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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연정' 가능성 높아…"최악의 선택"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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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연정' 가능성 높아…"최악의 선택" 지적도

총선결과 여야 박빙…연정 구성 위한 기싸움 돌입

지난 18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보수 야당인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이 집권여당인 사민당(SPD)보다 불과 3석 많은 불안한 승리를 거둠에 따라 독일 정국은 연정 구성을 위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이번 독일 총선에 대해 유럽 정치인과 언론들은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며 개혁의 향방에 우려를 표했다. 이같은 우려를 반영해 총선 다음 날인 19일 유로화는 미 달러화에 대해 1% 이상 하락했고 독일 주가도 1.2% 떨어졌다.

독일 선거관리위원회가 19일 공식 발표한 총선 결과에 따르면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전체 투표수의 35.2%를 득표해 225석을 차지했고, 집권여당인 사민당(SPD)은 34.2%의 득표율로 222석을 차지했다. 또 자민당 (FDP)은 61석(9.8%), 좌파 정치인 오스카 라퐁텐을 중심으로 이번 총선에 처음 참여한 좌익당은 54석(8.7%), 녹색당은 51석(8.1%)을 얻었다.

투표율은 77.7%였으며 299개 선거구 가운데 한 후보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내달 2일로 투표가 연기된 드레스덴을 제외한 298개 선거구의 개표가 완료됐다.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제1당이 되긴 했으나 총선 이전 의석(247석)에 비해 22석이 줄었고 사민당(249석)은 27석이 감소했다. 녹색당도(54석) 3석이 줄었으며 자민당만 47석에서 61석으로 14석이 늘어났다.

당초 압승이 예상됐던 보수연합이 과반 의석에 크게 모자라는 불안한 승리를 거두자, 집권당인 사민당은 현 슈뢰더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연정 구성을 추진하겠다며 기선제압에 나섰다. 뮌터페링 사민당 의장은 19일 기자회견에서 "독일 유권자들은 (기민당 당수) 메르켈 여사를 독일의 지도자로 원치 않음을 분명히 밝혔다"고 주장했다. 슈뢰더 총리도 기민당이 "이처럼 재앙에 가까운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주장하는" 데 대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를 꿈꾸는 동독 출신의 메르켈 당수는 "유권자들은 우리에게 정부 구성의 최우선권을 주었다. 우리가 명백히 제1당"이라며 사민당에 대해 "자신들이 제1당이 아님을 인정하라"고 반박했다.

대부분의 정치분석가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사민당과 기민-기사당 간의 대연정의 가능성이 높지만 두 정치세력의 경제개혁 노선이 워낙 상이하기 때문에 대연정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과감한 개혁은 어려울 것이며, 이에 따라 독일경제의 회복도 늦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다른 대안은 기민-기사당이나 사민당이 자민당 및 녹색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는 것이만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사민당과 기민-기사당의 힘겨루기가 계속될 경우, 연정 구성이 실패하고 새로운 총선이 실시될 최악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연정은 독일 의회가 개회하는 10월 18일까지 구성돼야 한다.

이번 독일 총선에 대해 바로수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19일 "독일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유럽의 경제회복도 불가능하다"면서 독일 지도자들이 "최대한 빨리 안정적 해법을 찾아줄 것"을 당부했다. 유럽중앙은행의 한 간부는 "이번 총선 결과 나타난 교착상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 중 최악"이라고 평가했으며 미국의 한 경제분석가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개혁의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영국의 <더 타임스>는 '최악의 결과'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독일과 개혁을 위해서는 아마도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고 평가했고, 이탈리아의 <일 메사자로>는 "이번 독일 총선이 미래 유럽의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박스기사>

독일은 2차대전 이후 현대사에서 이미 한 차례의 '대연정'을 경험한 바 있다. 1966년부터 69년까지 만 3년 동안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과 사민당(SPD)의 연정이 그것. 당시의 수상은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였고, 부수상 겸 외무장관은 사민당의 대표이자 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였다.

이 대연정은 총선을 통해 탄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경우로 꼽히기도 한다.

