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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桓國)·칸국(汗國)·한국(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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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환국(桓國)·칸국(汗國)·한국(韓國)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1> 김누루하치와 산채나물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저는 야구(baseball)를 좋아합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타자가 홈런을 치고, 미국 메이저 리그 최초의 한국인 투수 박찬호 선수가 공을 잘 던지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외야 수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젠 나이가 좀 들어서 잘하기는 어렵지만 말입니다.

높이 솟아오른 공을 보면서 그 공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이나 명상(冥想)을 하는 것이나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먼저 수비하는 곳에 무슨 다른 장애물은 없는지를 확인하고 오직 그 공만 보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들리면 이내 공의 위치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달려가야 하는데, 이때 잡념이 생기면 으레 그 공을 놓치게 됩니다.

요즘은 하도 놀이도 많아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광경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야구광(野球狂)들도 실제로 경기하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므로 그저 야구경기를 TV로 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사실 야구는 장비도 많아야 하고 사람도 많아야 하니 동호회(同好會)를 하지 않은 다음에야 하기가 어렵죠.

그런데 TV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보면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면 포수(catcher)가 투수(pitcher)에게 가서 뭔가 소곤소곤 의논하곤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야구 해설가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래요, 포수는 인코스(타자 몸쪽으로 가는 공)가 아니라 아웃코스(타자 몸 바깥쪽으로 가는 공)를 요구했는데 그 사인이 제대로 안 맞으니까 투수에게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라거나, "커브(휘는 볼)로 승부를 해야 하는데 선남렬 투수가 자꾸 직구(直球)를 주니까 이민수 포수가 일단 브레이크를 건 것 같습니다."등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해설을 들을 때마다 저는 좀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늘 공을 주고받는 투수와 포수가 서로 주고받는 수신호(사인)를 제대로 모를 리는 없을 것인데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저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야, 너 제수씨(弟嫂氏)하고 싸웠냐? 잊어버려라. 오늘 경기 마치고 제수씨가 좋아하는 장미꽃이나 보내라."
"어제 우리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힘들지? 그래도 조금만 힘내자."
"야, 신경 좀 쓰라. 저 감독과 코치 얼굴 한번 봐라. 눈을 부라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지 않니? 오늘 밤 감독에게 시달릴 생각을 해봐라. 그리고 다음 경기에 제대로 출장하려면 이번 위기를 잘 넘겨야 해."

***(1) 이상한 논리, 『요동사』: 신삼한정통론(新三韓正統論)**

최근 들어서 '국사해체론'이니'요동사(遼東史)'니 하는 관점들이 대두하여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쥬신사 말살 프로젝트)의 하나의 대안(代案)이 되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사'의 입장은 요동(遼東)의 역사는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라는 것이죠.

'요동사'적인 관점은 변경사(Border history)적인 시각으로 요동의 역사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연구 대상이 어느 하나의 국민이나 민족국가의 단위에 포섭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요동사'의 관점은 그 내용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요동사'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바는 마치 신판(新版)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골자는 요동은 한국도 아니요 중국도 아닌 또 하나의 역사공동체라는 관점입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한국과 북방 유목민(범쥬신)과의 연계를 단절하고 단순히 '삼한(三韓) = 한국'이라는 등식으로 엮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고구려를 완전히 한국의 역사에서 배제하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마치 큰 강의 흐름을 잘라서 둑을 쌓아 작은 저수지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역사의 단절을 시도하는 것이죠. 물론 이런 종류의 시도는 그 동안 한국의 사학계가 줄기차게 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한족(漢族)들의 동북공정을 크게 도우는 행위지요.

그렇다면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고구려·왜·삼한·동옥저·읍루·예 등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들 나라들을 다시 요동과 한국이라는 식으로 나눠야 하겠지요. 반도 쥬신의 현실 안주적이고 축소 지향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동사'적인 관점은 요동 지역과 한반도 사이의 인종적 특성이나 문화적 공통성과 유기적인 관련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단지 중국 - 한국 이라는 현대 시점의 논리를 과거에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죠.

'요동사'에서는 "한(漢)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에는 동이(東夷)는 요동·한국·일본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김한규, 『요동사』(문학과 지성사 : 2004)]."고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매우 애매하고 황당한 논리가 됩니다. 이 때 한국(韓國)은 삼한(三韓)이 되고 그 삼한이 오늘날 한국 민족의 원류라는 말밖에 되지 않지요[그러면 이후 요동 지역까지 지배했던 고구려와 백제(부여)는 어찌 됩니까? 그들의 영역은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존재했지 않습니까? 또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대고구려, 또는 후고구려)는 또 어떻게 됩니까?].

한족(漢族)의 동북공정의 대안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하는 '요동사' 개념이 가진 가장 위험한 점은 우리 민족사의 진원지(震源地)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은 모두 요동을 근거지로 하거나 요동을 주요 세력권으로 한 국가들입니다. 특히 백제는 남부여(南夫餘)라고 하기도 하여 충실한 부여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동과 만주에서 건국한 금나라나 청나라는 신라(新羅)에서 나왔다고 하고 몽골은 고구려(高句麗)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요동의 국가라고만 한다면 상식적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요동사'적 관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한국(韓國)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 점을 조목조목 살펴봅시다.

***(2) 환국(桓國)·한국(汗國)·한국(韓國)**

'요동사'를 포함하여 보수 사학계는 '한국(韓國) = 삼한(三韓)'이라는 식으로 한국을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즉 이 한(韓)이라는 말이 한반도 중남부의 삼한(三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한국(韓國)이라는 말이 중국 사서(史書)의 삼한(三韓)에서 온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동사'적인 시각은 한국의 역사가 삼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요동의 역사는 다른 역사공동체의 역사라고 우깁니다. 이것은 실증사학자들이 가지는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제 구체적으로 이 점들을 󰂛 언어적 관점, <가> 지리적 관점, <나> 수장적(首長的 ) 관점, <다> 유목민들의 일반적 명칭으로서의 한국, <라> 종합고찰 등으로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가> 언어적 관점

한국(韓國)에서 말하는 한(韓)은 중국의 한(韓)을 의미하거나 한반도의 삼한(三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쥬신의 고유어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쥬신의 고유한 말을 한자(漢字)를 빌려서 표현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각종 사서에는 고구려만 해도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高駒麗(『漢書』), 高麗(『舊唐書』;『新唐書』), 高離·豪離(『三國志』), 句高麗, 句麗(『三國史記』;『大東韻府群玉』) 등으로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라는 말은 한자의 뜻으로는 알 수 없는 말이라는 얘기지요. 즉 고(高)·구(句)·호(豪)·고구(高句)·고구(高駒) 등의 말을 '가우리', '코리', '꼬리', '고리', '구리' 등의 말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죠.

『상서(尙書)』에는 "『한서(漢書)』에 '고구려', '부여', '한(韓)'이 있는데,'馬干'은 없으나, '馬干'이 곧 저 '韓'이라, 음은 같고 글자가 다를 뿐"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尙書』卷18 周官 弟22 孔穎達疏 참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쥬신족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는 이 '韓'이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의 한(韓)나라가 아니라 단지 그 음을 빌려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인데 [마간], 또는 [ㅁ 가흔]·[한]·[카흔]·[카안]·[칸] 등으로 발음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정재도,「'한'이냐 '韓'이냐 '馬干'이냐」『한글 새소식』365호(한글학회 : 2003. 1)].

