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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한일회담 빨리 타결해야…극동 안정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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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한일회담 빨리 타결해야…극동 안정에 기여"

[외교문서 공개] 기나긴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과 미국

'굴욕외교'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협정과 베트남전 참전 과정에 관한 외교문서가 26일 언론에 공개됐다. 관련자들의 회고와 풍문으로만 떠돌던 당시의 협상 과정이 공식 문서로 확인됨에 따라 협정 책임자들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책임 논란과 함께 한일협정 재협상 요구 등의 여론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이태식 외교통상부 제1차관은 이날 관련문서 공개에 즈음한 기자회견에서 "평가는 전문가의 연구와 일반의 판단에 맡긴다"며 "재협상 문제는 현단계에서 검토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순수한 '공개' 이상은 아니라는 정부의 이같은 입장에 역사학계, 정치권 등은 공개 문서를 면밀히 검토해 대응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일협정, 짙게 드리워진 미국의 그림자**

이날 공개된 문서 가운데 한일 국교 정상화 관련 부분은 1951년 말부터 1965년 6월 22일까지 13년 8개월에 걸쳐 벌어졌던 협상 과정을 담은 156권의 문서철로 3만5354쪽의 방대한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단연 관심을 끄는 것은 한일협정 전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미국의 역할이다.

미국은 협상의 기원이 됐던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부터 회담 종결시까지 '동북아 반공 교두보 확보'라는 지상 과제를 관철키 위해 한일 간의 결속을 강요했다.

이같은 미국의 역할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대목은 협정 성사가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한국 외무장관과 주한 미 대사 간의 공동성명이다. 64년 8월 17일 발표된 성명에는 "미국은 한일간 제 현안의 조기타결을 위해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협정 타결을 3개월 앞둔 3월 16일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일본이 보다 더 양보해야 한다는 우리측 주장을 납득하고 협조를 약속했으며, 4월 29일에는 번디 미 국무부 차관보가 박정희 대통령 방미 전에 한일협정이 타결되기를 강력히 희구하고 있다고 밝힌 메시지도 있다.

한일 간의 지루한 줄다리기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부분도 나타난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시 존슨 미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한일 국교정상화는 극동 안정에 막대한 공헌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언급했다는 것.

당시 주미대사는 "현 정세는 한일회담 타결에 좋을 것으로 보며 타결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5월 중순 일본국회 회기가 끝나기 전에 일본국회에서 조약 비준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이 조속히 종결되기를 희망한다"는 미 국무장관의 발언을 한국 정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부, 미국 활용 논의도…'코리언 로비팀' 구상**

미국의 적극적인 자세를 인지한 한국 정부는 이를 이용해 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1964년 10월 번디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의 방한을 계기로 작성된 양달승 청와대 정무비서관의 내부 보고서에 그런 내용이 있다.

양 비서관은 보고서에서 "회담의 중심지가 서울도 도쿄도 아닌 워싱턴으로 옮겨갔다"며 "워싱턴에서 한일 양국의 영향력을 비교하면 유감스럽지만 일본에 우세하다"고 분석하면서 "빨리 워싱턴에, 특히 미 의회 내에 한국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인사를 묶어 '코리언 로비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로버트 키니 당시 하우스 장군 외교문제 고문과 스바너 맥큐어 당시 시카고대학 총장 고문, 로비스 올리버 이승만 대통령 고문 등을 지목하며,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의 미 의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미국 인사들을 총동원할 것을 제기한 것으로 돼 있다.

***이북 청구권까지 시도…'독도 폭파' 최초 아이디어는 일본 대표**

미국의 역할 외에 그 간 학계와 관련자들에 의해서만 주장되던 몇 가지 사실도 새롭게 드러나거나 확인됐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정부가 청구권을 주장하는 데 있어 북한 지역의 청구권까지 함께 주장한 점이다. 한국 정부는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가 대한민국임을 근거로 이북 지역의 청구권도 한일협정에서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그러나 대한민국과 해결하는 것은 남한 지역에 관한 청구권 문제일 뿐, 북한 지역에 관한 청구권은 미해결로 남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한국 정부도 이를 양해해 협정문안에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문서에서는 또 '독도 폭파론'의 최초 주인공이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아니라 일본측 대표단의 일원인 이세키 유지로 외무성 아세아국장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세키 국장이 62년 9월3일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회의에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세키 국장의 이같은 아이디어를 차용한 김 중정부장은 1962년 11월 13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도 결국 공개**

한편 한일회담의 핵심 사안이었던 일본의 보상금 규모를 결정한 문서인 '김종필-오히라 메모'도 이번 공개에 포함됐다.

정부 내에서는 그동안 메모를 외교문서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공개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이를 공개하는 것이 '전면 공개'라는 취지를 살리는 것이고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내용이라는 이유로 공개를 결정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1962년 김종필 중정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 간에 오간 비밀 메모로, 여기에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의 합의 내용이 담겨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메모에는 이 돈이 어떤 명목인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아 긴 세월동안 싸워 왔던 청구권 문제를 시간에 쫒긴 '정치적 타협'으로 마무리지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거액의 별도 정치자금 제공설 등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자 2년 후인 64년 당시 극소수 야당 의원들에게 메모내용을 공개했으나 '밀실타협''정치적 결탁' 등의 비판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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