1963년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수상에 이어 기민당 정권을 이어간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수상은 1966년 들어서면서 위기를 맞았다. 경제 호황이 끝나 불경기가 닥치기 시작하면서 실업자가 늘고 연방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적자도 불어나기 시작한 것. 이때 집권 연정을 구성하던 기민-기사당과 자민당(FDP)이 다음해의 예산안을 '적자 편성'하는 문제를 두고 결정적으로 의견 대립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자민당은 "적자 편성을 시정하라"는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우여곡절 끝에 연정에 파견했던 4명의 장관을 철수시키기에 이르렀고, 예산안도 연방 상원에서 부결되면서 에어하르트 수상의 권위는 집권 기민당 안에서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에 그는 당내의 압력에 밀려 수상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바덴-뷔르템베르트주의 수상이던 키징거가 수상 후보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당초 연정을 구성하던 자민당이 연정에서 이탈할 것을 공식선언하면서 차기 연정 구성을 위한 협상 구도가 대단히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집권 기민당이 '의회 해산'을 선언하지 않아 기존의 의석 분포를 전제로 연정 협상을 하게 된 점도 복잡함을 가중시켜다.

1963년 총선 결과는 기민-기사당 47.6%, 사민당 39.3%, 자민당 9.5%였다. 당시는 녹색당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이같은 구도를 전제로 우선 제1당인 기민-기사당이 기왕의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과 연정 협상을 벌였으나 '예고된대로' 실패로 끝났다. 이에 자민당이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함에 따라 이번엔 사민당과 자민당이 협상을 벌이는 수순에 들어갔다. 이번엔 빌리 브란트가 수상 후보가 될 경우 자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근본적으로 두 당의 의석을 합쳐봐야 기민-기사당에 비해 불과 6석밖에 많지 않다는 점이 정권 운용에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이 부각됐다.

이에 사민당은 기민-기사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1949년 전후 독일 정권의 수립 이후 17년 동안 야당으로만 있던 사민당 입장에서는 방향을 크게 전환해 공동정권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던 기민-기사당도 이를 수락함으로써 1966년12월 전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연정' 시대의 막을 올리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독일의 대연정은 보수와 진보의 양대 정당이 정책적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다기보다는 다른 연정의 가능성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뒤 마지 못해, 즉 기민-기사당 입장에서는 제1당의 지위(수상)를 유지하고 사민당 입장에서는 최초로 집권 연정에 참여한다는 각각의 정치적 계산에 의거해 합의에 이른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이 새로이 선거를 통해 '전부 아니면 전무'의 게임에 돌입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런 정략적 판단의 결과가 오래 갈 리 없었다. 경제 여건은 더욱 어려워져 실업자는 계속 늘었고, 서독의 경제성장률은 전후 처음으로 1967년 마이너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1969년의 대통령 선거(내각제 하의 간선)에서 두 집권 정당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사민당 소속의 구스타프 하이네만 법무장관이 당선되는 파란을 낳기도 했다. 연정 내의 골은 계속 깊어만 갔다.

이 대연정 시기를 특징 짓는 독일사회의 특징은 사실은 정치에 있지 않았다. 훗날 이 대연정 시기는 현대 독일정치사의 '과도기' 또는 '간주곡'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오히려 1968년의 학생혁명이 이 무렵 독일사회가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와 교육 정책 및 비상조치법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건 학생운동은 사실 2차대전 후 경제는 회생시켰지만 사회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구조 속에 동력을 상실한 독일 사회 전체에 대한 '거대한 반역'이었다. 바더와 마인호프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학생운동의 지도자 루디 두치케가 저격 당하는 등 독일 사회는 학생운동의 거대한 물결과 이를 둘러싼 논란 속에 휩쓸려갈 뿐이었다. 이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1970년대 이후 각종 사회운동을 거쳐 녹색당으로 합류해 오늘날 독일의 정치지형을 바꾸는 동력으로 전화된다.

이런 혼란상 속에 1969년 9월, 그러니까 대연정 수립 2년 10개월 만에 제6대 연방 하원선거가 실시된다. 어차피 대통령 후보도 단일화 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대연정은 이미 물건너 가고 새로운 경쟁구도 속에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여기서 기민-기사당은 또다시 46.1%의 지지를 얻어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사민당은 지난 선거에 비해 다소 늘어난 42.7%를 얻었고, 자민당은 지난 선거보다 줄어든 5.8%를 얻었다. 이때 자민당 대표 발터 쉘이 사민당과의 연정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전후 최초의 사민당 정권을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수상은 빌리브란트이고, 발터 쉘은 부수상 겸 외무장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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