쉽게 말해서 우리 민족의 강역을 지칭하는'한(韓)'이라는 말은 분명히 한자(漢字) 말은 아니고 다만 음을 빌려 쓴 것이므로'馬干'으로 적어도 된다는 말이지요. 달리 말하면 칭기즈칸(成吉思汗, 또는 成吉斯汗)에서 사용된'한(汗)'으로 사용해도 되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이 한(汗)은 Kahn 이나 Han 등의 발음이 나는 말을 한자 말로 표기한데 불과합니다. 일단 여기서는 마한(馬韓)과 혼동하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England)를 영국(英國 : 빼어난 나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비하하여 영국(嬰國 : 애송이 나라)으로 쓸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발음은 모두 [잉꾸어]로 똑같습니다. 한족(漢族)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주변민족들을 설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요동사'의 시각은 한국이라는 대상을 철저히 한반도 지역에만 국한 시킵니다. 그 근거로 든 것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末王)인 준(準)이 그 스스로를 한왕[自號韓王]"이라고 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한'의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즉 이 '한왕'이라는 말은 중국의 사가들이 '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지요. '한왕'은 동의 반복된 말로 '초가[草家]집'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이라는 말 자체가 왕(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국어 학자들도 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기문의 『국어사개설』에서 부여관명(夫餘官名)의 ka, 가(加) 등과 몽골고어 qan, 또는 신라어 관명의 한(翰)·간(干)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먼저'한'이 고유어로서 가지는 주요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한'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말로 보통 서양에서는'칸', 동양에서는'한'(일본에서는'간')으로 쓰이고 한반도에서도 '한'으로 사용합니다.

① 하늘[天]을 의미하는 경우 - 한인, 한웅 등, 한우물(하늘에 제사 지내는 우물)
② 우두머리[首長]를 의미하는 경우 -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마립간)
③ 크다[大]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밭[大田], 한길[大路] 등
④ 하나[一]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 나라 (하나의 나라), 한 아버지
⑤ 같다[同]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 핏줄, 알타이는 한 핏줄, 한 겨레 등
⑥ 바르다[正]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 '한복판'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韓國)에서 사용된 한국이라는 말은 위의 여러 가지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사용된 것이지 구체적으로 고조선의 왕 이름이 한왕(韓王)이어서 한국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요동사'적인 시각에서 한국(韓國)을 단순히 한왕(韓王)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은 한국에 대해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동사'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잘못되었으니 그 위에 지어놓은 모든 이론적 작업도 잘못되었다는 말이지요.

<나> 지리적 관점

여러분들 가운데는 언어적 관점으로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실제로 한국(韓國)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봅시다.

첫째, 신라 말기나 고려시대에도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왕융(王隆)이 궁예(弓裔)에게 말한 기록이 그것이죠(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高麗史』太祖紀). 이 점은 앞부분에서 이미 검토한 사항입니다('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 참고). 즉 한반도와 만주 및 요동을 하나의 범주로 사고하는 시각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둘째, 요동과 만주 지역을 삼한(三韓)으로 말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숙신(肅愼)에 대하여 "한(漢) 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고 하고, 위진시대(魏晋時代)에는 읍루(挹樓)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權兌遠,「濊·貊文化圈과 肅愼문제」,『論文集』43,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숙신이라면 주로 만주 지역인데 이것도 삼한(三韓)으로 보는 관점이 있죠. 즉 삼한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반도 중남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셋째, 요동의 북쪽도 한주(韓州)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고구려 때 요동의 북쪽에 막힐부(鄚頡府)가 부여의 옛 땅이었고 (扶餘之故地 : 『新唐書』「渤海傳」), 이 땅을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불렀다는 것입니다(韓州 … 高麗置 鄚頡府 都督鄚·高二州 渤海因之 : 󰡔遼史󰡕「地理志」). 그리고 송(宋)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이 한주가 삼한의 땅(三韓之地)라고 합니다(曾公亮,『武經總要』卷16,「北蕃地理」).

이상의 기록들만 보아도 삼한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 또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삼한이라는 것이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좀 더 심한 예를 볼까요?

일본(日本) 규슈(九州)의 높은 산 가운데 가고시마와 미야자키에 걸쳐 있는 산 '가라쿠니다케(韓國岳)'가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큰산(韓國岳)'이라는 뜻입니다. 이상하죠? 웬 한국산이 일본의 규슈에 있는가 말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도 확실히 아시겠죠? 여기서 사용된 한(韓)이 한반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쥬신족의 오랜 언어적인 전통에서 나온 말임에 유의해야합니다. 즉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가서 이름을 붙였거나 아니면 일반적인 쥬신적 의미의 한국의 뜻으로 사용했겠지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제 신채호 선생의 말씀을 한번 들어봅시다.

"왕성(王姓)을 '해(解)'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함이요, 왕호(王號)를 '불구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광휘(光輝)에서 뜻을 취함이요, 천국(天國)을 '환국(桓國)'이라 함은 광명에서 뜻을 취함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을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 곧 광명신(光明神)의 서숙(棲宿)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鮮)'이라 칭하니 조선도 고어(古語)의 광명이란 뜻이니[신채호, 『註解 朝鮮上古史』(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 1994) 104쪽]."

신채호 선생은 단순히 한반도의 남쪽인 현재의 남한 지역이 우리 민족의 중심무대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여·고구려만 보더라도 우리의 역사가 남한 지역에 국한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지요.

<다> 수장적(首長的) 관점

우리는 한국이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이라는 점을 분석했습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도 '한'이 우두머리로 쓰이는 경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이병도,『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 1979) 53~54쪽].

①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의 경우에도 대인(大人)을 가(加[Kha])라고 한다. 그리고 만주나 몽골어에서 군장[君長(大人)]을 한(汗[Han]), 혹은 가한(可汗[Khan])이라 한다.

② 신라에서도 군장(君長), 또는 대인(大人)을 간(干[Khan]), 금(今[Khum]), 감(邯[Kham])이라 했고 신라 관직명(官職名) 중에 대아찬(大阿飡)을 한아찬(韓阿飡), 혹은 한찬(韓飡)이라고도 하고 대나마(大奈麻)를 한나마(韓奈麻), 대사(大舍)를 한사(韓舍)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쥬신들은 우두머리나 임금을 한(칸)이라고 씁니다. 이 뜻은 어원적으로 주로 '하다[多 : 많다]'라는 형용사나 '크다[大]'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것이거나 종교적 지도자나 신(神)을 의미하는 감() 또는 가미, 신조(神鳥 : 신의 전령, 샤먼)인 까마귀[烏], 나아가서는 하나[一], 중간[中]이라는 의미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알타이 계열의 종족들은 하늘[天]과 관련된 말들을 지도자의 호칭에 붙이기를 즐겨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병도 박사는 우두머리의 명칭에 하늘[天]과 관련된 것을 붙이는 것은 그들이 다스리는 지상의 국가들을 하늘의 국가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이병도,『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 1979]. 그리고 환인(桓因)이라는 한문 용어는 불교의 '동방호법신 (東方護法神)'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후일 불교가 자리 잡으면서 생긴 일일 듯하고 오늘도 흔히 쓰이는 '하느님'과 같은 단어로 생각되고 있지요.

