 신화기행 준비팀이 왔는데, 신화미술관에 왔다가 강릉 단오굿을 보고 돌아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신화미술관부터 와서 서로 한국적인 신화적 관점과 동아시아의 신화적 관점을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강릉 단오굿을 같이 봤다. 그들 이야기가 한국의 예술은 굿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예술이 굿에서 나왔다는 말을 몰랐던 사람들이 굿이 예술의 어머니다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무겁고 심각한 일본 의례와 달리 한국 의례 문화는 놀이와 해학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프레시안 : 우리와 일본의 의례 문화의 차이가 큰가.

김봉준 : 일본에도 과거 지역신화가 살아 있을 때에는 해학적 요소가 있었는데 국가주의화 한 것이다. 신화도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신화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신화나 신령 이야기를 하면, 번역 과정에서 천황신으로 알아듣기도 한다. 그래서 "신화에서의 신 또는 선(仙)은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신성한 힘을 상징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생명과 물성은 모두 싱그러운 자기의 아우라가 있다. 그것을 동학에서는 '천지만물에는 하눌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라고 한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화적인 세계관을 동학에서도 적용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에게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다 신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 문화에도 신화적 관점이 있었구나 하면서 신선하게 받아들인다.

"본래 아름다움은 권력화할 수 없다"

프레시안 : 70년대 80년대 운동할 때는 당장 세상을 바꿔야 한다, 정면으로 맞붙어 세상을 바꿔보자라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우리 사회 주류와의 대결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개발주의와 성장주의가 기승을 떨치고 있는데, 과연 동아시아적 시원(始原)이나 신화적 복원을 통해 우리의 삶의 양식을 바꿔낼 수 있을까.

김봉준 : 탈근대를 준비하기 위한 대안 때문에 고대 시원을 얘기하고 과거를 말하게 된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근대주의에서 도래한 물질주의의 폐해로 지구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 일반 소시민들은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바닥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예감이 있다. 예술가들은 촉수가 예민한 사람이다. 한 10년, 20년 빨리 움직였던 것뿐인데 이제는 시민들이 모두 느끼게 되는 단계까지 왔다. 2000년 이전만 해도 생태공동체문화축제를 하자고 하면, 무슨 말이냐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도록에 원주시장도 인사말을 쓸 정도로 그동안 해왔던 작품 활동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는 창조적 비주류의 위치에 있다. <프레시안>도 비주류 언론인 것처럼 창조적 소수자가 무엇인가를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에 대안 없이 또 부딪힌다. 그러면 깡패 같은 주류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자기 맘대로 휘두를 것이다. 주류가 창조적 비주류를 어떻게 흡수하느냐, 어떻게 대 합류할 것인가에 한국 사회가 사활을 걸어야 한다. 비주류를 계속 왕따 시키는 한 이 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본다.

▲ 김봉준 화백 ⓒ프레시안(김봉규)
블로그 '김봉준 미술'에 예술교육론, 미술유통론, 미학론, 전통계승론으로 등 대안을 제시했다. 예술론은 문화 권력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이 있다. 정치나 경제는 정당이나 투표 행위를 통해 변화가 보이지만, 미술과 같은 문화예술 분야의 권력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숨은 권력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미적 가치 판단을 독점하고 있는 세력이 사회를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서울을 디자인 도시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디자인, 서울을 외친 뒤에는 숨은 권력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문제점이 뭔지 비판하고 대안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마을 디자인으로 돌아가자 위치이동만 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책 결정에는 미적 기준과 판단이 동반한다. 미적 성찰과 미적 대안의 준비 없이는 토건적 근대주의를 못 넘는다.

프레시안 : 정치 권력, 경제 권력만큼 중요한 게 문화 권력이다라는 말인가.

김봉준 : 정치 권력만을 바꾼다고 문화 권력을 알지는 못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과거 서구적인 근대 도시 미관을 그대로 베껴오면 되는 것으로 알던 사람들 그대로였다. 우리 정서나 생활에 안 맞지만, 시민들은 이런 불만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고 항변할 수 있는 조직도 없이 그냥 지나쳐왔다. 결국 오늘날 도시의 문화 권력을 상징하는 것은 높은 건물들이다.

왜 숲이 중요하고 생활공간의 도시디자인이 필요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고 실천하는 시민문화권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생활 방식이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어린이 미술과 대학 수강과목 등을 바꿔 교육체계에 변화를 주고 동아시아적 관점의 생활미학과 풍류미학을 도시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만으로도 충실한 대안이 된다. 생태문화의 마지막 보고인 농촌의 중요성도 다시 일깨워야 한다. 탈근대를 준비하기 위한 생태평화문화의 미적 거처가 바로 강원도이다.

숲에서 성찰한 것은 아름다움은 권력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숲의 어떤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누가 서열을 매길 수 있겠는가. 숲을 구성하고 있는 생명을 가진 것은 다 아름답기 때문에 이를 서열화, 권력화 할 수 없는데 근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서열화 권력화하고 거기에 줄 서려고 한다.

예술대학은 예비 문화권력자들을 만들고, 아름다움의 권력화를 위해 예술사관생도를 길러 내는 곳 같다. 지금 미술대학 나온 사람 들 중 예술가로 살아남은 사람은 1%도 안 된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니까 비싼 학비를 충당하고 있다.

이제는 생활에 쓰이는 예술, 자연과 공생하는 예술, 아픔과 소외를 치유하는 예술, 시민의 정서적 소통예술로 방향 전환할 때이다. 대체적으로 지금 예술 교육은 사회적 낭비이다. 국가 예술교육 제도가 국민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초대합니다>

이번 전시회의 준비위원장인 최종덕 상지대 교수(철학)가 전시회 첫날인 9월 1일 서울 등 외지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해 조촐한 원주순례여행을 기획했습니다. 박경리문학공원과 무위당 장일순기념관, 그리고 김봉준전시회장으로 이어지는 코스입니다.

당일 오전 11시까지 박경리문학공원에 개별적으로 집결하시면 이후부터는 준비위원회 측에서 안내를 맡게 됩니다. 참가비는 3만 원(점심·저녁식사와 작품 도록), 신청은 김봉준미술전 준비위원회 김가연 간사(010-8907-9480)에게 하시면 됩니다. 구체적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생명사상의 터전' 원주로 가는 하루여행

- 오전 11시 : 원주 단구동 박경리문학공원 주차장 개인 집결, 박경리문학공원 방문
- 낮 12시 : 점심(원주 막국수)
- 1시20분 : 원주 중앙동 무위당기념관 방문, 관장님 해설
- 2시40분 : 원주 봉산동 원주역사박물관 도착
- 3시 :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우리 이야기 속의 신화"(정현기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4시 : 이애주 선생의 살풀이 작은 굿. 그리고 김봉준미술전시회 관람/작품 해설
- 5시30분 : 밥먹고 신명나게 노는 뒷풀이 - 원주 우산동 상지대학교 창조관(로칼푸드·유기농 식당)


* 이후 개별 해산

준비위원장 최종덕



[김봉준 화백]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김봉준 화백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경험하면서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시민운동과 지역문예활동의 길을 나섰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기획국장, 오랜미래신화미술관 설립 대표, 원주민예총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에는 교보생명문화상 예술상, 강원민족예술인상, 2012년 강원민족예술인상을 수상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