앞서 본대로 백제어로 왕을 어라하(於羅瑕), 건길지(鞬吉支)라고 존칭하였고 『위서(魏書)』에는 고구려의 유리왕(누리왕)을 노려해(奴閭諧[누리해] : 온 누리를 비치는 해 = 東明)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어로는 임금을 '개~해'(諧)라 불렀고 수장(首長)을 의미하는 말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땅 이름에서도 왕을 의미하는 '개'(皆)가 여러 군데 나타납니다. 즉 칸(큰, 한)이 다스리는 땅의 이름에 칸(汗)을 의미하는 말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건륭황제 가로되,'삼한(三韓)은 삼한(三汗)이요 삼한제국(三韓諸國)의 비리(卑離)는 곧 貝勒(패리)이니, 한(韓)이 패리(貝勒)를 통솔함은 동방제국(東方諸國)의 체례(體例)가 그러하다'하였으니 이 풀이가 가장 이세(理勢)에 합당하다 하노라. 신라에 거서간(居西干)·각간(角干) 등의 칭호가 있고 고구려와 백제에 가한(可汗) 등 신(神)에 대한 제례(祭禮)가 유(有)하니, 우리 고대에 '한(汗)'이란 관명(官名)이 있던 증거라, 고구려 때는 전국을 삼경(三京)에 나누고 경(京)마다 '한(汗)'을 두었기에 … [중략] … 진번(眞番)은 곧 진변(辰卞)이요, 三韓(삼한)은 곧 三汗(삼한)이요, 三汗(삼한)은 곧 三京(삼경) 장관(長官)의 이름이니 원(元) 태조(太祖) 성길사한(成吉思汗)의 분봉(分封)한 사한국(四汗國)의 사한(四汗) 같은 자일 것이라, 모두 후세의 창조한 국명(國名)들이 아니라 하노라[신채호,『註解 朝鮮上古文化史』(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 1994)]."

[그림 ①] 신채호 선생

즉 신채호 선생은 한국(韓國, 또는 汗國)이라는 말은 '칸의 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건륭제나 신채호 선생이나 '한국 = 韓國 = 칸국(汗國)' 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韓國)이라는 말은 몽골의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한국, 킵자크 한국 등에서 말하는 한국(汗國)과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위의 내용 가운데 패리(貝勒), 즉 '버일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왕(王), 또는 부족장(部族長)을 뜻합니다. 일찍이 청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1587년 건주(建州)를 통일하고 허투알라(赫圖阿拉) 부근인 퍼알라[佛阿拉 : 현재의 얼따허쯔춘(二道河子村) 동남쪽]에 성을 구축하고 스스로를 수러버일러(Sure Beile - 淑勒貝勒)라고 칭하였습니다[임계순,『淸史』(신서원 : 2001) 24쪽]. 위의 내용을 보면 한(韓, 또는 汗)이나 버일러(貝勒)는 모두 수장(首長)이나 군주(君主)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 청나라의 성군 건륭제가 말하는 것도 한국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 중남부(현재의 대한민국)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만기(萬機)를 관장해야 하는 황제(건륭제)도 아는 사실을 평생을 역사학(歷史學)만 들고 파는 우리나라 사학자(史學者)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사실 이것은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굳이 논증을 해야 하는 제 처지도 한심합니다. 그만큼 우리 학계의 중국 병이 깊은 것이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삼한(三韓)을 단순히 나라를 나타내는 말로만 파악하고 있는 범엽(范燁)의 『후한서(後漢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 나라에는 삼한(三汗 : 세 명의 칸이라는 뜻)이 있었다. 그래서 한 나라씩 통치를 한 것이다. 역사가라는 자가 한(汗)에 군장(君長)의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음이 같다는 것 때문에 결국은 오역하고 만 것이다."

즉 삼한(三韓)이라는 의미를 지역적으로 국한하여 충청·경상·전라에 있던 나라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한(三韓)이라는 말은 세 명의 칸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이지 그것이 한반도 중남부 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아시겠죠?

여기서 잠시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갑시다.

지금까지 보면 칸이나 거서간(居西干)·마립간(麻立干)의 간(干)이나 단군왕검(檀君王儉)도 같은 종류의 말인데 한족(漢族)들은 무슨 연유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쥬신의 군주(텡그리 옹군)를 선우(單于)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① '단간(單干)'을 잘못 읽었거나 ② 몽골어로 하늘[天], 또는 천신(天神)을 의미하는 텡그리(Tenggeri)와 하늘의 자손, 즉 천손(天孫)을 의미하는 '텡그리고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단군왕검(檀君王儉)에서 왕검(王儉)이라는 말도 쥬신의 용어라는 점을 알아둡시다. 이 왕검이라는 말은 성스러운 인물이나 물체, 또는 장소를 의미하는 몽골의 샤먼 용어인 '옹군(Onggun)'과 음이 일치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산꼭대기나 큰나무를 통해 내려온다는 몽골 - 만주의 샤머니즘 세계관들은 한반도에서도 여러 군데서 나타납니다.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석탈해(昔脫解)·김알지(金閼智)는 대표적인 예입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314쪽).

따라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란 앞으로 '텡그리옹군(Tenggeri Onggu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라> 유목민들의 일반적 명칭으로서의 한국

그러면 이 한(韓), 또는 칸(汗)이라는 말은 쥬신의 전유물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한(큰)'이라는 말은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등에까지 널리 쓰이는 말이라는 것이죠. 대체로 그 뜻은 ① 하늘[天], ② 추장[군장(君長)], ③ 나라 이름[국명(國名)], ④ 벼슬 이름[관명(官名)]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몽골이나 터키 등지에서 '임금'의 뜻으로 쓰이는 ㅋ한(Khan)이라는 말을 중국인들은 '한(汗)'으로 나타냅니다. 발음이 [칸]과 [한]의 중간 발음인 듯합니다. 이 한(汗)이라는 중국 문자의 뜻은 땀(sweat)이라는 것이지만 단지 음만 빌려 쓴 말이죠. 예를 들어 『훈민정음』에도 'ㄱ'은 군(君)자의 첫소리라는 말이 있듯이 한(汗)은 발음만 빌린 것입니다. '오고타이한국'의 경우 오고타이한은 임금의 명칭이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오고타이한국'이지요.

그런데 애초에 이 '한'이라는 말을 표현할 문자가 없던 중국의 주변민족들은 어떤 식으로 표현했을까요? 대체로 환(桓)·한(翰)·한(韓)·한(汗)·간(干)·감(邯)·한(漢) 등이 이 Khan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한족(漢族)들은 주로 땀(sweat)을 나타내는 한(汗)이라는 글자로 쥬신의 제왕(칸)을 표현하는군요.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족(漢族)들은 쥬신의 제왕조차도 이 모양으로 무시를 하니 하물며 일반인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겠습니까?

양주동 선생은 『고가연구(古歌硏究)』에서 하늘[天]의 어원은 '한밝' 이고 이 말은 산의 이름에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동방의 옛 민족들이 하늘에 대한 그들의 관념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산[高山]은 바로 하늘의 연장이며 제천의식이 행해지는 장소였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천산(天山)의 관념들은 조선과 부여는 물론이고 북방(北方) 여러 부족과 서장(西藏) 및 중앙아시아 민족들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사용해 온 '한'이라는 말은 '밝'과 더불어 알타이인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신앙이자 정체성을 파악하는 근거가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 종합고찰

지금까지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상식적인 내용인데 이것을 고증하려는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면 조선(朝鮮)·쥬신(諸申)·한국(韓國)·코리아(Korea) 등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말도 고증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이런 논의는 접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한국(韓國)이라는 말은 '쥬신의 나라', 또는 '칸의 나라', '큰 나라', '중심이 되는 나라' 등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의미를 보더라도, 한국(Korea)의 역사를 요동(遼東)과 알타이에서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죠?

'요동사'의 관점은 고구려의 역사를 쥬신사에서 떼어 내려는 시도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습니다. 발해나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의식이 견고하고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였는데 고구려를 한국사의 무대에서 제외하다니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한족(漢族)과 알타이에서 백두산 -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 즉 쥬신 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따라서 그 동안 최남선 선생이 동아시아 문화의 양대 주역으로 '지나문화권(支那文化圈 : 중국 문화권)' '불함문화권(不咸文化圈 : 범알타이계 문화권)'으로 중국과 알타이계가 항상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 투쟁해왔다고 했듯이 이 같은 쥬신 - 한족의 대립구도는 지극히 당연한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큰(한) 사상**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본다면,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한'이란 순 우리말이며 ① 하나라는 의미, ② 크다는 의미로 몽고어나 만주어에서 사용하는 한[汗, 王] 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칸[한(汗)] 사상', 또는 '한(큰)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칸(한, 큰) 사상은 쥬신이 가진 집단 무의식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쥬신의 신화에 따르면, 쥬신족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천손(天孫)이라고 합니다. 즉 하늘나라[천국(天國), 또는 환국(桓國)]가 있어 그 후손들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들이 바로 쥬신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한족(漢族)도 하늘을 중시하여 그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하지 않나?"라고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그 내용이 분명 다릅니다.

예를 들면 한족(漢族)의 경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천명사상(天命思想)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사고는 철저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요소가 강하고 운명론적인 요소가 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의 후예(後裔)가 아니고 여와가 진흙으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지요. 한족(漢族)에게 천자(天子)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 천명(天命)을 수행하는 대리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탄생에는 하늘이나 태양과의 감응현상(感應現象)이 필요가 없지요. 오히려 하천(河川)이나 대하(大河)를 의미하는 용(龍)과의 결합이 더욱 중시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신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에 비하여 쥬신은 대개 태어날 때부터 삼신(샤먼) 할머니가 점지를 해줍니다. 그리고 쥬신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하늘의 자손이라야 칸(Khan)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 한국인(汗國人 : 칸국인)들도 모두 천손의 후예들이지만 좀 더 혈통적으로 하늘에 가까이 닿아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화가 필요합니다. 한국인(칸국인)들에게 역사 시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천손 신화가 존재했던 것도 그들이 바로 천손(天孫)이라야만 한국인(칸국인)을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래서 쥬신 사회에 있어서 천손강림(天孫降臨 :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옴) 신화가 존재하는 것은 미개(未開)하거나 비문명적(非文明的)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쥬신 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쥬신의 통치자들에게는 태양의 빛을 받거나 신조(神鳥)의 알에서 나거나 하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13세기 세계를 무력으로 지배한 세계의 주인 칭기즈칸조차도 알랑고아의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정 안 되면 태몽(胎夢)이라도 천손(天孫)과 관련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족(漢族)들은 실력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릴 수도 있지만 쥬신을 다스리려면 실력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족(漢族)들의 역사를 보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많습니다. 물론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힘의 유무에 따라 힘이 있는 자가 바로 권력을 차지하고 황제가 됩니다. 그러나 쥬신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칸(왕)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천손 증명서가 없이는 곤란하죠.

그래서 고려시대 때나 일본(日本)의 경우 실질적인 모든 권력을 장악한 군벌(軍閥)의 우두머리라도 왕을 칭하지는 못합니다. 고려의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후에도 오랫동안 고려 귀족들의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후일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찬하게 됩니다.

일본(日本)의 경우는 천년이나 바쿠후[막부(幕府)]라는 이상한 형태의 권력이 생성됩니다. 실질적인 모든 권력은 쇼오군(將軍)이 장악하고 천황(天皇)은 때로 식솔들의 끼니도 걱정하는 상태이기는 해도 쇼오군은 이론적으로는 천황 아래의 존재였던 것이지요. 쇼오군이 천황이 되려고 했으면 아마 그 쇼오군은 2대를 넘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도 쥬신(일본)이 가진 천손사상은 2차 대전 당시 그 많은 일본 국민들이 큰 불평도 없이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자손이 하는 일이니 사람이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중국 같았으면 벌써 황제가 바뀌었겠죠.

쥬신의 칸들이 천손인 것을 증명해야만 칸이 될 수 있는 점을 보다 실질적인 각도에서 살펴봅시다.

무엇보다도 유목민(遊牧民)들은 "자신이 경작하고 있는 농토를 떠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농경민(農耕民)들과는 다릅니다. 즉 유목민들에게 특정 지배집단의 의지를 지나치게 강요하면 그 초원을 떠나면 되기 때문에 특정한 유목민을 지배할 수 있는 통치능력의 정도는 그 지배부족의 무력적 우위(physical overwhelming)와 부족들이 가지는 자유(freedom) 사이에서 균형을 필요로 하는 것이죠[김호동, 「고대유목국가의 구조」『강좌중국사Ⅱ』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편 (지식산업사 : 2004) 참고].

다시 말해서 대부분 유목민들은 국가라는 대규모 구속적인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유목생활은 여러 가지 부족한 물품들이 많기 때문에 그 부족한 물품들을 농경민 사회로부터 교역과 거래, 또는 전쟁을 통해 획득해야만 합니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유목민의 군주(칸)들은 이들 유목민의 생필품(necessaries of life)의 공급 경로를 장악한 사람들(supply chain managers)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칸들은 이 생필품들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과 그 물자들의 유통과정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유를 포기(alienation of freedom)하는 것보다도 생필품의 공급에 따른 편익(benefit from necessaries' supply)이 더 클 경우에는 칸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목민들의 생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류의 성공적인 생필품의 공급자가 바로 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매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러 부족의 유목민들을 하나의 국가 체제로 통일적으로 묶어내는 데는 충분한 무력(physical power)이 있어야 하고 그 무력을 통해 유목민들의 자유(freedom)를 구속할만한 충분한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칸은 단순히 무력의 우위나 훌륭하고 값싼 대형 마트(Mart)의 건설자일 뿐만 아니라 보다 신성한 권위(dignity)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휴우, 정말 칸이 되기가 힘들군요).

즉 칸은 여러 개의 평등한 부족들 가운데 우둑 솟은 초부족적(超部族的) 수령(首領)의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엄청난 유목국가들은 하나같이 초부족적인 유목국가였습니다. 웬만한 논리로 자유로운 유목민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나타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손 사상(天孫思想)이라는 것입니다.

천손사상이 유목민들에게 쉽게 먹히는 것은 유목민들은 대부분 하늘과 관련하여 사고하고 목축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유목민들의 삶이 자연의 변화에 종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과 무슨 관계라도 있으면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이런 점에서 칸은 유목민들이 자연재앙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하늘의 전령, 즉 샤먼적 존재라는 의미도 되겠죠?

그러니까 칸은 '중국식의 물리적 황제와 신의 전령(샤먼)' 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 즉 텡그리옹군(Tenggeri Onggun)이 가진 실존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쥬신의 고유 신앙에는 하늘, 또는 그 하늘을 상징하는 태양 숭배 사상이 있고 그것으로 쥬신들은 나라 이름을 만들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하늘님·(하늘은 환하니까) 환한님·환님·한님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이 한자로 표현되면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들이 바로 나라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죠. 또 태양은 불[火]로 표현되지요. 그래서 불과 관련된 말들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양은 황금같이 찬란한 빛을 발하므로 황금 또한 중요한 나라의 이름이 됩니다. 이것도 분명히 중국과는 다릅니다. 중국의 나라이름들은 대부분이 그 땅 이름입니다.

쥬신은 하늘나라 임금(天帝)을 의미하는 말로 환님(桓仁 : 환한 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말이죠. 쥬신이 말하는 하늘나라는 '고(高 : 뜻으로 사용)' '환(桓 : 음으로 사용 - 환한 빛을 의미)' '백(白 : 뜻으로 사용 - 환한 빛을 의미)' '불(不 - 음으로 사용 : 태양 또는 불[火])' 등의 글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이나 한반도의 쥬신들이 흰색을 광적으로 숭상하는 것도 바로 태양숭배 나아가 하늘 님의 숭배 사상인 셈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칸이 천신(天神)의 자손이라지만 그 권위는 한족(漢族)의 황제(皇帝)보다는 매우 허약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부족 연맹체와 같은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 초기에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청태조)는 한족(漢族)의 종법제도(宗法制度 : 장자상속제)를 받아들여 맏아들을 후계로 삼았으나 불화(不和)가 심하자, 아예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8명의 왕(王)이 사이좋게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려 라고 유언합니다(1626).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너무 강력한 권력을 가진 한족(漢族)의 황제 같이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늘에 죄를 범하게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李鴻彬, 『淸代開國史略』(濟魯書社 : 1977) 118~119쪽 ;『淸太祖實錄』卷1].

그러면 한(큰) 사상이 현실 정치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되는지를 알아봅시다.

한(汗, 또는 韓)은 순 쥬신의 말로 '크다[大]', 또는 '많다[多]'는 것입니다. 나아가 한(汗, 또는 韓)은 하나[一]이고 바르고[正] 가운데[中]이기 때문에 우두머리[임금]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의미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韓(우물, 또는 땅 이름)이나 汗(땀)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한'이라는 순 우리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韓이나 汗이라는 글자는 한(큰)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한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앞으로는 한(큰)이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한(큰) 사상은 가장 큰 것은 하늘[天]이고 그 하늘의 자손[天孫]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가장 큰 것이 가장 옳고 정통성을 가졌다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결국 가장 큰 것은 하늘의 명령[天命]이 임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一]'라는 것이 '한(큰) 사상'의 본질입니다.

한(큰)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쥬신의 전쟁 문화일 것입니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북방계 유목민(쥬신)들은 무를 숭상하고 힘센 젊은이를 우대하는 수렵사회의 가치관과 하늘[天]은 힘이 있는 큰 나라[大國], 또는 큰 임금을 돕는다는 천명(天命)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東亞硏究所編 『異民族の支那統治史』(東京 : 講談社 : 1943) 288쪽, 292쪽]. 물론 아무 나라나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천손의 나라 중에 큰 나라[大國]라야 하겠죠.

여기에는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만약 쥬신 부족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합시다. 그러면 부족들은 항복하거나 끝까지 싸우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쥬신은 많지도 않은 인구로 기병(騎兵)을 위주로 전쟁을 하기 때문에 쥬신 간의 전쟁은 쌍방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 쉽습니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막심할 수 있지요. 마치 사자나 호랑이가 서로 만나면 가급적 피하듯이 이들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쥬신 간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어떤 구실이 필요합니다.

이 때 바로 샤먼이 제 구실을 합니다.

쥬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군장들은 샤먼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졌거나 샤먼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는 샤먼은 점(占)을 치는 시늉을 해서 "하늘(신)이 당신을 선택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민속원 : 2001) 21쪽]"는 식으로 결정함으로써 하나의 부족이 이내 보다 큰 세력 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쥬신은 싸움도 없이 쉽게 엄청난 세력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바로 이 같은 한(큰) 사상이 원(元)나라나 청(淸)나라와 같은 세계적인 대제국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일반적으로 한족(漢族)들은 효(孝)를 중요시하며 노인을 공경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하늘[天]은 중화문화를 수호하고 성인(聖人)을 돕는다는 천명관(天命觀)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한족(漢族)과 쥬신이 가진 이데올로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족(중국인)들은 특정한 중원 문화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쥬신은 시대적이고 세대에 순응(順應)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쉽게 말해서 중국인들은 무조건적으로 가장 중국적인 것(상당히 주관적 요소가 강하겠죠?)을 지켜야 한다고 보는 반면, 쥬신들은 시대적으로 가장 강력한 집단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농경민과 유목민의 차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이 같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조차도 중국의 문화(文化) 속으로 녹여버리려고 합니다. 이 같은 특성은 모든 새로운 학술적인 용어도 우리처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번역해서 중국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죠. 이 안에는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것을 몸체로 삼고 서양의 기술들은 단지 필요에 따라 사용할 뿐)'의 생각이 뿌리깊이 박혀있습니다. 즉 중국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데에 대하여 조금도 생각을 바꾼 것 같지가 않습니다[이것은 제가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지적했던 중국인들 고유의 불패사상(不敗思想)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 혁명을 보면 기라성(綺羅星)같은 수많은 외국 유학파들을 물리치고 중국밖에 모르는 중화국수(中華國粹) 민족주의자 모택동(毛澤東)이 권력을 장악한 것도 다 그런 이유지요].

예컨대 현대의 대표적인 코드인 '디지털(digital)', 또는 '아날로그(analog)'라는 용어를 한국이나 일본은 그대로 사용하는데 반하여 중국인들은 '수마(數碼)'와 '모의(模擬)'라는 조금은 이해가 안 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디지털(digital)이라는 것이 수(數)를 의미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단순히 수(數)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은 아니지요. 우리가 DB(데이터베이스)를 그저 DB(데이터베이스), 컴퓨터(computer)를 그저 컴퓨터라고 해야지 전산기(電算機)라고 하면 안 되듯이 말입니다(요즘 컴퓨터를 계산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한편으로 학생들의 현대 기술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한(큰) 사상은 문제가 없을까요? 만약 이 사상 체계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쥬신의 위기도 없었겠지요.

한(큰) 사상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동화력(同化力)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과 일본에서는 '냄비근성'이니 하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즉 쥬신은 그 특유의 '한(큰)' 사상으로 인하여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큰 것에 쉽게 동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오늘날 한족(漢族)과 같은 정체성(ethnic identity)을 유지하기 힘들죠. 특히 농경화(農耕化)된 쥬신 사회는 특히 중국에 쉽게 동화되려는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동아시아에서 하나의 사회가 농경화되면서 중국 문물을 가장 따르고 싶어 하는 사회가 되어버리면 중국과의 무슨 차이가 생깁니까? 결국은 중국에 동화(同化)되고 말지요.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쥬신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한족(漢族) 스스로 통치한 적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한족(漢族)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질 않습니까?

'한족(漢族)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쥬신의 핍박에 묵묵히 순응(順應)하고 참고 견디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국의 쥬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한족(漢族)만이 남는 것이지요. 힘을 기른 한족(漢族)들은 남은 쥬신들을 없애나가기 시작하지요. 중국을 대부분 지배한 사람들은 쥬신이지만 결국 바람처럼 사라져 가고 끈질긴 '땅의 아들'들, 즉 한족(漢族)들만 그 땅의 주인으로 남아있는 것이죠.

이 점 쥬신들은 분명히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 남은 쥬신이라고는 (몽골에 극소수가 있지만) 사실상 한국과 일본뿐인데, 이들도 스스로 쥬신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4) 산채 요리**

지금까지 우리는 큰(한) 사상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상은 우리 핏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반도쥬신과 만주나 몽골쥬신의 경우에는 그 환경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큰(한) 사상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모습을 이제 한 번 추적해봅시다. 큰(한)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쥬신은 만주와 몽골 지역입니다. 몽골은 이미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만주 쥬신들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만주 쥬신은 흔히 여진(女眞 - [뉴신], 또는 [쥬신]으로 발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여진이라는 말은 쥬신을 음차(음을 빌어 표현)한 말입니다. 가장 저질이고 자극적으로 표현된 욕설이죠? 성적(性的)으로 이 만큼 큰 모욕감을 주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 민족명으로 사용했다니 기가 찹니다. 사실 여진은 쥬신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를 빌려온 말인데 한족(漢族)들이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거란(동호계)이 세운 요(遼)나라 때 여진은 숙여진(熟女眞 : 잘 익은 여진 - 말 잘 듣는 여진)과 생여진(生女眞)으로 분류됩니다.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대체로 보아 요나라에 복속되어 살아간 사람들을 숙여진(熟女眞)이라 하고 그 나머지 몽골 만주 일대를 떠도는 사람들을 생여진(生女眞) 정도로 부른 것 같습니다.

숙여진이나 생여진이나 같은 민족이지만 특정한 군장이나 수령의 통일적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많아야 그저 1백호 정도 적은 경우는 한두 집 정도가 무리를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여진의 경우에는 그들의 거주지가 동북으로는 그 끝도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나라 정부도 여진에 대한 군사적인 방비를 하지도 않았습니다(『契丹國志』 22). 이것은 유목민들이 속성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당시 만주 쥬신(여진)은 일정한 사회적 법률도 없으며 정치적으로 국가적인 체제를 정비할 수가 없었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금의 시조였던 김함보의 증손자 헌조(獻祖)에 이르러 땅을 개간하고 가옥도 지어서 정주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金史』1 「世紀」)

그런데 어째 명칭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아주 옛날 한족(漢族)들은 사람을 짐승취급을 하더니 이젠 아주 산나물[山菜] 취급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살다가 보니 별일이 정말 다 있습니다.

문제는 거란입니다. 거란은 같은 쥬신 계열의 민족이면서도 한화정책을 심하게 추진하여 같은 민족들을 아예 식물 취급을 한 것이죠(마치 한국인들이 중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죠?). 그러니 거란은 북부의 몽골과 북만주 생여진의 미움을 산데다가 특산물 조공을 지나치게 요구하니 이제 그 분노가 폭발합니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여진은 요나라 사람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宋史』472). 몽골도 거란을 같은 민족이지만 "한족(漢族) 트기"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거란'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남부에 있는 여진을 숙여진이라 하고 북부의 여진을 생여진이라고 했는데, 이 생여진 가운데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 : 흑수) 부근에서 아골타(阿骨打)라는 영웅이 나타나 부족들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설합니다(『契丹國志』9). 이 생여진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입니다. 그리고 힘을 몰아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반도 쥬신(고려)을 신복(臣服)시킵니다.(『金史』60 「招聘表」; 『金史』135 「高麗傳」)

금나라의 태조(아골타)는 요나라(거란)를 멸망시킨 후 "여진과 발해는 모두 물길(勿吉)에서부터 나온 한 집안"이라고 말합니다(『金史』卷1 本紀1). 그러니 결국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앞에서 보시다시피 '발해 = 고구려'이지 않았습니까?

의식이 있는 쥬신의 제왕들은 쥬신의 풍속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전을 기합니다(후일의 청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은 요나라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금나라 세종은 "회령(會寧)은 국가 흥왕(興王)의 땅인데 영안으로 도읍을 옮긴 후 우리는 차츰 우리의 풍습을 망각하고 있다. [……] 그러니 자손들을 회령으로 보내어 그 풍속을 익혀야 한다."(『金史』卷7 世宗紀)고 하면서 여진인들의 성(姓)을 한자(漢字)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고 한족(漢族)의 의복과 장식을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개·돼지로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산나물로 취급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쥬신의 입(거란)에서 나와서 전체 동아시아에 퍼져나갔으니 말입니다.

***(5) 황금(黃金)의 역사**

금나라는 가장 알타이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알타이 문화의 특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무엇보다도 국호(國號)가 그렇지 않습니까? 금나라(청나라의 전신)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아이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아이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2卷 太祖紀)."

이를 보면 쥬신족들은 알타이(金)라는 말이 가진 의미들, 즉 ① 금(金)이나 쇠, ② 해 뜨는 곳 즉 동쪽(東), ③ 시작하다(始), ④ 밝다[明], ⑤ 하늘을 나는 새[鳥] 등의 의미들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민들 가운데는 황금 곧 쇠(金)에 대한 신앙이 있는데 쇠 소리가 나쁜 귀신을 쫓아준다는 믿음이 있어서 신앙의식에 쇠 소리가 따른다고 합니다[주채혁, 『몽고민담』(정음사 : 1984)]. 그래서 쇠를 오보에 바치기도 합니다.

금나라의 사람들은 원나라 때는 원나라에 완전히 흡수되어 원나라 국민으로 살아갑니다. 그 후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다시 ① 해서여진(海西女眞 : 해서 지방에 거주), ② 건주여진(建州女眞 : 건주 지역에 거주), ③ 야인여진(野人女眞 : 극동에 거주하는 여진)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大明會典』107). 이들 가운데 조선과 인접해있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흥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가장 강성했으며 선진적이었습니다.『요동지(遼東志)』에 따르면, 건주여진은 이미 의식주 생활이 조선이나 중국과 유사할 정도로 발전한 단계였다고 합니다(『遼東志』7).

[그림 ②] 명나라 때의 여진족(만주쥬신)

건주여진(建州女眞)과 조선(朝鮮)은 바로 연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물론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건주여진은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경작하여 먹었고 조선인과 대대로 혼인하며 살았기 때문에 "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世宗實錄』11, 19, 77, 84). 제가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여진의 말은 함경도 말과 유사하여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제가 건주(建州), 건주(建州)하니까 낯설게 느껴집니까?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북간도(北間島)입니다. 현재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延辺朝鮮族自治州)입니다. 한국(반도쥬신) 민족문학의 대명사인 『북간도(北間島)』『토지(土地)』의 중심 무대인 곳이죠. 건주, 즉 북간도는 반도 쥬신의 독립의 터전이자 쥬신의 제 2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장백산(백두산) 지역이죠.

이제 아시겠죠? 제가 청나라를 그저 동족(同族)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죠 ?

건주여진은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 : 1559~1626)라는 반도 쥬신(신라) 출신의 희대(稀代)의 영걸(英傑)이 나타나서 만주 쥬신의 운명이 바뀝니다.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는 한국식으로 표기하면 김누루하치가 됩니다. 즉 아이신자오뤄는 경주 김씨라는 의미의 김(金)이고, 누루하치는 쥬신 고유어이므로 김누루하치가 맞지요.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명나라의 술책으로 잃고 만주와 몽골을 심하게 이간질하는 명(明)나라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다가 저 유명한 싸얼후(薩爾滸) 대전(1619)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국경영에 나서게 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싸얼후 대전에 대해서 한 번도 들으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들었다면 쥬신의 역사도 바로 섰겠지요. 그러나 이 전쟁이야말로 쥬신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족(漢族)과의 한판 승부였습니다. '싸얼후'란 만주어로 울창한 숲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현재는 푸순(撫順) 인근의 오지(奧地)입니다.

[그림 ③] 싸얼후 대전과 청군의 진출로

싸얼후 대전은 역사상 한족(漢族)과 쥬신 사이에 벌어진 최대 전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싸얼후에서 2만의 정예 병력으로 명나라의 27만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滿文老檔』「太祖」,『滿洲實錄』5). 싸얼후(薩爾滸) 대전은 동아시아의 역사상 3대 전쟁이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이 전쟁이 중요한 것은 쥬신 기병전술의 우수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 태조 김누루하치는 늘 쥬신 기병 1만이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 만주와 몽골에는 크게 만주인(만주 쥬신)과 몽골인(몽골 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몽골이란 민족적 의식은 칭기즈칸의 원나라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까지도 여진(만주 쥬신)은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통일적인 구심체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요동 - 만주 - 몽골의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한 분이 바로 청태조(김누루하치)입니다.

몽골이나 여진은 민족적으로 다르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워낙 광대한 영역인 몽골 - 만주 지역에 소수가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통합되기 어려웠던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 이후 이 지역은 두 영걸에 의해 통합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견고하게 가지게 됩니다. 한 분은 칭기즈칸이요, 다른 한 분은 청 태조입니다.

[그림 ④] 청 태조(김누루하치)

한 가지 꼭 알아 두셔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몽골이나 만주인들이 별로 다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은 같지 않지만(중국도 지역별로 말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특히 광동어는 완전히 외국어입니다. 우리도 전라도 사투리나 경상도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는 서로 잘 통하지 않잖아요) 의복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청태조는 몽골도 만주와 같은 민족으로 간주합니다(『滿文老檔』「太祖」10, 13, 14). 결국 만주와 몽골은 청나라 태종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통합되어 중국을 경영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1600년경에 이르면 만주쥬신(여진족)의 공동체는 혈연적인 유대가 느슨해지고 지역공동체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혈연적 유대가 강한 일부의 명문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죠. 즉 17세기의 만주쥬신 사회는 '씨족공동체', 또는 '씨족공동체연맹'이라기보다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입니다[三田村泰助, 『淸朝前史の硏究』(東洋史硏究會 : 1973) 218쪽, 245쪽].

물론 만주 쥬신 공동체라고 하면 그것이 혈연이든 지연이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혈연적 유대가 약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쥬신 간의 차이도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혈연적 유대의 약화를 보여주는 예를 봅시다. 1595년 청 태조의 허투알라성(赫圖阿拉城)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의 기록에 따르면, 내성(內城)에는 청태조의 친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외성(外城)의 바깥쪽에는 각종 장인(匠人)들이 거주했다고 합니다(申忠一, 『建州紀程圖記』).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거 몽골과 만주 지역에는 수십 개의 민족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차이는 매우 확연하다는 점을 배우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차이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듯이 한족(漢族)과 새끼중국인들은 떠들어댑니다만 실제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몽골과 만주 쥬신들은 동족(同族)내에서 지역적 차이로 발생하는 특수성(特殊性)들이 소멸되고 보다 공통성(共通性)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몽골·만주 지역에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활성화되어 그나마 존재하던 이질성(異質性)이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주(建州), 즉 북간도 지역의 농업생산력 증대에 따른 전반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통합의 핵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 국가간의 통합이론(統合理論 : Integration theories)들 가운데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적 활성화가 국가간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강력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유럽연합(EU)의 결성에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청 태조가 만주 쥬신들을 팔기(八旗)로 조직하면서 이제 만주 지역은 왕족(王族) - 자유기인(自由旗人 - 평민) -보이(Booi : 包衣 - 노비) 등으로 엄격히 구분됩니다.

이 자유기인(이전의 일반 여진인 후금 이후 여진족 평민)이 바로 제신(諸申)이죠. 즉 일반적인 만주인, 즉 여진족(쥬신족)을 부르는 말인 제신[諸申 : 이 말은 쥬신(Jüsin), 또는 쥬션(Jusen)으로 발음 됨. 조선(朝鮮)이나 숙신(肅愼)·직신(稷愼)의 중간 발음]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건주부(建州部) 이외의 지역에서 후금(청나라)으로 귀순한 일반적인 여진족을 부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는 일건(Irgen : 伊爾根)이라고 하였습니다. 몽골인, 만주의 조선인 등도 모두 자유기인에 속하게 됩니다.

제신(諸申), 즉 쥬신들은 이전에는 촌장이나 족장에 속하여 농업이나 유목 등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하였지만 후금(청나라)이 건국될 즈음에는 행동의 제약도 받으면서 납세의 의무도 지게 된 것입니다[安部健夫,『淸代史の硏究』(創文社 : 1971) 147~153쪽]. 이것이 건주(建州)의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으며 중국경영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입니다.

실제 초기 청나라가 의지할 수 있는 혈연적인 공동체라고 해봐야 30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소 1억 이상의 한족(漢族)을 다스리는 그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국력의 누수를 방지하고 권력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쥬신들 간의 연계를 강화합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몽골 쥬신과 여러 형태로 민족 통합(ethnic integration)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통한 민족 통합정책입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만주족 여인이 한족(漢族)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만약 이를 어기고 결혼한다면 족보(族譜)에서 삭제하였습니다. 즉 만한통혼(滿漢通婚)을 금지한 것이죠. 그러나 몽골에 대해서는 철저히 혼인을 장려하는 연혼정책(聯婚政策)을 사용했습니다. 청나라 황제마다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后妃)로 삼고 청 황제의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의 왕공의 자제와 결혼을 합니다. 이것은 만주족과 몽골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쥬신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의식(민족형성의 주관적 요소)'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민족의식이 오늘날 '일본인', '한국인'과 같이 형태는 아니겠지요. 청나라가 1억이 넘는 중국대륙을 지배하면서 주축이 된 민족(만주족)은 순수한 의미의 극소수 만주족(10만여 명 : 1577년 기준)이라기보다는 몽골 - 만주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민족들이며 이들을 사실상 하나의 민족[쥬신, 또는 제신(諸申)]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중국을 경영한 것이죠.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천도(遷都)한 이후 흉노·거란·동호·몽골 등 여러 이민족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각종 서적들을 모아서 불태웁니다[임계순,『淸史』(신서원 : 2001) 110쪽].

1636년 3월, 심양(瀋陽)에서는 몽골의 대칸(大汗)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부족장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때 몽골, 전체 만주인, 요하의 한족(漢族) 들이 모여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愛新覺羅皇太極), 즉 김홍타이치를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합니다. 이때 몽골의 16부 49추장들은 김홍타이치(청태종)에게 칭기즈칸(成吉思汗)의 천명(天命)이 내린 것을 인정하고 성스럽고 현명하고 인자한 황제라는 뜻으로 '복드세첸칸(Bogda-Sechen Khagan)'이라는 존호(尊號)를 바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 부족들은 김홍타이치(청태종)에게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의 존호를 바칩니다. 결국 같은 말이죠.

이 존호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단군왕검(檀君王儉), 즉 텡그리(고도)옹군(Tenggeri Onggun)입니다.

이로써 김홍타이치(청태종)는 전체 쥬신[제신(諸申)]을 아우르는 텡그리옹군, 즉 대칸(大汗)이 되었고 대칸의 자격으로 국호를 청(淸)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그는 대칸이라는 칭호대신에 황제(皇帝)로 바꾸어 중국을 통치합니다.

***(6) 황혼의 쥬신**

지금까지 보았듯이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한'이란 순 우리말이며 ① 하나라는 의미, ② 크다는 의미로 몽고어나 만주어에서 사용하는 한[汗, 王] 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1635년 청태종은 여진(女眞), 또는 제신(諸申)이라는 말 대신 만주(滿洲 : [만슈])를 사용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즉 16세기경부터 한반도의 북방의 쥬신족들은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불교에서 지혜로움을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 신앙에서 나온 말로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岸本美緖, 『'東アジアの世界』(山川出版社 : 1998)]. 그리고 누루하치의 근거지였던 허투알라(赫圖阿拉)를 흥경(興京)으로 개칭합니다. 청태종은 귀순한 한족(漢族)들을 왕으로 봉하여(『淸史稿』卷2 太宗本紀 2), 쥬신과 한족(漢族)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중원통치를 본격화합니다.

1636년 드디어 김홍타이치는 몽골-만주 전체 쥬신의 텡그리옹군(단군왕검)의 지위에 오릅니다. 그는 전체 쥬신을 아우르는 텡그리옹군[대칸(大汗)]의 자격으로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군주 명을 칸에서 황제(皇帝)로 바꾸게 됩니다. 중국 경영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로 생각됩니다. 이로써 부족사회(또는 만주·몽골 귀족연합체)에 불과했던 만주 쥬신이 불과 20~30년 만에 세계적인 대제국(大帝國)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죠.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점은 만주인(滿洲人)이라는 것은 단순히 전체 여진인들을 의미하는 제신(諸申 : 쥬신)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몽골까지 통합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말이라는 것이죠. 즉 "지금부터 모든 사람들은 오직 만주(滿洲)라는 이름만을 칭한다(『淸太宗實錄』25)"라는 청 태종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주는 이른 바 범쥬신을 의미하는 용어라는 것이죠.

[그림 ⑤] 청 태종(김홍타이치)

칭기즈칸이나 청 태조와 같은 영웅들은 제신(諸申 : 쥬신)이라는 산만한 집단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여 새로운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들이 다른 민족 집단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같은 쥬신이라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산업구조를 포함한 경제 환경 및 지리적 차이로 인하여 그 공통성이 약화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한반도의 쥬신(한국인)입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서의 쥬신의 동질성보다는 보다 발달되고 세련된 세계적인 중국문화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합니다. 쥬신족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문화를 이룩한 종족은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쥬신족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의 쥬신인(한국인)들은 일찌감치 세계화(globalization)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국인들은 스스로가 가진 쥬신적인 특성들을 인위적으로 억압하고 정서적으로 중화민족(中華民族)이 되기를 염원하여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의 본질입니다. 만약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공자(孔子)에 대하여 욕설을 퍼붓는다면 중국에서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한국에서는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찰 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같은 소중화주의가 이제 그 대상이 미국(美國)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세대(new generation)는 구세대(old generation)가 가진 중국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고 "중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많이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면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대단히 반가운 일이지요.

하지만 세계 최고를 향하는 맹목적인 추종의식은 바로 소중화주의를 만들어낸 한반도 쥬신족들의 역동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실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큰) 사상의 변질된 모습입니다.

한국인들의 그러한 역동성은 사실 따지고 보면 유목민들이 가진 성격이기도 합니다. 천손(天孫)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유목민들은 대영걸이 나타나면 그 천명이 그 영웅에 임했다고 쉽게 인정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칭기즈칸이나 청 태조가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단시간에 쉽게 범쥬신 연합체제를 결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유목민들의 이 같은 특성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쥬신들은 그 대상이 중국이고 미국이었던 차이 밖에는 없는 일입니다. 모르죠.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샤먼의 지시에 따라 겔(이동식 가옥)을 철거하고 이미 풀이 부족해진 곳을 떠나 목초가 풍부한 다른 장소로 가듯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韓國)이라는 말이 단순히 한반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한국이라는 말은 천손사상(天孫思想)을 나타내는 환국(桓國)과 그 우두머리의 나라 칸국(汗國), 나아가서는 쥬신의 이상국(理想國 : ideal state)을 나타내는 말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는 요동을 비롯한 몽골·만주·한반도·일본 등 쥬신의 땅들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한국에서부터 쥬신의 큰(한) 사상이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아가 이 생각들이 현실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쥬신을 단합시키고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쥬신의 부정적인 특성도 동시에 나타나 쥬신의 황혼(黃昏)이 서서히 우리 곁에 다가온 것도 여러분들이 아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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